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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공부는 어떻게?

“영어에 점수를 매기지 마라”

 

한겨레21|기사입력 2008-02-15 18:06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아노미’에 던지는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의 해법… “일정 기량을 갖추면 ‘패스, 논패스’로 처리하자”

▣ 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아 유 식?” “아임 파인.”

지난 1월29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한 영어유치원. 꼬마들이 병원놀이를 하고 있다. 5·6·7살 반마다 한국인 교사와 영어민 교사가 나란히 배치돼 있다. 6살 아이가 복도에 혼자 책상을 놓고 앉아 테스트를 받고 있다. 연말 평가시험을 치르지 않아서라고 한다.

부모들이 테스트 해달라는 영어유치원

놀이를 위주로 한 언어발달을 교육철학으로 하고 있지만, 이 유치원도 지난해부터는 ‘텍스트북’을 이용한 학습을 교육과정에 40% 가까이 활용하고 있다. 학부모들의 요구 때문이다. 한아무개 원감은 “처음 애를 데리고 올 때는 ‘무조건 즐겁게 놀려주세요’라던 학부모들도 시간이 지나면 아이의 영어 실력이 다른 애들과 비교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한다”며 “테스트를 봐달라는 요구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험을 보되 답안지를 그대로 접어 보내주는 방식으로 ‘타협’ 한다고 했다. 점수나 등수는 매기지 않지만 학부모들은 누가 1등인지 바로 안다.

학부모들이 조바심을 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에서 영어는 단순한 소통의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어는 입시, 취업, 고시, 승진 등 인생의 경로마다 ‘수문장’(게이트키퍼)으로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그런 탓에 취학 전부터 영어 경쟁에 내몰리고 온 국민이 영어 몸살을 앓는다. 한 원감은 “테스트를 자주 하는 일부 영어유치원 얘기를 들어보면 시험날이면 멀쩡하던 애가 배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며 유치원에 빠지는 일도 있다”며 “실력평가 위주의 교육은 아이들의 정서는 물론 실질적인 학습력에도 좋지 않다는 것을 학부모들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가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안 그래도 영어 몸살을 앓는 온 국민이 일순간에 ‘영어 블랙홀’로 빨려들어갔다. 인수위의 방안은 학교에서 영어를 제대로 가르쳐, 사교육비를 줄이고 누구나 고등학교만 나오면 외국인과 대화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5년 안에 영어 전용교사 2만3천 명을 새로 채용하고 △말하기·쓰기 교육을 위주로 한 영어 수업 시간을 늘리고 △수능 대신 실용 영어가 강화된 국가 영어능력 평가시험을 치르게 하며 △2010년 중3·고1을 시작으로 2012년 모든 중·고교에서 영어 수업은 영어로 하겠다고 밝혔다. 집권 기간 5년 동안 4조원을 영어 교육에 쏟아붓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정책이 발표되자마자 벌집 쑤신 듯 항의와 우려가 쏟아졌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적극 지지했던 뉴라이트 학부모연합조차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우려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교육에서 ‘해방’될 학부모들과 교사들은 걱정이 크고 ‘억제’돼야 할 사교육 시장은 들썩이는 분위기다. ‘영어 카스트’를 고착화해 ‘대한민국 1%’를 위한 정책이라는 얘기도 공공연하다. 사교육비를 줄이고 영어 실력을 기르겠다는 좋은 취지의 정책이 왜 이렇게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것일까.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영어의 ‘거품’을 걷어내지 않고, 근거 없는 주장과 편견과 일부의 경험을 과도하게 일반화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인수위의 방안이 영어의 ‘사회적 가중치’와 이로 인한 ‘계층 격차’에 대한 성찰이 없다는 점에서 ‘위험한 시도’라고 지적했다. 또 영어 공교육 전문가나 교육 주체들의 참여가 배제된 채 ‘주먹구구식 접근’이 이뤄졌다고 비판했다. 가령 우리 사회에서 영어가 실제 얼마나 사용되고 있는지, 학교 영어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보여주는지 최소한의 기본 자료조차 없이 정책을 세운 결과, 교육 현장에 적용해 실효성을 거두기 어려운 방침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한겨레21>은 새 정부의 영어 정책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 공적 목표를 수행하는’ 공교육의 기본 정신에 따라 수립되기를 바라며, 논의의 진전을 위해 이병민 교수와의 인터뷰를 전한다. 이 교수는 “입시에서 영어를 빼거나, 일정 기량을 갖추면 패스, 논패스(합격, 불합격) 처리해 그 이상의 배점을 하지 않는 게 영어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고 학생들의 영어 실력을 기르는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숙명여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및 테솔 과정 주임교수를 역임했고, 교육인적자원부 영어과 교육과정 심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새로 쓴 2009년에 사용될 계획

교육인적자원부 조사를 보면 초등학생 때는 영어를 재미있어하다 중·고교로 진학할수록 흥미가 현격하게 떨어진다.

=입시 스트레스 탓이다. 지금의 영어 논란은 어찌 보면 바람직하다. 우리 공교육의 밑천이 다 드러나니까. 하지만 발표 내용을 보니 공교육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것 같다. 영어 교사들이 얼마나 잘 양성되고 있고 질이 우수한지조차 모르고 있다.

영어를 영어로 가르치고 다양한 교재나 평가 방식을 개발하는 것은 좋은 일 아닌가.

=노무현 정부 때도 영어 교육을 무지하게 강화했다. 교과서도 의사소통을 강화해 3년 동안 검토하고 중1·고1 과정은 새로 썼다. 올해 심사하고 2009년부터 쓰인다. 이 교과서의 질, 아주 좋다. 교과서 하나 만들려면 수정·고시·제작·심사·실행 등 최소 5년이 걸린다. 인수위의 제일 큰 문제는 이런 데이터에 기반하지 않고, 외국 교재를 들여온다는 식의 얘기부터 하는 것이다. 지금도 듣기·읽기 평가는 다 마련돼 있다. 수능 영어를 대체하겠다는데, 공정하고 신뢰할 만한 평가란 일정을 정해놓고 돈 퍼붓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영어는 노출 환경이 중요하다고 한다. 몰입 교육 얘기를 꺼냈다가 번복하긴 했지만, 어떤 환경이 필요할까.

=학자로서 왜 몰입 교육을 생각해보지 않았겠나. 그러나 교육과정의 문제인지, 사회적 환경의 문제인지 판단해야 한다. 영어교육을 가르치는 나조차도 웹 검색을 하거나 전공서적 볼 때, 강의 때 빼고는 영어를 쓸 일이 없다. 통신회사 임원인 친구가 영어 타령을 하기에 물어봤다. 얼마나 영어를 쓰냐? 1년에 한두 번이라고 하더라.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간부회의 때 통역이 붙는데, 유학했거나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 통역 없이 질문을 던지면 분위기가 싸늘해진단다. 주눅 드는 거다. 그 느낌이 싫어서 ‘영어, 영어’ 하는 거다. 문제는 그런 문화에서 한두 마디 영어 잘하기만 해도 승진 같은 데 영향을 끼친다는 거다. 실제 쓸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어떤 지표랄까 권력이 돼 온 나라가 ‘영어, 영어’ 하는 것이다. 적어도 국가 차원의 정책이라면 이런 부풀려진 관념은 걸러야 한다. 그런데 인수위는 아예 그 관념에 기반해 정책을 내놓고 있다.

영어 잘해서 콜센터 짓겠다는 건가

대통령 당선자는 영어가 곧 경쟁력이라 하고, 이번 정책도 그런 취지에서 나왔다고 한다.

=대학원생이 시험 답안지에 “우리는 매순간 영어와 숨쉬고 있다”고 써놨더라. 그건 환상이다. 국민이 먹고사는 데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런데 정치권과 일부 줄서기하는 학자들, 신문·방송이 필요하다고 부풀려놨다. 정부 부처, 기업, 사회 각 분야에서 얼마나 영어를 쓰고 필요한지 실태조사라도 된 게 있나. 영어 많이 한다고 국가 경쟁력이 높아진다는 증거가 있나? 말레이시아의 예를 들던데, 그 나라는 말레이어, 중국어, 인도타밀어 3개가 공식 언어다.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고유의 말레이어로는 학문이 불가능한 나라다. 그래서 대학에서 영어를 쓰고 고교에서도 가르친다. 그런 국가의 역사나 여건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무시하고 단편적으로 내세우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핀란드는 인구가 500만 명이고, 자기네 언어로만 살아본 경험이 없는 바이링궐(bilingual·두 나라 말을 하는)족이다. 유럽에서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그리스를 봐라. 영어 잘 못한다. 통일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해왔고 인구가 많고 모국어가 명백한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굳이 수출 경쟁력을 높이려면 교역 상대국 분포를 고려해 외국어 전문인력을 길러내면 된다. 베트남에 장사할 때 영어 잘하면 되나? 그 나라 말, 로컬 언어를 써야지.

모든 국민이 영어를 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영어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수용해야 할지 논의도 합의도 답도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공교육 강화는 관념적이고 위험한 짓이라는 얘기다. 고교 졸업하면 생활영어 술술 하게 하겠다는 목표도 허상인 것이, 멀티링궐(multilingual·다중 언어의)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과 같은 실력이 될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사회 각 경로마다 필요 이상 영어의 혜택이 이렇게 높은데, 국민의 기대 수준을 대책 없이 높여놓고는 그걸 공교육 안에서만 감당한다고? 멍청하거나 사기치는 거다.

‘영어 카스트’를 공고히 한다는 주장인가.

=이번 정책이 나온 뒤, 연수 다녀온 사람들은 쾌재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영어 사교육 시장 규모를 볼 때 괜히 불 지르면 안 된다. 신중하고 거시적으로 짜야 한다. 지금도 영어 잘하는 애들은 꽤 있다. 하지만 정작 쓸 사람이 없다. 아주 잘하는 사람이 없다. 외교적으로 활용하거나 교과서 만들 사람 길러내는 데 오히려 집중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90% 이상의 국민들은 영어 쓸 일이 1년에 한두 번 이하다. 국민들이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전문가가 없는 게 문제다. 이런 전문가는 대학에서 길러야 한다.

국민들의 영어 실력이 향상되면 외국인과 말이 잘 통해 일자리도 많이 생긴다는 논리에 대해선.

=미국 정보기술(IT) 기업이 인도에 많이 진출했다. 컴퓨터, 수학 등이 관련돼서다. 콜센터는 필리핀에 많다. 영어가 가능하고 인건비가 싸니까. 우리 국민들이 영어 잘한다고 한국에다 콜센터 짓겟나? 더 싼 다른 나라로 가지. 투자 여건과 볼거리가 돼야 사람도 돈도 들어오는 거다. 외국인들이 우리랑 영어 하려고 들어오겠나. 영어는 국가 비즈니스의 여러 변수 중 하나일 뿐이다.

다른 언어를 잘하면 정보 취득 면에서 유리하지 않나.

=물론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학생들이 읽기라도 잘하나? 인터넷에는 숨이 막히게 좋은 고급 정보가 많다. 그런 정보는 문서로 돼 있다. 읽을 줄 알고 잘 판단해서 활용하면 된다. 말도 그렇다. 잘 알아듣고 ‘예스, 노’ 잘 선택하면 그게 경쟁력이다. 그래서 언어발달은 듣기가 기본이다. 꼭 선생이 좔좔 안 읽어줘도 교과서 CD 틀어주고 뉴스 리포트 같은 것도 보여주고 다양하게 습득하게끔 유도하는 게 더 중요하다.

상향 평준화를 ‘가운데 분포’ 중심으로

새 정부가 인수위 안을 다듬어 집행할 때 중요하게 다룰 것은 뭐라고 보나.

=어떤 공교육 강화 계획도 대학이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본고사 부활하고 논술에 영어 지문을 내거나 영어 에세이를 보겠다고 나서면 온갖 사교육 억제 계획이 다 날아간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세 대학이라도 잡아야 한다. 기존 공교육 시스템 이상의 난이도를 요구하지 않는 출제를 하겠다는 정도의 강력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고입, 대입 자율화라는 이름으로 다 풀어주고는 사교육을 억제하겠다고?

입시에서 영어의 비중이 줄면 실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그것도 우리 안의 어떤 환상이다. 중·고교에 가면 내신 때문에 시험을 본다. 그러니 실용 영어가 확 준다. 말썽 안 나게 평가하려면 객관식으로 봐야 하고 정확성을 따지는 문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영어권 나라에서 3년 살다 온 애도 100점 맞기 어렵다. 문법 배우러 학원 간다. 하지만 언어에 정답이 어딨나. 수학이나 과학처럼 똑떨어지는 답이 없다. 전국 단위든 교육청 단위든 중·고교 영어 교육 과정도 ‘패스, 논패스’로 하는 게 맞다. 듣기·읽기 평가하고, 수행평가 반영하고, 얼마나 잘 말하고 정확하게 알아듣는가 교사가 보고 나서 패스 여부를 결정하는 거다. 그러면 표현이 술술 된다. 그게 진짜 실용 영어다. ‘아이 해피’ 해도 아무 지장 없다. 꼭 ‘아임 해피, 아임 풀리 머치 해피’만 맞는 게 아니다. 표현은 아이의 성격과 발달, 상황에 따라 바뀐다.


패스 기준은 어떻게 정하나.

=어렵지 않다. 교육과정이 왜 있고 국가나 교육청이 왜 있나. 학교 교육은 가운데 분포에 속한 애들을 기준으로 봐야 한다. 중간이 많고, 아주 잘하고 아주 못하는 애가 적은 게 정상이다. 평균의 학생들이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을 합의하면 된다.

하향 평준화되는 건 아닌가.

=지금처럼 과도하게 상향 평준화된 게 정상인가. 그래서 대체 어떤 성과가 있었나. 애들만 잡지 않았나. 우리에게는 나쁜 버릇이 있다. 미국 대학 가려고 토플 성적 낼 때도 학교마다 일정 기준만 넘으면 되는데 왠지 가급적 높은 점수를 받아 내려고 한다. 그 이상의 점수는 보지도 않는데 말이다. 기본적인 영어 실력을 학교 교육을 통해 기르고 그것에 어떠한 가중치도 주지 않는다면 사교육은 금방 죽게 마련이다. 그게 아니라면 영어 공용화 하자는 얘기다.

입시에서 사실상 영어를 빼면 변별성 문제가 대두되지 않겠나.

=인수위가 밝힌 방안도 특목고와 대학이 동의해줘야 가능한 것들이다. 사교육 주범인 영어만큼은 잡겠다면, 적어도 영어에서는 중·고교에서 배운 내용을 소화하면 기회를 주도록 해야 한다. 다른 다양한 면을 보고 뽑아 대학에서 정상적으로 가르치면 된다. 인재 선발에 대한 대학의 요구가 있다면 중등 교육기관과 논의해 교과과정에 반영하면 된다. 국가 교육정책은 그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다. 그게 진정한 자율화다. 대학이 전권을 갖고 편의대로 마음대로 뽑겠다는 게 자율화가 아니다. 교육학자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미국 심리학회 규정에 이런 게 있다. ‘학생의 인생에 중요한 결정인 평가 시스템은 가장 공정해야 한다’고. 어떻게? ‘가르친 내용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에 대한 강박이 올바른 영어 교육을 저해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인권유린’이다.

제1외국어에 ‘영어 공용화’ 내용을 담다

인수위는 2015년 대입부터 말하기·쓰기를 포함시키겠다며, “현재의 수능 영역인 읽기·듣기는 등급제로 평가하고, 새로 추가되는 말하기·쓰기는 학교 수업만으로도 충분히 준비할 수 있도록 합격·불합격으로 평가하겠다”고 밝혔다. 말하기·쓰기의 입시 반영률을 최소화하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도 설 연휴 기간 “중·고교에서 영어 교육을 수준별로 하도록 해 사교육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이병민 교수는 “입시에 예속된 영어 교육의 문제를 알고 반영한 것이라면, 그런 발상을 입시 영어 전체, 중·고교 영어 교육 전체로 확대하길 바란다”며 “기존의 교재나 교사, 평가 시스템을 크게 흔들지 않고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어 실력이 개인의 경쟁력이자 국가의 경쟁력이라고 믿는 이들은 영어의 ‘게이트키퍼’ 구실을 더욱 강화해야 온 국민의 영어 실력이 업그레이드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영어가 실제 필요보다 지나치게 우상화돼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영어의 이런 ‘사회적 가중치’를 최소화해야 온 국민의 영어 스트레스가 줄어든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영어 공용화론의 뿌리이고, 후자는 제1외국어의 지위를 찾아주자는 견해다. 인수위의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은 후자의 그릇에 전자의 내용을 담으려 하는 바람에 자꾸 내용물이 흘러넘치는 게 아닐까.

북유럽과 비교가 되나
유럽 8개국 ‘몰입’ 영어 수업 45.2%, 언어체계가 비슷하니 잘하는 건 당연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영어 교육’에 한정해 말한다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고비용 저효율’ 국가다. 해마다 수십조원을 영어 사교육 시장에 쓸어넣고 수십만 명이 어학연수를 떠나지만, 2004년과 2005년 두 해 동안 토플 시험을 본 212개 나라 시민들 가운데 한국인의 성적은 91위에 그쳤다.

이를 한탄하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눈을 돌리는 곳은 ‘영어 선진국’으로 꼽히는 북유럽이다. 비결은 뭘까?

한학성 경희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2000년 써낸 <영어 공용어화, 과연 가능한가>에서 덴마크 영어 교육의 비결로 ‘영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과 ‘유능한 영어 교사를 키워내는 교사 양성 시스템’을 꼽았다. 이들 나라에서는 인수위의 주장대로 영어는 영어로 가르치지만 그 비중은 생각 만큼 높지 않다.

2002년 유럽연합(EU)에서 펴낸 ‘유럽 8개국 학생들의 영어 능력 평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보자. 유럽 8개 나라에서 교사가 영어 수업시간에 ‘대부분의 시간’(most of the time)을 영어로 말한다고 답한 비율은 절반 수준인 45.2%에 머물렀다. 네델란드(29.1%)와 핀란드(39.0%)가 낮았고, 유럽에서 영어를 못하는 나라로 꼽히는 프랑스(65.3%)가 가장 높았다.

유럽 아이들은 영어를 단순히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다. 보고서는 학생들에게 ‘어디서 영어를 배운다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가장 많은 답은 ‘학교’(57.5%)였지만, ‘미디어’란 대답도 25.9%나 됐고, ‘그 밖의 다른 곳’이라는 대답도 16.5%였다. 덴마크 공중파 텔레비전은 최근 인기 있는 미국 드라마를 자막이나 더빙 처리 없이 그대로 방송한다. 보고서는 학생들의 영어 능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로 △집에서 언어로 영어를 사용하는지 여부 △미디어를 통해 영어에 노출되는 시간 △영어 학습에 대한 학생들의 열의 등을 꼽았다.

2001년 토플 시험을 주관하는 미국 ETS 보고서를 보면 동일한 학습 조건에서 미국인들이 가장 배우기 힘든 외국어로 꼽은 것은 한국어와 일본어·아랍어 등이었다. 반면 쉬운 언어로 꼽은 것은 덴마크어·네덜란드어·노르웨이어 등이었다. 한국인이 영어를 배울 때 느끼는 난감함과 북유럽인이 영어를 배울 때 느끼는 어려움을 비교할 순 없다. 그래서 우리 영어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북유럽의 예를 드는 것은 서울대에 가려면 국·영·수에 치중하고 주관식에 대비하라는 조언을 되뇌는 것처럼 공허한 느낌이 든다.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