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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만남

중졸의 구두기능공, 400억 원대 제화업체 사장이 되다

중졸의 구두기능공, 400억 원대 제화업체 사장이 되다

김원길 (주)안토니 대표


구두 브랜드 바이네르, 키노피오와 컴포트화를 생산, 판매하는 (주)안토니의 김원길 대표는 중학교 졸업 후 구두 만드는 일을 시작해 지금은 매출 400억 원이 넘는 제화업체의 사장이 됐다. 경제적인 성공에 이어 직원 복지,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 등을 펼치는 그를 통해 성공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주)안토니 사장실에 들어서면 사훈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성공이란 고객에게 사랑받고 사회로부터 존경받으며 직원 모두가 만족하는 행복지수 1등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성공에 대해 이 같은 정의를 내린 사람은 당연히 회사 대표인 김원길 사장이다. 젊어 사서 고생을 한 덕에 이제는 매출액 400억 원이 넘는 제화업체 사장이 된 김 대표. 그는 회사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2005년 무렵 ‘성공이란 뭘까’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 사훈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다. 사훈에는 중졸의 구두기능공에서 중견기업 사장으로 성공한 그의 모든 경험이 녹아 있다.



중학교 졸업과 방황, 그리고 구두와의 만남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성공의 길이 공부에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젊은 날의 김원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정형편도 넉넉지 않았지만 요즘 젊은이들처럼 스펙을 쌓아서 성공할 생각도 없었다. 무언지는 몰라도 성공의 길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남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안목을 넓힌다며 1년 가까이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 딴에는 식견을 넓힌다고 했지만 집안에서는 큰 걱정거리였어요. 하루는 서산에서 양화점을 하던 작은아버지가 구두 만드는 일을 배워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어려서부터 손재주는 타고 났다는 소리를 듣던 터라 자신이 생기더군요. 그 길로 작은아버지를 따라서 구두 만드는 일을 배웠습니다.”

보통 1년 걸려야 겨우 손에 붙는다는 구두 제작 전 공정을 5개월 만에 익혔다. 타고난 손재주 덕도 봤지만 배우려는 의지가 워낙 강했다. 서산에서 그렇게 10개월을 보낸 그는 이왕 일을 할 바에는 큰물에서 놀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무슨 일이든 마음먹으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성격 탓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1978년, 무작정 상경을 감행한 것이다. 갓 열여덟 살을 넘긴 때였다.

서울에서 첫 터를 잡은 곳은 영등포였다. 당시 영등포는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호기롭게 시작한 서울생활, 그러나 영등포에서의 생활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섯 번째인가 퇴짜를 맞은 후 겨우 둥지를 튼 곳이 영등포 외곽의 작은 양화점이었다. 처우는 열악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그게 끝이었다. 월급은 없었다.

어려운 시간이 이어졌다. 몇 번 직장은 바뀌었지만 일상은 반복됐다. 가죽을 꿰매고 붙이고 바닥에 못을 박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한번은 연탄가스를 마시고도 출근해 사장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아무리 아파도 회사의 허락이 떨어져야 쉬었습니다. 먼저 일을 해결하고 다음에 쉬는 습관을 들인 거죠. 그래야 일이 손 안에 놓입니다. 성공은 일을 컨트롤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일에 치이다 보면 계속 끌려갈 뿐이에요.”



아픔과 함께 겸손을 가르쳐준 전국기능경시대회

그런 억척 덕분이었을까. 기회는 그리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견습공에서 기술자로 이른 승진을 한 것이다. 당시 구두공장은 ‘도급제’였다. 한 명의 기술자 밑에 여러 명의 견습공이 있었다. 기술자는 그 팀이 완성한 구두 수만큼 돈을 받았다. 일 욕심이 많은 그에게 더없는 기회였다. 기술자로 이름을 얻은 그는 큰 제화업체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국내 제화업계 4위의 회사였다.

큰 회사로 옮긴 후에도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촌놈’이라는 소리와 텃세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구두를 만든 덕에 얼마 되지 않아 그곳에서 여화(女靴)를 가장 잘 만드는 기술자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기술자들이 모여 ‘전국기능경시대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됐다. 같은 또래의 남화(男靴) 기술자가 전국기능경시대회에 나간다는 것이었다. 부러웠지만 이미 사람이 정해져 있어 그에게 돌아올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사람 운명은 모를 일이다. 기대를 모았던 그 기술자가 갑자기 고향으로 가버린 거였다. 기대가 컸던 탓에 사장이나 공장 사람들의 실망도 컸다. 그걸 본 그가 무작정 사장한테 “그거 제가 하면 안돼요” 하고 불쑥 말을 꺼냈다. 남화는 만들어본 적도 없던 때인데도 말이다. 결국 그는 사장과 공장장까지 설득해서 대회에 나갔다.

결과는 동메달이었다. 그의 실수라기보다는 재료에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회사의 실망은 컸다. 낭패감에 며칠 휴가를 낼 정도였다. 당시는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금메달을 땄으면 아파트 전세를 얻었을 텐데…. 고향에 플래카드가 걸렸을 텐데….’ 하지만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금메달을 놓친 건 큰 아픔이었지만 그 실패가 제겐 엄청난 약이 됐습니다. 그때 금메달을 땄다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았을 테니까요. 동메달을 딴 덕에 겸손을 배우게 된 거죠. 방황도 많이 했지만 금메달보다 소중한 것을 얻은 셈입니다.”



김원길 대표는 직원 복지를 위해 승마,수상 스포츠 등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구두기술자와 관리자로 승승장구

회사로 돌아온 그는 다시 구두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정신없이 일을 한 덕에 수입도 적지 않았다. 기술자로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 기술자로 있다가는 구두산업 전체를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 큰 꿈을 위해서는 관리를 배우고 영업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미쳤다. 결론이 여기에 이르자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회사에 생산관리부서 발령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다른 기술자들은 도저히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기술자 월급은 100만 원도 넘었는데, 관리자 월급은 그 4분의 1 정도밖에 안됐거든요. 저한테는 그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맡은 일은 생산관리였다. 구두를 누구보다 잘 아는 기술자가 생산관리를 맡자 제품의 질은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생산관리를 경험한 그에게 다음 수순은 영업관리였다. 그가 영업관리를 하게 된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당시는 회사가 인천의 한 백화점에 매장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기대를 모으며 입점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백화점으로부터 철수 통보가 내려졌다. 분을 참지 못한 그는 백화점으로 곧장 달려갔다. 따지는 그에게 백화점은 ‘매출 저조’를 들어 철수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실제 매출을 보니 경쟁사들은 1000만 원에서 많게는 3000만 원 이상을 기록한 반면, 그가 몸담은 회사는 고작 600만 원에 그쳤다. 그렇다고 “죄송합니다” 하고 물러날 게재가 아니었다. 흥분한 김에 그는 1억 원 팔아주면 되느냐고 큰소리를 쳤다.

“큰소리는 쳤는데 난감했죠. 일단 전단지부터 돌렸습니다. 그랬더니 매출이 조금 올랐어요. 그 뒤에 마이크를 잡고 백화점 안에서 호객행위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막무가내였죠. 그랬더니 매일 매출이 오르더군요. 그 달 말에 우리가 올린 매출을 보니 1억1000만 원이더군요.”

인천 백화점의 성공에 힘입어 그는 서울의 한 백화점으로 진출했다. 콧대 높은 서울의 백화점에 입점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영 길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한 곳의 백화점에서 매출이 오르자 다른 백화점에서 연락이 왔다. 백화점 판매망을 잘 관리한 덕에 그는 회사 창고에 있는 재고까지 모조리 팔아치우는 역량을 과시했다.

“그렇게 영업을 하고 본사로 돌아왔는데 절 보는 시선이 곱지 않더라고요. 나중에 보니까 ‘김원길이 구두 판 돈을 따로 챙겼다’는 식의 유언비어가 퍼져 있더라고요. 어이가 없는 와중에 사장까지 저를 신뢰하지 않더라고요. 사표를 내고 났더니 갑자기 허탈해지더군요.”


김 대표는 중소기업을 육성한 공로로 지난 2008년 국무총리 표창을 받기도 했다.


사업을 하며 겪어야 했던 역경과 고통

회사를 나온 후 한동안 절치부심하던 그는 특별퇴직금으로 구두 부속공장을 차렸다. 하지만 사업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거래처를 보는 안목도 부족했고 관리도 쉽지 않았다. 창업 후 1년 동안 어려움을 겪던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알고 지내던 백화점 직원이 이전 회사의 매출이 변변치 않다는 사실을 전한 것이었다. 이전에 다니던 회사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사실이라며, 다시 영업을 해줄 수 없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그는 판매를 대행하게 됐다. 지인들의 도움과 그의 열성이 더해져 판매는 순조로웠다. 두 달 만에 빼곡하게 쌓여 있던 창고의 구두를 모두 팔아치웠다. 그 뒤 그는 이전 회사와 로열티 계약을 맺고 자체 생산한 구두를 팔았다. 직접 구두를 만들어 팔자 마진도 커졌다. 창업 이후 처음 기지개를 켠 시기였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국과 러시아 시장이 열리면서 제화업체들이 너나없이 규모를 확대한 것이 화근이 됐다. 시장은 커졌지만 가격이 하락하는 바람에 투자에 비해 건질 게 없었던 것이다. 거래하던 회사가 먼저 문을 닫았고, 그의 회사도 돌아오는 어음을 감당하지 못했다. 빚은 늘어만 갔다. 가장 많을 때는 60억 원이 넘었다.

“회사는 IMF를 넘기면서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럴 수 있었던 건 역시 제품 덕이었습니다. 히트 모델 하나만 1년에 20억 원어치를 팔았으니까요. 히트 상품이 나오면 다른 제품도 덩달아 잘 팔립니다. 제품이 잘 팔리니까 ‘이러다 성공하는 거 아냐’하는 생각이 들었고 ‘근데, 성공이 뭐지’하는 데까지 생각이 닿았어요.”



성공한 CEO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CEO로

그때부터 김 대표는 그만의 성공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성공이 뭐냐”고 물었고, 틈날 때마다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게 내린 결론이 지금의 사훈이 됐다. 성공에 대한 정의를 내린 후 그는 그 길에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우선 직원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업계에서 가장 높은 연봉과 상여금을 지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 라스베이거스, 이탈리아 밀라노 등지의 세계적인 제화 업체에 연수를 보내고 있다. 또한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승마, 수상스키, 최고급 스포츠카 타기 등 다양한 취미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사회공헌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안토니장학회를 만들어 어려운 학생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골프 꿈나무에게 연간 2억 원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매년 5월이면 잊지 않고 수도권의 독거노인을 초대해 효도잔치를 열기도 한다. 이 밖에도 박애원, 벧엘의 집 등 많은 복지시설에 물품과 지원금을 보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저보다 멋지고 행복한 사장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사회공헌 이야기를 하면 다들 ‘나중’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면 나중은 없습니다. 직원들 복지도, 사회공헌도 나중은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생각났을 때 당장 실천했고, 그래서 그들보다 더 행복합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할까요.”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