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이야기/공부는 어떻게?

집·학교 울타리 벗어나 ‘나만의 여행’ 꿈꿔봐요

집·학교 울타리 벗어나 ‘나만의 여행’ 꿈꿔봐요

[한겨레] 청소년 스스로 기획여행

 

청소년 스스로가 직접 기획하고 떠나는 여행은 독립심과 사회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 어른들이 가리키는 방향만 따라온 탓에 혼자서는 지하철을 거꾸로 타는 것이 일쑤였던 요즘 아이들이 여행길 위에서는 눈앞의 장애물을 헤쳐가는 방법을 스스로 찾는 책임감을 기른다. 상상끼리 제공

“버스가 겨자색이라니 정말 신기했어요. 외국 여행을 떠난 것 같았죠. 그리고 태어나서 그렇게 큰 만(灣)은 처음 본 것 같아요.”

지난 10월9일부터 11일까지, 한글날 연휴를 맞아 경남 통영에 다녀온 경기 안산 국제 비즈니스고등학교 3학년 김도형군이 밝힌 여행소감이다. 김군은 2박3일간 고교생 친구 2명, 그리고 대학생 인솔자 2명과 함께 통영에서 가장 먹어보고 싶던 꿀빵도 먹고, 바닷바람도 쐬었다. 고3 수험생이지만 수시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할 계획이었던 김군의 입시는 지난 9월 원서접수가 일단락되면서 거의 끝이 났다. ‘좀 쉬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우연히 여행의 기회를 만났다.

수능 끝, 겨울방학 다가오는 때
여행지 선정·예산짜기 등
자신이 기획한 여행 떠나보길

‘공부’만 있던 단조로운 일상
쉴 틈 주고 낯선 경험도 선사
‘어떤 길로 가야 할까’ 고민하며
스스로 판단·선택하는 기회 필요




‘관광’ 아닌 ‘여행’ 떠난 청소년들

김군은 청소년 문화활동 지원단체 기부이펙트에서 진행하는 ‘스스로여행학교’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이 프로그램은 청소년 3~4명과 대학생 봉사자 1~2명이 함께 청소년들이 기획한 대로 가는 여행을 지원하는 것이다. 김군과 친구들은 기부이펙트가 올해 처음 시작한 이 프로젝트의 2기 참가자들이다. 이들은 여행 전 3주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며 함께 여행 갈 친구와 인사도 나누고, 여행의 세부 일정을 정했다. 기부이펙트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여행 전 3주간의 오리엔테이션과 2박3일 통영 여행에 김군이 낸 돈은 단 5만원이었다.

‘바람과 어울림’이라는 팀명으로 2박3일 통영을 여행하는 일정을 짜면서 이들이 세운 원칙은 세가지였다. 첫째, 평소 만나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자, 둘째, 힐링을 하자, 그리고 셋째는 낯선 곳을 많이 가보고 최대한 배우자. 이들은 여행을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과 ‘프리허그’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하고, 만나는 어른들에게 매운탕을 얻어먹기도 했다. 김군은 이번 여행에서 “스스로 ‘성장’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게스트하우스가 매력적인 공간이더라고요. 회계사나 조선소 노동자 등 평소 학교 다니면서는 만날 수 없는 분들을 많이 만나서 대화를 해보니 새로웠어요. 어른들은 처음 만난 사람도 스스럼없이 대해주시는구나, 신기하기도 했고요. 고등학생의 생활이 단조롭잖아요, 매번 만나는 사람을 만나고, 가던 곳을 가고…. 어떤 울타리 안에만 있다는 느낌이에요. 이번 여행을 통해 한층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에는 제가 모르는 것이 매우 많다는 것을 배우게 됐어요. 다가오는 1월에는 친구와 내일로 티켓을 예매해서 여행을 다녀볼 계획이에요.”

청소년들의 여행은 주로 ‘관광’이다. 단체로 가는 수학여행이나 가족여행에 청소년들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되기는 어렵고, 친구들끼리 여행을 가겠다고 하면 부모나 교사들의 반대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목적지를 선택하고, 길을 찾고,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몸으로 배우기는 어렵다.



또래·선배와 진로·입시 고민 나눠

‘스스로여행학교’ 1기로 지난 5월23일부터 2박3일간 부산 여행을 다녀온 경기 초지고등학교 2학년 박성준군은 청소년 여행의 장점을 ‘성찰과 배움’으로 꼽는다. 박군은 “입시 등으로 바빠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부족하고, 앞만 보며 주어진 길로만 가려다 보니 계획 밖의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는 한계를 여행으로 채울 수 있다”고 말했다.

“부산에 갔을 때, 탁 트인 바다를 보면서 친구들이나 대학생 형들과 나눈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요. 진로나 입시처럼 고등학생만 할 수 있는 고민들을 훨씬 솔직하게 풀어낼 수 있었어요. 덕분에 마음도 편해졌죠. 제 삶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됐어요.”

박군의 부모는 여행을 다녀온 박군의 모습에 “이런 기회가 또 있으면 주변에 소개하자”고 말할 정도로 기뻐했다. 박군은 “여행을 다녀와서 성격이 밝아졌다”며 “교복 데이트나 청소년 영화할인, 또 이런 여행지원 프로그램 등 청소년이기에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최대한 즐기고 졸업하고 싶다”고 했다.

여행을 다녀온 청소년들은 “계획대로 안 되는 여행에서 더 많이 배운다”고 입을 모았다. 김군의 여행팀은 여행 시작부터 버스표를 잘못 예매하는 등 난관에 부딪혔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같은 곳에 묵는 사람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예정에 없던 장소를 추천받아 계획을 바꾸기도 했다. 김군은 “계획 바깥에서 예상치 못한 좋은 장소를 찾기도 한다. 통영 연화도가 나한테는 그런 장소였다”고 말했다. 박군도 “계획대로만 가는 여행은 재미가 없다”고 덧붙였다.

“여행을 계획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꼭 계획에 집착하지 않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출발하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어요. 여러 돌발 상황을 대처해 나가면서 친구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는 희열도 느낄 수 있거든요.”



대중교통 이용법 배우며 세상공부

중학생들이 즐길 수 있는 1박2일간의 ‘여행게임’도 있다. 한정된 시간과 비용으로 최대한 멀리까지 다녀오는 데 성공하는 팀이 승자가 된다. 편의점을 활용해서 식사를 하는 건 1회만 가능하고, 한 가지 교통수단으로 1개 주요 시·군 이상을 통과할 수 없다. 돌아오는 길에는 나갈 때 이용했던 여행 경로를 또 활용할 수는 없다. 스마트폰 사용은 금지된다. 인솔자의 주요 역할은 안전관리이고, 여행 경로나 식사·숙박 등은 모두 아이들 스스로 결정한다. 5~6명이 한 팀을 이루어 1인당 5만원권 한 장씩을 받으면 게임이 시작된다.

5만원권에 그려진 인물의 이름을 딴 ‘집나간 신사임당’은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회적 기업 ‘상상끼리’가 시흥시의 지원을 받아 지난 9월 진행한 무료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관련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이도훈씨는 청소년 여행 관련 프로그램을 4년째 기획·운영해온 ‘청소년 여행전문가’다. 이씨는 “중학생들의 첫 여행은 거의 최초의 해외여행 수준”이라고 말했다.

“지하철을 반대로 타는 건 흔한 일입니다. 신창행, 서동탄행 등 1호선에서 특히 잘 헤매죠. 모르는 길을 찾아갈 때도 누구에게, 어떻게, 무엇을 물어야 할지 감을 잡는 데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지난 10월 기부이펙트에서 진행하는 ‘스스로여행학교’ 2기로 선발돼 통영으로 2박3일간의 여행을 떠났던 청소년 여행팀 ‘바람과 어울림’. 김도형 제공
실제로 아이들은 무궁화호, 새마을호의 차이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집과 학교, 학원 등만 반복해 오가는 탓에 대중교통을 이용해본 경험도 많지 않을뿐더러 어른들 손에 이끌려 다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씨는 여행 전 준비모임 때 시내버스, 시외버스의 차이, 찜질방, 게스트하우스 등 숙박을 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선택지를 일러준다. 이씨는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여행이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여행”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을 만나보면 가장 안타까운 것이 자신의 삶에서 선택을 해야 할 순간에 정작 본인이 결정을 해본 경험이 별로 없다는 것이에요. 여행이라는 수단을 활용해서 선택하는 연습을 하게 해주고 싶었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보다 서로 합의해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게 하는 연습에는 여행만한 것이 없죠.”

세 팀이 참가한 이번 프로그램에서 이씨가 꼽는 인상적인 팀은 ‘경쟁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하고 찜질방에서 신나게 놀았던 팀이다. 이 팀은 주어진 규칙을 지키기보다는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하겠다고 생각을 모았다.

“정해진 길로 가기보다는 본인들이 원하는 것을 직접 선택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준 팀이었어요. 경쟁에서 이기면 상품을 더 좋은 걸 받는데, 좋은 상품보다는 본인들끼리 푹 쉬고 잘 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에 합의를 하고 실제로 그걸 실천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거든요.”

이 팀의 팀원이었던 시흥 논곡중학교 2학년 최진모군은 “천안의 찜질방에서 여행을 멈추고 가져간 예산으로 넉넉하게 달걀 사먹으며 놀았어요. 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상품보다는 우리끼리 노는 것이 훨씬 중요했거든요. 자주 오지 않는 기회이기도 했고요.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여유롭게 놀았죠.”

정유미 한겨레교육 기자 ymi.j@hanedui.com
공식 SNS [페이스북] [트위터] | [인기화보] [인기만화] [핫이슈]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