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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공부는 어떻게?

진짜 학생부 쓰는 ‘흙수저 고교의 변신’

진짜 학생부 쓰는 ‘흙수저 고교의 변신’

등록 :2016-03-31 22:21수정 :2016-04-01 09:05

 

     
서울 강북구 삼각산고등학교의 1학년 2반 학생들이 29일 철학 수업 시간에 조별로 모여 ‘잘 사는 삶, 바람직한 삶’을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학생부의 배신ㅣ불평등 입시 보고서]
④ 대안은 학교에 있다

서울 삼각산고 ‘차별없는 학생부’
“한명도 포기안해요”…‘공교육-학생부 입시’ 선순환 이끈다
“정의롭다는 건 뭐예요?” “정직과 신뢰의 차이는 뭔가요?”

지난 29일 오전 서울 강북구 삼각산고등학교 1학년 2반에서 철학 수업이 한창이다. 정의·명예·권력·건강·사랑·가족·우정 등 여러 가치들 가운데 가장 중시하는 가치를 8개에서 4개, 4개에서 2개, 2개에서 1개로 압축하는 것이 이날 수업의 주제. 30명 남짓한 학생들은 앞다퉈 선생님에게 질문을 쏟아내며 수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강의와 질의응답으로 이루어진 1교시에 이어 4명씩 모둠 토론을 한 2교시에서는 학생들의 참여가 더 활발해졌다.

“나는 권력이 있으면 명예가 따라온다고 생각해.” “나는 명예가 먼저인 것 같아. 이방원은 권력이 없어도 명예가 있어서 반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았잖아.”

1교시엔 발표를 하지 않았던 김서현(16)양도 조선시대 이방원(태종)의 ‘왕자의 난’을 거론하며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 김양은 “친구들 앞에서 의견을 말할 때 긴장이 많이 됐는데, 고등학교 올라와서는 모둠활동이 많아서 그런지 괜찮아졌다”고 말했다.

모든 학생들이 자기주도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면 교사는 어렵지 않게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에 기록할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철학 수업을 진행한 이수영 교사는 김양 모둠에 대해 “‘아름다우면 정말 잘 사는 삶인가’ 등에 대해 다 같이 진지하게 토론하고 논의하는 모습이 철학 수업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다음 시간 모둠 논의 결과를 발표할 때 눈여겨봤다가 학생부에 기록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가 학생부에 기록해야 할 변화와 성장의 순간을 발견한 학생들은 또 있었다. “박○○이란 학생은 벌써 세번째 수업인데 항상 뒷정리를 하더라고요.” “정○○라는 아이는 항상 엎드려 있었는데, 오늘은 거의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참여를 했어요. 그 아이의 성장에서는 오늘의 참여가 되게 중요한 거잖아요.”

삼각산고의 수업에서 교사의 관찰과 평가는 여느 일반고처럼 공부 잘하는 ‘1등급’ 학생에게만 쏠리지 않는다. 1등급부터 9등급까지 학교 활동에 참여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공평한 학생부 기록이 보장된다. 전교 1~20등까지 모아 학생부 특별관리를 해주는 ‘심화반’도, 1등급에 ‘스펙 몰아주기’도 없지만 삼각산고는 올해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등 서울권 대학에 수시모집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많은 합격자를 냈다. 공교육과 학생부종합전형이 어떻게 서로를 강화시키며 선순환할 수 있는지 작지만 소중한 단초를 보여준 셈이다.

학생주도형으로 바꾼 수업방식
3학년 영어, EBS 문제풀이 안하고
미리 예습뒤 수업땐 토론·모둠활동
교사는 학생부 담을 관찰일지 작성
학생은 “문제 잘 풀리는 게 느껴져”

■ 수업은 학생 주도형으로

올해부터 삼각산고 3학년 영어 수업은 기존의 <교육방송>(EBS) 수능 연계교재 등을 풀이하는 방식을 버리고 모든 학생들이 참여하는 ‘거꾸로수업’으로 진행된다. 플립러닝(flipped learning·역진행 수업 방식)이라고도 부르는 거꾸로수업은, 학생들이 미리 집에서 인터넷 동영상 강의 등으로 학습한 뒤 수업 시간에는 토론이나 모둠활동 같은 ‘학생 주도형 수업’을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교사인 이현정·우민수 교사도 자신들이 영어 지문을 해석해주는 강의를 휴대폰으로 촬영해 인터넷 카페에 미리 올려놓는다. 수업 시간에는 동영상 강의를 본 학생들이 4~5명씩 모둠을 이뤄 서로 토론하고 질문하며 다시 한번 해당 지문을 학습한다. 이 교사는 “강의식으로 수업을 할 땐 정말 열심히 필기하는 아이들도 막상 물어보면 ‘학습이 일어나지 않는’(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거꾸로수업을 시작한 지 한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두 교사는 학생들에게 ‘학습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고 했다. 모둠을 이끄는 멘토를 자청했다는 3학년 권은영(18)양은 “영어를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멘토를 하게 되면 싫어도 하게 될 것 같았다”며 “거꾸로수업을 하고 난 뒤부터 문제가 더 잘 풀리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영어 단어도 제대로 읽지 못하던 한 학생이 동영상을 수십번 돌려 보며 교사의 발음을 단어 밑에 적고 해석을 해 온 일도 있었다. 이 교사는 “그 아이가 완벽하게 해석을 한 날, 같은 모둠 친구들이 박수를 쳐주었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 순간은 ‘학생 관찰일지’에 담겼다. 관찰일지에 적힌 내용은 학생들의 학생부에 기록된다.

이날 실용경제 수업을 한 성평제 교사는 “학생들의 토론이 너무 좋으면 동영상으로 찍어 자료로 남긴다”며 “학생부 기록은 객관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각 모둠에 녹음기를 두고 토론 내용을 녹음해 출퇴근길에 듣는 교사들도 있다.

‘비교과-수업 연계’한 교육과정
‘창의적 글쓰기’ 매주 1시간씩 필수
영어 수업땐 말하기·쓰기 공부 병행
교과수업과 교내대회 준비를 한번에
학생·학부모의 입시 부담 크게 줄여

■ 비교과 스펙은 수업과 연계

고교 수준을 벗어나는 과도한 활동이라는 논란이 일고 있는 소논문 쓰기 활동(R&E·과제연구)은 삼각산고에도 있다. 하지만 결과물만 제출하도록 하는 다른 학교들과 달리, 삼각산고엔 소논문을 쓸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과정’이 있다. ‘창의적 체험활동’ 중 하나로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매주 1시간씩 수업하는 ‘창의적 글쓰기 수업’(창글)을 통해 학생들은 자기 감정과 생각, 의견을 글로 표현하는 연습을 한다. ‘1인1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소논문 활동은 창글 수업 시간에 이뤄진다.

이런 과정을 거친 덕에 학생들은 3학년이 되면 1학년 때보다 훨씬 수준 높은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 ‘2015 1인1프로젝트 우수작 모음집’을 보면 1학년은 ‘교내 음식물 쓰레기 활용 방안’ ‘영화관에서 불편한 점’ 등 다소 쉬운 소재를 다루지만, 3학년들은 ‘다문화 아이들의 이중문화교육을 위한 교재 개발’ ‘CPTED의 기본전략과 염리동 소금길 사업’ 등 좀더 전문적인 영역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올해 삼각산고를 졸업하고 한양대에 입학한 황혜민(19)양은 “창글 시간을 통해 글쓰는 법을 배웠다. 창글 시간에 하는 나의 꿈 발표대회 등 글쓰기 대회에서 상도 받았다”며 “대학입시를 위한 자기소개서를 쓸 때도 조금 더 수월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영어 수업 시간에 영어말하기대회나 영어쓰기대회와 같은 교내경시대회를 준비시키는 것도 교과 수업과 교과 경시대회가 따로 노는 일반 학교와 다른 점이다. 삼각산고 1~2학년 영어 수업은 4시간 가운데 1시간이 ‘쓰기 수업’이다. 홍주리 교사는 “개요 짜고, 서론·본론·결론 나눠서 한 단락씩 쓰고 친구와 교사 피드백까지 받으면 글 한 편 완성하는 데 한 학기가 걸린다. 이 수업을 하다 보면 영어 쓰기대회나 말하기대회 준비가 자연스럽게 된다”고 말했다.

이렇게 교과 수업에 비교과 활동의 과정을 연계하고 통합하는 일은 학생·학부모의 입시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3학년 이진실(18)양은 “학생부에 기록된 동아리, 과제탐구활동 등도 대개는 학교 수업 시간에 이뤄진 일들”이라며 “많은 비교과 활동을 했지만 그 활동으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거나 부담이 된다고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올해 자녀가 한양대에 입학한 학부모 장정아(51)씨는 “다른 곳에 사는 친구들의 입시 준비 이야기를 들어보면 각자도생하더라”며 “삼각산고에서는 선생님들이 많이 도와주기 때문에 학부모로서 특별히 아이의 입시에 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학생부 목표는 ‘미래 역량’
학년마다 철학·실용경제·진로 수업
1~9등급 공평하게 학생부에 반영
“상위권 학생에 스펙 몰아주기 없어”
평등한 교육 기회 주는 ‘책임 교육

■ 학생부의 목표는 ‘미래역량’

삼각산고는 교육 목표 가운데 하나로 단순한 학력 향상이 아닌 ‘미래역량’(통합적 사고력, 문제해결능력, 타인과 함께하는 참여와 협력 사회적 능력)을 키우는 교육을 내세웠다. 1학년은 철학, 2학년은 실용경제, 3학년은 진로와 직업 등 교양 수업을 하는 것 역시 이의 일환이다. 올해 처음 2학년 정규 교육과정에 편성된 실용경제는 사회과 교사들이 강북구 지역의 사회적 경제 활동가들과 협력해 만든 것으로,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성평제 교사는 “무한경쟁 시대 모두 낙오하기 쉬운 경제 상황에서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창업을 할 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교사들은 중간·기말 시험도 보지 않는 이런 수업에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유인책으로 학생부를 적극 활용한다. 철학을 가르치는 이수영 교사는 “철학이 내신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들도 알고 있다.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학생부종합전형에 합격하려면 이런 과목이 중요하다는 것을 학생들한테 설명하고, 열심히 하면 학생부에 남겨준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창글 수업’의 경우, 창글 노트의 첫 장에 아예 “글쓰기 활동은 학생부에 기록된다”가 쓰여 있고, 학생부 기록 예시도 들고 있다. 혁신부장을 맡고 있는 문지연 교사는 “우리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뭔가를 외우고 시험을 잘 봐서 대학에 가는 시대는 지났다고 본다”며 “학교에서 미래 역량을 길러줘야 하는데, 창글 역시 자기표현 역량을 키우기 위한 교육과정”이라고 말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1등급 학생의 학생부만 교사가 써주고 나머지는 학생 본인이 써오도록 하기까지 하지만, 삼각산고에서는 수업이나 학교 활동에 열심히 참여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적지 않은 분량의 학생부를 얻는다. 올해 삼육대 경영정보학과에 진학한 최다슬(18)양은 “경영학과 쪽은 리더십을 중요하게 평가하는데 선생님이 제가 리더십 캠프 참여한 거나 수학여행 준비팀 반장 한 것, 학교 가정통신문 운영 방안으로 소논문 쓴 것까지 굉장히 자세하게 적어주신 걸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최양은 “다른 학교 친구들은 이런 활동에 참여하는 것 자체도 경쟁률이 치열한데, 조건 없이 모든 학생이 참여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3학년부 부장을 맡았던 강애경 교사는 “모델을 꿈꾸는 내신 성적 하위권 아이가 3학년 전체의 수학여행 준비위원회를 이끌고, 수학여행이 끝난 뒤 보고대회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며 “모든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교사의 역할이다. 소수 상위권 아이들에게 스펙을 몰아주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삼각산고의 교육 목표 중 하나는 ‘평등한 교육 기회와 한명의 아동도 포기하지 않는 책임교육’이다.

삼각산고는 2011년 개교한 5년차 혁신학교다. 조건 면에선 일반고와 큰 차이는 없다. 서울시교육청의 다른 일반고와 동일한 방식으로 학생들을 배정받는다. 혁신학교라 추가로 지원되는 예산은 1년에 3500만원 정도다. 공립고이기 때문에 교사들도 5년마다 순환배치된다. 다른 점은 교육과정과 수업방식이다. 김정안 서울시교육청 학교혁신지원센터장(전 삼각산고 혁신부장)은 “삼각산고는 학생부종합전형에서 실적을 내기 위해 학생부를 차별화시킨 게 아니다”라며 “대학 진학 실적은 아이들을 역동적으로 키우기 위해 학교 교육과정을 차별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수적인 결과”라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