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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만남

김미화 "일기 쓰듯이 털어버리고 싶었죠"

김미화 "일기 쓰듯이 털어버리고 싶었죠"


 


에세이집 '웃기고 자빠졌네' 출간

(서울=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꽃을 심고 마루에 앉아 꽃을 바라본다. 이 순간, 큰 위로다. 물망초가 고맙다.'

지난해 5월의 어느 날을 김미화(48)는 이렇게 적었다.

8년간 진행해온 MBC 라디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을 자진하차하고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그동안 믿고 살아온 상식과 정의감의 갑작스런 실종'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었던 시간이었다.

김미화가 다음달 1일 내놓는 에세이집 '웃기고 자빠졌네'(메디치 펴냄)에는 지난 4-5년간 그를 흔들어놓은 일련의 사건들이 담겼다.

때로 격한 감정을 토로하며 사실 위주로 써내려간 글 사이에는 그가 자연과 가족에게서 위로를 얻는 순간들도 섞여 있다.

31일 목동의 CBS 사옥에서 만난 김미화는 "지난 4-5년간의 일들을 가볍게 떨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변화의 시기인 2013년을 앞두고 나 스스로 감정을 정리하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상처가 있다면 이 책을 못 씁니다. 상처를 털어버려서 쓴 거죠. 제가 원래 빨리 털어버리는 스타일이에요. 당할 때는 이런 일이 나에게 왜 일어났나 싶은데 깊은 우울에 빠져 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더라고요. 오해와 편견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 억울함은 있지만 그건 곧 풀어질 일이라 생각해요."


책 제목은 미래의 묘비명에서 따왔다. 6세부터 코미디언이 되길 원했고 죽는 순간에도 코미디언이길 원하는 김미화는 자신의 묘비에 '김미화 웃기고 자빠졌네'라고 새겨주길 원한다.

그는 '웃'과 '자'가 강조된 제목을 가리키며 "결국 사람들에게 '웃자'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며 "윗분들에게 선물하기도 좋을 것"이라며 웃었다.

지난 1년간 책을 집필한 그는 "일기를 쓰듯이 글을 썼다"고 했다.

"일기를 쓰면 자기정화가 되고 '힐링'받는 느낌이 있는데 책을 쓰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데 일기처럼 쓰다 보니 감정이 격해져서 애를 먹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훨씬 격하게 썼어요. 쓰다가 울컥한 적도 있었죠. 쓸 얘기가 많아서 줄이고 줄여야 했어요. 지금 나온 책은 수십 번 고친 겁니다."

솔직하고 꾸밈없이 쓰려 했다는 자신의 말처럼 그의 문장은 간결하고 담백하다. 그가 직접 쓴 손 글씨와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들도 책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KBS '블랙리스트' 소송이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하차, 총리실 사찰 등 자신을 둘러싼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언론보도와 자료를 꼼꼼히 인용하며 사실적으로 기술했다.

KBS가 '블랙리스트' 소송을 철회하는 과정의 이면합의 등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도 담았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문제에 대비해 그는 법률 조언을 받았다. 신중을 기했을지언정 후환에 대한 부담감은 없단다.

"실상이 이렇다는 걸 적었을 뿐이잖아요. 사실 그동안 제게 일어난 일을 얘기할 기회가 없었어요. 기자분들이 물어보시면 답하고 오해가 있으면 법적으로 항변했지 팬분들께 제 사정을 제대로 얘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많은 분이 저를 더 이해하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책에서 김미화는 자신이 '소셜테이너'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폴리테이너'로 불리는 것은 거부한다.


그는 "나는 시사 프로 진행자로서 정치를 다루는 사람이지 정치적인 연예인인 폴리테이너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심형래가 영구를 연기했다고 해서 바보가 아니듯이 정치를 다룬다고 해서 정치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된 데는 정치인이나 알려진 사람들의 책임이 큽니다. 유명세를 이용해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려는 시도가 많다 보니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제가 대통령을 다섯 번 만났는데 그것으로 누구의 사람이라 불리는 거면 나보다 대통령을 숱하게 만난 다른 연예인들은 도대체 뭔가요. 사람들이 그런 편견을 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활발한 사회활동에 대해 그는 "코미디만 하고 살아야지 생각했다면 여러 시비에 안 걸리고 편하게 살았을 것"이라며 "그렇지만 내가 누린 행복을 사람들에게 되돌려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저는 다 누린 사람이에요. 코미디언으로 인정받고, 좋은 차도 몰아봤고 심지어 시집도 두 번이나 갔어요.(웃음)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린 행복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젊은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고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현실에서 가만히 있는 게 이상한 것 아닌가요. 한 마디라도 마음을 보태고 위로해주는 게 시민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김미화는 현재 CBS 라디오 '김미화의 여러분'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나를 직접 보고 용기를 주려고 나오시는 게스트들이 있다"며 "그런 분들을 보면 앞으로 책임감과 사명감을 더 느낀다"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김미화는 내년이면 코미디 인생 30년을 맞는다. 애초 시사 프로그램을 시작한 이유도 코미디를 잘하기 위해서였다.

코미디언으로서 그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싶다.

"전 제 인생에 희망을 갖고 있어요. 내 앞날이 어떻게 될까 생각하면 설렙니다. 코미디언으로 제 길을 못 가고 고꾸라질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언제든지 코미디를 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사람들이 힘들고 아픈 세월을 보냈다고 얘기하지만 사람들이 걱정해 주는 게 미안할 정도로 전 일찍 정리를 했고 행복하고 담담하게 살고 있어요. 지금 꽤 행복하고 자신도 있습니다."

'개그콘서트'에서 불러주면 언제든 갈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코미디 외에 그에게는 또 다른 꿈이 있다.

에필로그에 소개된 '순악질 프로젝트'가 그것.

시골집이 있는 용인 인근에 마을 공동체를 만드는 게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경작한 농산물을 서로 거래하고 문화생활을 함께 누릴 수 있게 하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김미화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컨테이너 건물을 짓는 중이다.

그는 "동네 사람들이 즐겁고 잘 살게 해 주는 게 내가 할 일"이라며 "젊은 사람들도 찾아와 외가에 온 것 같은 여유와 즐거움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okko@yna.co.kr

 

 

 

 

 

 

 

 

 

 

 

 

 

 

 

 

웃기고 자빠졌네’ 김미화, 여야 영입제의 오자

한 노랫말을 감상해 본다. ‘바람 속으로 걸어 갔어요 이른 아침에 그 찻집,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샌 긴 밤이여,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걸까,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한 광대는 그렇게 바람 속으로 걸어갔다. 외로움도 마셨고 한숨도 많았다. 웃고 있어도 눈물로 살아온 세월들이 얼마이던가. 이제 30년을 뒤돌아본다.

▲ 지난 29일 오전 서울 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미화씨가 인터뷰에 앞서 인근 공원 단풍을 배경으로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후배들 멍석 깔아주려… 개콘 탄생 숨은 주역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서울 수유리 무허가 비닐하우스 셋방에 살면서 보따리 장사로 두 딸의 생계를 책임졌다. 어려운 형편을 보다 못한 주인집 할머니는 딸 한 명을 입양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미국인 두 명이 집으로 찾아왔다. 입양되기 직전 어머니가 눈물로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이후 입양될 뻔했던 딸은 초등학교 때 오락부장을 맡으며 타고난 광대의 끼를 발휘했다. 커서 반드시 코미디언이 되겠다고 다짐했고 나중에 성인이 되어 꿈이 이루어졌다. 이후 ‘순악질 여사’라는 별명으로 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다. 일자 눈썹을 붙이고 한 손에 몽둥이를 들고 ‘음메 기살어’ 하는 모습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기억한다. 원래 코미디언으로 출발했지만 근래 10년 동안은 시사프로그램 진행을 맡았다. 그러면서 ‘KBS 블랙리스트’ ‘민간인 사찰’ 등의 파문에 휩싸이면서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그래도 그는 ‘울고 있어도 웃는 코미디언’이라고 당당하게 사람들과 얘기한다.

요즘 ‘개그콘서트’(개콘)가 잘나간다. 시청률이 꽤나 높고 등장인물들은 CF에 단골로 출연할 만큼 인기가 높다. 코미디언이자 방송 진행자로 유명한 김미화(48)씨. 그는 ‘개콘’을 보면서 새로운 감회에 젖는다.

“2000년 당시만 하더라도 각 방송사에서 한 해 20명 정도의 개그맨을 뽑았고 다 합치면 무려 70여명의 신인이 배출되고 있었지요. 어느 날 한 신인으로부터 PD들에게 눈도장이라도 잘 찍어 일주일에 행인 역할을 몇 번이라도 해야 밥먹을 상황이 된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에게 멍석을 깔아 주고 싶었습니다.”

고민하던 김씨는 공개방송 형식의 개그 프로그램을 생각했다. ‘이소라의 프로포즈’를 찾았다. ‘오빠 언니 짱!’ ‘소라 언니 사랑해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열광하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 ‘가수들은 저렇게 되는데 코미디언들은 왜 안 되지?’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이어 ‘컬트 삼총사’의 연극무대로 갔다. 후배들의 공연은 대단했다. ‘라이브 코미디공연’에 더욱 매달렸다. 늘 의논했던 선배 전유성씨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대학로 술집에서 전씨와 여러 후배들을 만나 기획서를 완성했다. 며칠 뒤 TV예능 담당 본부장을 만났다. ‘연극형식의 새로운 코미디’ ‘세트의 번거로움 없이 조명으로만 하는 코미디’ 등을 강조하면서 설득했다. 그러면서 신인 후배들을 ‘빡세게’ 연습시켜 추석특집으로 해보자고 했다. 가만히 듣던 본부장이 ‘좋아, 해보자’고 했다. 김씨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개콘’은 그렇게 해서 탄생됐다.

김씨는 요즘 깊어가는 가을을 맞아 어느 때보다 지난날의 그림자를 떠올린다. 어느덧 코미디 인생 30년을 살아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도 없는 게 까불고 있어.’라는 놀림을 받을 때면 가차없이 그 아이의 따귀를 때리면서 ‘그래 까불고 있어, 어쩔래.’로 맞섰다. 정말 고등학교 때까지 별명이 ‘까불이’였을 정도로 ‘까불며’ 살았다. 세월이 지나 나이 50 언덕을 바라보는 오르막에 선 그가 이제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기 위해 자전적 에세이를 펴냈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웃기고 자빠졌네’. 왜 그렇게 제목을 정했느냐고 하자 “나의 묘비명”이라며 웃는다. 웃기다가 자빠지면 그것처럼 좋은 게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시골의사로 알려진 박경철씨는 이를 두고 “아마 잘 안될 걸. 웃기고 자빠졌네… 어렵데이.”라고 했단다. 이에 김씨는 “누가 맞는지 세월 좀 지나고 나서 얘기해 보자. 난 무대에서 웃기다 자빠질 것”이라고 맞대응을 했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 ‘우물쭈물하다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가 문득 떠오른다.

▲ 김미화

●내 정체성은 죽으나 사나 코미디언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목동에 위치한 CBS 건물 인근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영구 심형래씨가 KBS 공채 개그맨 1기, 순악질 여사가 2기이니 김씨도 이젠 나름대로 원로인 셈이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청바지에 검정색 티셔츠, 얇은 목도리 차림이 가을과 그럴듯하게 어울렸다. 먼저 책을 쓰게 된 과정부터 물었다.

“지난 4년 동안 겪었던(블랙리스트, 민간인 사찰 등) 것을 털어내기 위해 책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제가 벌써 데뷔한 지 30년이 됐더라고요. 그래서 사는 얘기 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같이 쓰게 됐습니다. 한 1년 정도 집에서 썼는데 정말 글 쓰는 게 힘들더라고요. 기자들은 어떻게 매일 글을 쓰나 몰라(웃음).”

대필이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직접 글을 썼고 그림과 사진도 직접 그리고 찍었다.”고 대답했다. 원래 잡생각이 날 때면 개를 끌고 산책을 나가 카메라를 들이대고 스케치를 하는 취미가 있다고 부연했다. 특히 MBC라디오 프로그램 ‘세상은 그리고 우리는’에서 하차할 때 7개월 동안 백수생활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취미생활에도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때 코미디언 30년,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10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처음 KBS에 들어간 뒤 방송국에서는 제가 노력한 만큼 인정해 줬습니다. 그게 고마워 혼신을 다해 연기를 했지요. 그러나 어느 날 KBS는 느닷없는 소송으로 저를 당황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KBS는 친정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블랙리스트 사건을 겪으면서 방송국이라는 곳이 정치적인 기관임을 알게 됐고 크게 실망을 했습니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몰랐으면 좋았을 검은 그림들을 하나하나씩 보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투사가 되고 말았다. 왜 코미디언이 투사란 말을 듣게 됐을까 하는 점에서는 본인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시간이 좀 지나면서 ‘말로 먹고사는 사람의 입을 막는다고 말을 못할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됐다. 이때 광대는 입만 있으면 어디든 무대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KBS, MBC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뒤 얼마 있다가 CBS로 옮겨 ‘김미화의 여러분’이라는 시사프로그램을 다시 맡았다. 또 대학로 벙커원에서 ‘나는 꼽사리다’(딴지라디오 팟캐스트)를 녹음하고 있다. 또 대한문 앞에서 쌍용차, 콜투콜텍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길거리 톡톡 콘서트, 노숙인들과 함께하는 인문학 강의, 제주 강정마을에서 1만명이 함께 걷는 강정평화대콘서트까지 바쁜 일정을 소화해 내고 있다.

“안 그래도 입 크다고 소문난 제 입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을까요(웃음). 말 안 되는 세상이 있다면 말 되는 세상으로 바꾸고 싶은 소박한 생각에 오늘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알 것 같아요. 결과보다는 과정 그 자체가 의미이자 인생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과정을 즐기고 할 말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김씨는 경기도 용인 시골 구석에 산다. 감이 잘 익는 골안쪽 마을이라고 했다. 그는 감을 볼 때마다 ‘저 감처럼 대변하는 것도 자신의 할 일’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앞으로의 꿈도 감처럼 잘 익은 시사 코미디를 하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시사 프로그램을 하다가 다시 코미디로 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꿈은 코미디 무대에서 쓰러지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사는 집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우리 집 이름은 후조당(後凋堂)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눈보라 속 푸른 소나무처럼 변함 없는 모습으로 곁에 있고 싶은 우리 부부의 마음을 한문학자 이명학 선생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구석진 곳에 있다 보니 손님들이 찾아오기 쉽지 않아서 마지막 골목 입구에 ‘후조당’ 팻말을 세워 놨더니 점집으로 오인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아이들 넷은 전부 기숙사다 어디다 다 나가고 지금은 남편과 둘만 살고 있습니다. 자연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저의 집 콘셉트입니다.”

●최근까지 여야서 영입 제의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재혼’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재혼은 망설이기 마련이지만 지난 7년 동안 지금의 남편과 살아오면서 한번도 사랑이 식지 않았으니 잘했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것이다. 인연이 없어 지금의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에게 ‘사상적 성향’은 무엇이고 ‘김미화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물었다.

“어떤 의지를 가지고 지지를 표명한 적이 없습니다. 코미디언이 ‘좌’가 어디 있고 ‘우’가 어디 있습니까. 저는 많은 NGO 활동단체에 가입돼 있고 80군데가 넘는 곳에서 홍보대사를 맡고 있습니다. 일부에서 저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섭섭합니다. 그저 사회적 약자 옆에 있을 뿐인데 정치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것을 저도 잘 압니다. 그런데 최근까지 여당과 야당에서 저를 영입하기 위해 연락을 해 왔습니다. 저의 정체성은 죽으나 사나 코미디언이죠.”

그는 남편과 오래전부터 이름지어 놓은 ‘순악질 프로젝트’를 확장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동네에 놀러 오는 사람들의 사랑방을 만드는 것이다.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천천히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길을 선물하고 싶어서이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김미화는

1983년 KBS 공채 개그맨 2기 → 순악질여사로 인기 → 10년간 시사프로 진행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우이초등학교에서 오락부장을 하면서 코미디언 자질을 인정받았다.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신경여자실업고등학교를 나와 잠시 경리직원으로 회사를 다녔다. 1983년 KBS 공채 개그맨 2기로 입사했다. 2001년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고 이 대학에서 언론정보대학원 석사 과정을 거쳐 지금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을 3학기째 다니고 있다. 2000년 당시 지금의 ‘개그콘서트’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후배들을 가르쳤다. 일자 눈썹의 ‘순악질 여사’로 인기를 끌었다. 20여년 몸담았던 정통 코미디 분야를 떠나 8년 동안 MBC 시사프로그램인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진행을 맡았다. 현재는 CBS 전방위 시사토크프로그램 ‘김미화의 여러분’과 팟캐스트 ‘나는 꼽사리다’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