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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

커피, 그 이상의 ‘맛’에 빠지다

커피, 그 이상의 ‘맛’에 빠지다

ㆍ‘한 잔의 여유’가 하루의 일상으로… 커피숍 이용 목적도 저마다 다양

독일 영화감독 빔 벤더스의 명작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천사 다미엘이 인간이 되어 가장 먼저 찾는 것이 커피다. 그는 사람들이 마시는 커피의 맛과 시원하게 부는 바람의 느낌을 알고 싶었다. 다미엘은 어쩌면 커피를 마시고 싶어 사람이 되었고, 첫 커피와 함께 자신이 인간임을 실감했다.

우리나라의 내년도 최저시급은 6030원이다. 그나마 올해 5580원에서 크게 오른 게 그렇다. 이런 시급이 정해졌을 때 당장 나온 얘기가 “커피값도 안 된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세계 커피체인점 스타벅스의 아메리카노 가격 순위에서 한국은 5위권 안에 항상 든다. 미국의 두 배가 넘는다. 그나마 한국에서 스타벅스는 다른 전문점과 비교해 중간 정도 가격이다.

 

지난해 한국의 커피시장 규모는 5조4000억원. 2000년 이후 연평균 9%씩 커지고 있다. 인스턴트커피가 1조8000억원, 커피전문점은 2조5000억원, 캔·병 커피 등 시장이 1조1000억원 규모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 집 건너 체인점에 사무실에 기계까지
천사 다미엘이 보기에 인간에게 커피는 바람과 같이 일상이기에 그걸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노동하는 존재인 사람이 한 시간을 일해야만 목으로 넘길 수 있는 고급음료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한 사람이 마신 커피가 384잔이라고 한다. 20세 이상 성인으로만 계산하면 500잔이 넘는다. 어느새 일상을 장악한 커피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SK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커피시장 규모는 5조4000억원. 2000년부터 연평균 9%씩 커지고 있다. 인스턴트커피가 1조8000억원, 커피전문점은 2조5000억원, 캔·병 커피 등 시장이 1조1000억원 규모다. 대표적인 커피전문점인 스타벅스의 매출을 보면 신촌에 1호점을 냈던 1999년에 6억원에서 지난해 6171억원이 됐다.

커피 소비가 늘면서 값싼 커피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빽다방은 아메리카노를 1500원에 판다. 저렴한 가격 덕분에 인기를 끌어 전국 매장이 200여개에 달한다. 홍대입구나 가로수길에서도 1000원대 커피가 늘었다. 햄버거 가게들도 경쟁에 뛰어들어 맥도날드 아메리카노는 1500원, 버거킹에서는 1000원이다.

커피를 많이 찾으니 기업에서는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커피 기계를 들여다 놓는다. 대치동 한 컨설팅회사에 근무하는 김모씨(42)는 “특별히 밖에서 5000원까지 하는 커피를 사서 마실 일이 없다. 회사에 캡슐커피 기계가 있고 다양한 맛의 캡슐도 무한공급된다. 거의 회사 안에서 해결한다”고 말했다. 커피의 풍미와 각성효과가 커피를 마시는 목적인 셈이다.

김씨와 같이 실용적으로 커피를 마시는 남성들이 커피숍을 찾는 것은 장소 때문이다. 김씨는 “시내에서 누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려면 장소가 있어야 하고, 그래서 커피숍을 찾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커피값이 그렇게 비싸지는 않다”고 했다. 김씨도 한때는 커피를 무척 즐겼지만 요새는 식도염이 생겨 다른 음료를 주문한다. 커피숍에 가서도 커피는 마시지 않는다.

이렇게 커피가 공간을 확보하는 목적이다 보니 커피숍에는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다. 영화 조감독 정모씨(41)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집 근처 커피숍으로 간다. 독신이라 집과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아무래도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실제로 도서관이나 커피숍에서 생기는 약간이 소음이 집중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집필의 외로움 때문에 커피숍에 간다고 했다.

“커피숍마다 죽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다양하다. 중·고생을 데리고 과외를 하거나, 보험사원이 전화를 돌리거나 신용카드를 판매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도 있다. 커다란 테이블을 붙여 대형 소를 공작하는 미대생도 있었다.” 정씨의 말처럼 취재를 위해 주택가 커피숍에 있어 보니, 오전 시간에는 학부모들 모임이, 오후에는 퇴직한 노년층의 모임이 쉽게 눈에 띄었다.

반면 커피 자체나 자리 확보보다도 마시는 행위를 소비하는 경우도 많다. 광화문 인근의 대기업에 근무하는 김모씨(38)는 “회사에 커피머신이 있지만 여직원들은 잘 찾지 않는다. 점심에 같이 모여 식사하고 줄을 서서 커피를 기다리고 잔을 들고 밖으로 나오는 일 자체가 하나의 재미이기 때문이다. 인근 부암동의 작은 커피숍을 찾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했다.

커피 전문 체인점 탐앤탐스는 최근 블랙 청계광장점에서 인디뮤지션들의 버스킹 공연을 열었다. 커피업계가 치열해지면서 음악과 문화 행사를 열어 손님을 유치하겠다는 게 이유다./경향신문 자료사진

‘고독을 즐기러’ 나홀로 카페 찾아
최근에는 흡연인구가 줄어들면서 커피를 마시는 일이 정보교환의 주요 기회가 된다. 서울의 한 법원에서는 커피콩을 갈아 뜨거운 물을 내려 만드는 드립커피 도구를 갖춘 판사들이 최근 확 늘었다. 이들은 오후 4시를 전후로 다른 방 판사들을 불러 차를 내준다. 다른 방 판사들의 고민도 들어주면서 알게 모르게 법원 돌아가는 사정도 나눈다고 한다.
“판사들은 대부분 구내에서 밥을 먹는다. 커피를 마시러 굳이 밖으로 나가기가 어렵다. 또 나가면 변호사들이 많아 말을 마음대로 하기도 힘들다. 그러다 보니 판사실 안에서 돌아가면서 모여 커피를 마시는 분위기가 생겼다. 재판부 3명 이외의 다른 판사들과도 만나게 되니 법리 측면에서도, 인간적으로도 넓어 지는 효과가 있다. 그러다가 점점 커피 자체가 좋아지게 됐다.” 5년차 판사의 얘기다.

어떤 이유로든 커피를 마시게 되면 중독 가까운 현상도 온다. 출산을 마친 여성들 가운데 임신 기간 중 커피를 마음껏 마시지 못해서 힘들었다는 얘기가 쉽게 들린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식도염이 생기는 사람들의 경우 커피를 의심해 끊는 일도 있다. 일부 애호가들은 언제라도 마시기 위해 보온·보냉병에 커피를 담아서 다니기도 한다.

언뜻 영화같은 얘기지만, 고독을 즐기러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많다. 일산에서 커피숍 벤야민을 운영하는 바리스터 최명훈씨(42)는 “우리 커피숍에는 혼자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관심을 사러 오는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에스프레소를 마셔볼 것을 권한다. 에스프레소를 찾는 사람들은 대개 혼자 오는 사람들이며 머무는 시간도 짧다”며 주문부터 퇴장까지의 완벽한 방법을 귀띔했다.

“절대 혼자일 것. 메뉴판을 쳐다보지 말고 곧바로 에스프레소를 주문. 표정은 너무 밝지도 그렇다고 너무 우울하지도 않은 무표정, 조금은 고독해 보이게. 마시면서 두리번거리거나 핸드폰을 만지지 않는다. 시선은 한 곳을 향하되 타인을 응시해 오해를 사지 말 것. 카페에 머무는 시간은 담배 한 대를 태울 만큼만.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카페문을 열고 나가다가 문에 부딪히거나 미끄러져 자빠지지 않는 것.”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