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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Why] 카이스트에 불어닥친 태풍은?

 

조선일보|기사입력 2007-12-15 15:47 |최종수정2007-12-15 19:47 기사원문보기


숨가쁜 변화… 07학번부터 모든 강의 영어로만

평점 3.0 이상만 수업료 면제… 교수 정년보장 심사 엄격해져

“속도 위반”… “영어 잘 못하는 학생 배려 부족

교수들 자부심에 상처 입어 학생들 의견도 안 물어보고…”


지난 7일 오후 3시 대전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 행정동 앞. 50여명의 학생들이 차례로 모여 섰다. 손에 든 팻말에는 “Stop New Policy” “학생 의견 배제된 정책 강행 중단하라”는 주장이 씌어있다.

학생들은 돌아가며 마이크를 잡았다. “학점에 따른 수업료 징수와 100% 영어 강의에 반대한다.” 그러나 이들의 발언은 학교 측 인사의 출현으로 중단됐다. “국민 혈세로 공부하는데, 자격이 못 미치면 장학금을 줄 수 없다”며 목청을 높이던 그는 “이런 거 하지 말고 공부를 하라”며 나무랐다. 학생들 사이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여기는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학생들도 참여할 권리가 있습니다.” 시위는 1시간 만에 끝났다.

이날 시위는 총학생회 학부교육혁신학생대책위원회에서 주관했다. 지난해 7월 취임한 서남표(71) 총장이 카이스트 개혁의 칼을 뽑아든 후, 본격적인 학생 시위로는 처음이었다. 학부생 2700명 중 600명이 서명한 용지도 학교 측에 전달했다.

사흘 후인 10일 저녁 7시. 교수협의회 회의 석상에서는 최근 침체한 교수들의 사기 진작 방안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요즘 교수들 사이에 의견이 뜸하고 전반적으로 활력도 떨어진 것 같습니다. 학내 개혁 등에 대한 주장과 의견을 활발히 주고받을 수 있도록 내부용 홈페이지를 하나 운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난 9월 테뉴어(tenure·교수 정년보장) 심사에서 신청 교수 35명 중 15명이 탈락하는 전례 없는 충격을 안기면서 카이스트는 대학 교육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서 총장은 “10년 내 카이스트를 MIT(매사추세츠공대) 수준의 세계적 명문으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테뉴어 심사 강화, 전면 영어 강의, 수업료 차등 부과 등 혁신적인 정책을 잇달아 내놓았다.

세계적 과학전문지 사이언스는 지난달 서 총장의 개혁을 보도하며 ‘MIT 공학자 한국 교육계 핵심부 흔들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사이언스는 “·카이스트 교수 심사 결과는 한국적 정서로 볼 때 충격적”이라며 “서 총장의 혁신적인 조치들이 전통에 얽매인 시스템을 뒤흔들고 있다”고 전했다.

개혁의 대상인 카이스트 교수와 학생들은 변화의 한가운데를 어떻게 지나고 있을까. 그들은 어떻게 달라졌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태풍이 불고 있는 카이스트 안으로 들어가봤다.

■영어 강의 “받다 보면 늘긴 늘지만…”

지난 10일 오전 11시. 카이스트 창의학습관 403호에서는 ‘세계화와 국제 정치’ 수업이 한창이다. 자리를 메운 학생은 40여명. 강의를 맡은 인문사회과학부 김소영 교수가 질문을 던졌다. “지금 나눠준 ‘세계화에 대한 각국 여론’ 자료에서 주목할 점이 무엇인가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간다. “자료에 따르면, 세계화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우리나라가 월등히 높습니다.” 한 학생의 답변이 끝나자 교수의 재질문이 이어진다. 강의와 문답은 모두 영어로만 오간다.

영어 강의는 개혁 태풍을 맞은 학생들이 가장 체감하는 부분이다. 올해 카이스트 신입생은 전원 영어로 강의하는 수업만을 들어야 한다. 07학번부터 시작해 2010년까지 카이스트의 모든 학생이 100% 영어 수업을 받는다는 것이 개혁의 목표 중 하나다. 현재 2학년 이상에게는 선택사항이다.

김소영 교수는 “한국어 수업이었으면 A 학점을 줬을 학생에게, 영어가 모자라다고 해서 B학점을 줘야 할 지 고민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역사학 특강’을 맡은 인문사회과학부 박범순 교수는 “학기 초에 비해 학생들의 영어 말하기 능력이 눈에 띄게 나아졌다”고 말했다. 영어 강의가 매력적이라 카이스트를 선택했다는 내년도 지원자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부터 카이스트 입학생은 100% 영어 강의를 들어야 한다. 12일 인문사회과학부 김소영 교수가 강의하는‘세계화와 국제정치’수업 중 한 학생이 영어로 발표하고 있다. /대전=전재홍 기자 jhjun@chosun.com

학생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 등 해외에서 살았던 2학년 최우현(수학과)군은 “영어 강의 덕분에 현지에서 배운 영어를 안 잊어버릴 수 있다”고 장점을 들었다. 하지만 최 군은 “영어를 잘 못하는 교수님들의 강의는 듣기가 괴롭다”며 “독학하느라 불필요한 시간이 더 많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화학과 2학년 오미정양은 “취지와 목표는 좋지만, 영어를 잘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조치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전공과목인 경우 불만의 목소리가 강하다. 교양 과목은 조금 못 알아들어도 크게 부담이 없으나 ‘미래가 걸린’ 전공과목은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치명적이라는 주장이다. 2학년 양현승(화학공학 전공)군은 “영어로 강의하다가 진도가 늦어져 시험 기간 직전에 뒤처진 진도를 마구 나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1학년 이용우 군은 “교수와 학생들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영어 강의가 시행돼 강의 질이 낮은 경우가 많다”며 “한국어 강의도 개설해 선택권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학교 측 교육혁신본부가 지난 5월 1학년 19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영어강의가 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느나”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은 17.6%(매우 그렇다 2.5%, 그렇다 15.1%)였다. 반면 부정적인 답변은 49.4%(전혀 아니다 15.1%, 아니다 34.3%,)였다. 나머지는 ‘보통’이라고 답했다.

■“우리가 공부만 하는 기계인가요”

카이스트 한 학기 등록금은 수업료 600만원과 기성회비 150만원, 도합 750만원이다. 개혁 바람이 불기 전까지는 수업료가 면제였다. 그러나 서 총장은 수업료를 학점에 따라 차등 부과하겠다고 선언했다.

올해 입학생부터는 평점 3.0(만점 4.3) 이상만 수업료가 면제된다. 3.0 미만~2.0 초과자는 일부를, 2.0 이하는 전액을 내야 한다. 징수의 공식은 600만원×(평점-2.0)이다. 예를 들어, 평점이 2.5인 학생은 600만원×(2.5-2.0)=300만원이 수업료가 된다. 기성회비 150만원을 포함하면 내야할 총 등록금은 450만원이다.

학점이 상대 평가인데다, 재수강을 3과목으로 제한하는 정책까지 함께 시행돼 학생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1학년 유제성군은 “1학기 중간고사를 치고 나서, 점수가 낮아 휴학을 한 친구가 2명이나 된다”면서 “우리가 공부만 하는 기계도 아닌데, 성적이 나쁘다고 당장 하고 싶은 공부를 그만둬야 하나”라고 말했다.

수업료 차등 부과에 대한 학교 측 홍보가 부실했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4월 1학년 ‘반(班)대표자협의회’가 올해 입학생 49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수업료가 전액 무료인 줄 알고 입학했다”고 답한 학생이 118명(24%)에 달했다.

750만원이 지나치다는 의견도 상당하다. 같은 조사에서 “교육환경이 수업료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289명(59%)의 학생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고 답한 학생은 80명(16%)였다. 나머지는 ‘모르겠다’고 답하거나 대답하지 않았다.

■테뉴어 제도 “채찍만 있고 당근은 없다”

교수들에게 떨어진 폭탄은 ‘테뉴어 심사 강화’다. 학문적 성취와 업적에 대한 고삐를 조이자 교수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게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학문적 성과를 키우기 위한 다각적인 시도도 나온다. 기계공학과 양민양 교수는 풍력과 태양에너지 연구에 뛰어들었다. 양 교수는 “에너지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학교가 제도적으로 지원해줘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실적’에 대한 부담감도 크다. 대학원 연구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수리과학과 4학년 김인씨는 “교수님께서 논문 발표 등의 실적을 예전보다 은근히 더 강조한다”고 말했다.

카이스트는 교수 인원을 현 420명에서 향후 5년간 70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테뉴어 심사는 임용 후 8년 이내에 받아야 한다. 이제까지는 형식적 심사가 정교수 승진 7년 뒤에 시행됐다. 그러나 일찌감치 딴 길을 찾아갈 기회를 준다는 취지에서 심사 시기를 앞당겼다.

최근 과학기술부가 지원하는 ‘국가과학자’에 선정된 화학과 유정 교수는 “테뉴어 강화는 진작 시행됐어야 할 제도”라며 적극적인 찬성을 표했다. 그러나 “채찍만 있고 당근에 인색하다는 것이 문제”라고 유 교수의 지적이다. “심사가 엄격해질수록, 통과한 교수들에게 인센티브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조건 쥐어짜기만 하는 것은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난 7일 카이스트 행정동 앞에서 학생 50여명이 100% 영어 강의, 수업료 차등 부과 등의 정책 강행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대학 중에서도 MIT와 하버드대 등 일부에서만 시행되는 테뉴어 제도를 밀어붙이는 것이 한국적 현실을 무시한 처사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카이스트가 전범으로 삼는 하버드대의 경우, 테뉴어 심사에서 떨어진 교수들라고 해도 이름 있는 주립대 등에 쉽게 자리를 얻어 옮긴다. 그러나 ‘테뉴어 탈락=부적격 교수’로 인식되는 국내 정서상, 카이스트 심사에서 떨어진 교수가 다른 학교로 옮기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회의적 시각도 있다.

■“방향은 공감하나 속도에 문제”

그간 카이스트내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높았으나, 실제로 실행에 옮겨지게 된 것은 서 총장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확고한 추진력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 교수들 내부에서는 서 총장이 제시하는 비전과 목표에 대해서는 대체로 찬성한다. 전임 로버트 러플린 총장 당시 학교가 삐걱거려 “이번에도 실패하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교수협의회 회장 최광무 교수(전산학과)는 지난 10월 서 총장에게 보낸 자신의 이메일을 교수 전체에게 공개했다. 최 교수는 이메일에서 “혹시 내가 좀 모자라지는 않나 하는 자책감과 언제 학교를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학교를 감싸고 있다”며 “교수들이 신바람 나게 일할 때 학교는 크게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서 총장은 곧바로 답신을 보냈다. 총장은 “심사 결과가 공개돼 상처를 받은 교수들의 아픔을 공감한다”며 “해당 교수들의 장래(future well being)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기자를 만난 최 교수는 “단순히 논문 수로 점수를 매기는 계량적 평가가 아니라, 사람(학과장)이 사람(소속 교수)을 평가하는 시스템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더는 누워있는 돌도 춤추게 해야 하는데 교수들의 활기가 사라졌다”며 “자부심을 갖게 해달라”는 주문도 했다.

1학년 반대표자협의회 박상규 의장은 “학생들의 의견 수렴 절차 없이 개혁 정책을 갑자기 전면 시행하는 것은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학년 임한아양은 교내 영자지 카이스트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개혁에 반드시 학생 의견이 반영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학교 수준을 높이는 데에 최선책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3학년 이유호(원자력및양자공학 전공)군도 “개혁의 목표는 민주주의 실현이 아니라 학교의 발전”이라며 “정책의 효율성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카이스트는 올해 영국 더 타임스의 세계대학 평가에서 종합순위로는 132위(작년 198위), 공과대 순위에서는 48위(작년 37위)를 차지했다. ‘2011년 세계 10대 대학 진입’이 목표인 카이스트가 넘어야 할 벽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