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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내신 위주 낡은 입시에 치이고 고교등급제에 좌절…학생들만 희생양

내신 위주 낡은 입시에 치이고 고교등급제에 좌절…학생들만 희생양
한겨레
 

 

‘2015 국제고·외고 입시설명회’가 경기외국어고등학교에서 열린 지난해 9월27일 설명회를 찾은 학부모들이 강사의 설명에 귀 기울이고 있다. 의왕/뉴시스

[광복 1945, 희망 2045] 다시, 교육부터
교육갈등 접점 찾기 ④
모순된 대학 입시 체제

‘지덕체를 겸비한 국제 전문 인재 육성’을 교육목표로 하는 특목고인 국제고를 다닌 ㄱ양은 ‘별종’이다. 영어유치원·영어전문학원 따위의 사교육을 받지 않았고, 단기 유학 한번 다녀오지 않았다. 그냥 영어가 좋았고 중학교 2·3학년 영어 내신성적으로 국제고에 붙었다. “신문에 나오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학원 다닌 애들도 있긴 한데요. 그냥 자기 혼자 공부해서 온 애들도 많았어요.”

ㄱ양이 다닌 국제고는 설립 취지에 맞게 다양하고 특성화한 교육과정을 운영했다. 수능은 2과목만 치르는데 사회교과 10과목을 모두 배웠고 인류의 미래사회, 세계문명사, 국제경제 등 실제 입시에는 쓰이지 않는 ‘국제계열 전문교과’도 이수했다. 다른 외국어고나 자사고는 방과후학교에 사교육 강사들을 불러 논술부터 수능 대비까지 해준다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하지만 ㄱ양이 치른 2015학년도 입시는, 입시와 유리된 고교 생활이 결국 불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특목고에 유리하다는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중상위권대 중국어과에 지망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5등급에 그친 내신 성적 때문이었다. 계열 인원수가 100명도 채 되지 않아 1개만 틀려도 내신 등급이 뚝뚝 떨어지는 국제고의 한계였다. 수험생들이 모이는 입시 정보 카페에선 ㄱ양보다 내신 등급이 더 높은 외고생들이 해당 학과에 붙었다는 ‘합격수기’를 올렸다.

그래도 ㄱ양은 외고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솔직히 제가 재수하니까 ‘너 실패했다’, ‘국제고 잘못 간 거다’ 이런 얘기 듣긴 하는데요. 저는 국제고에서 세계를 보는 안목을 키웠고 돈 주고 살 수 없는 값진 것들을 많이 얻었어요.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국제고에 갈 거예요.”

ㄱ양은 다양하고 창의적인 인재 양성을 명분으로 추진된 ‘고교 다양화 정책’의 ‘수혜자’였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였다. ‘고교 서열화+획일적 입시’라는 현재의 낡고 모순된 대입 체제가 학생 모두를 패자로 만들고 있다.

박근혜 정부 ‘내신 우선주의’에
자사고 하위권 학생들은 역차별

■ 10년 전과 같은 입시, 다양화한 고교 체제와 조응 못해

현행 입시는 △학생부교과전형 △학생부종합전형 △논술전형 △수능전형 등 크게 4가지로 구분된다. 이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전형요소는 내신 성적, 즉 학생부 교과 성적이다. 교과 성적과 비교과 활동을 함께 평가하는 학생부종합전형에서도 일단 교과 성적이 중요하고, 논술전형에서도 학생부 성적을 반영하는 대학이 적지 않다.

내신 성적 위주의 입시는 진보, 보수 정부를 가리지 않고 일관되게 추진돼 왔다. 김동춘 전국진학지도협의회 사무총장은 “역대 정부 중에 박근혜 정부가 가장 강하게 내신 강화 방침을 관철시키고 있다. 교육부가 학생부종합전형에서 특목고나 자사고 비율이 높으면 대학재정지원사업을 할 때 감점을 하는 방식으로 관리를 하기 때문에, 대학이 교과 성적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10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낡은 입시는 10년 전에 견줄 수 없이 다양한 선택을 하는 학생들을 무시한다. 2004년 40여곳이었던 특목고·자사고 등은 10년 만에 100여곳으로 두배 이상 늘었다. 질 높은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정부 발표만 순진하게 믿고 특목고나 자사고에 들어간 학생들은 구태를 벗지 못한 학교에서 소외된다. 자사고에 진학했던 ㄴ군은 “자사고라 비교과 활동이 다양하고 입학사정관이 평가하는 학생부종합전형에 유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는 토론대회, 발표대회 이런 거 안 하고 경시대회, 과학탐구대회 같은 교과 관련 대회만 했다. 학생부종합전형도 내신 등급이 잘 나와야 학교에서 신경써준다. 그렇지 않으면 대개 논술 준비하거나 수능 대비를 한다”고 했다.

자사고에서 일반고로 전학한 ㄷ양은 “자사고에 가면 사교육 없이 학교 교육만으로 대학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내신 등급 따려고 오히려 학원을 더 다녀야 했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애들은 등록금 고지서를 정독실에 붙여놓고 공부할 정도였는데, 사교육비 부담까지 져야 하니 속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고교 유형별 입시생들 말말말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특목·자사고 1등급만 유리한 입시
내신 안 좋으면 논술·수능 ‘3중고’

■ 1등급이 독식하는 입시…끝나지 않은 내신·수능·논술 삼중고

내신 위주의 입시에서 가장 유리한 이들은 특목고·자사고의 1등급 학생들이다. 이들은 수시모집에 지원한 5~6개 대학에 모두 합격해 5관왕, 6관왕에 오른다. 반면 적정 내신 성적을 받지 못한 학생들은 단 한곳에 합격하는 것도 힘들다. 일반고·특목고·자사고를 막론하고 논술이나 수능까지 준비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의 2008 대입제도 개선으로 등장한 죽음의 트라이앵글이 정권이 두번 바뀌도록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 1170명을 모집하는 한 대학 논술전형에 6만2000여명의 학생이 몰릴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논술전형은 사실상 논술전형이 아니다. 학생들은 논술전형인데도 불구하고 특목고를 우대하는 고교등급제가 적용되거나 아니면 수능 성적이 더 중요한 변수라고 생각할 만큼 ‘입시 불신’이 심각하다. 일반고 출신 ㄹ군은 “아, 이게 내가 글을 잘 써서 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구나, 교수가 내 글을 읽을 수는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외고 ㅁ양은 “논술전형에 대해 안내하면서 수능을 잘 보라고 하는 대학도 있다. 서울 명문 사립대 논술전형에서는 논술은 두 줄밖에 못 썼는데도 수능 한두개만 틀려서 붙은 친구도 있다”고 했다.

사정관제로 입시 진일보는 ‘헛꿈’
대학들 교묘히 고교 학력차

■ 더 교묘해진 고교등급제…서열화 막고 수평적 다양화해야

입학사정관이 교과 성적뿐만 아니라 학교생활 전반을 평가하는 입학사정관제는 학생들의 다양한 선택을 반영하는 쪽으로 입시가 진일보할 수 있는 계기였다. 하지만 현행 입학사정관제는 특목고·자사고는 물론 성적 우수 학생이 몰려 있는 일반고에만 유리한 방향으로 입시를 ‘퇴보’시켰다.

‘내신 강화=일반고 유리’라는 전통적인 공식이 더 유효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학들은 고교간 학력 차이를 입시에 반영한다. 예를 들어 해당 학교 출신자들이 ‘학생부교과전형’으로 많이 오는지, 수능이나 논술로 많이 오는지를 보는 식이다. 논술 응시가 많으면, 내신은 낮지만 학력은 높은 학교라고 본다. 김동춘 전국진학진도협의회 사무총장은 “모든 고교를 서열화해 성적이 우수한 애들이 몰려 있는 학교의 학생을 뽑고자 한다는 점에서 하위권 특목고나 자사고는 수혜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학생들은 자기 성적이 학교 레벨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을 체감으로 알고 있다. 1등급대 내신 성적을 받고도 지난해 수시모집 학생부종합전형에서 모두 낙방한 일반고 출신 ㅂ군은 “지금 우리나라에는 4종류의 고등학생이 있다. 성적이 좋은 학교의 성적이 좋은 학생, 성적이 나쁜 학교의 성적이 좋은 학생, 각각에 성적이 나쁜 학생이 있다. 원하는 대학에 가려면 나쁜 학교의 좋은 학생은 ‘올 1등급’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서울권 외고를 졸업하고 올해 서울 중상위권대에 논술전형으로 합격한 ㅅ군은 “학생부종합전형의 경우 외고에선 내신 8등급, 9등급이 붙는다. 내가 치른 논술전형은 5000명이 응시해 100명이 붙었다. 내가 논술 잘 써서 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외고가 한몫했다고 본다”고 했다.

고교 체제 및 대입 제도를 주로 연구하는 안선회 중부대 교수는 “현행 대입제도는 수직적 다양화, 즉 서열화한 고교 체제를 지원하는 시스템이다. 미래 인재 육성을 목적으로 논의된 고교 다양화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고교 체제의 수평적 다양화가 달성돼야 하고 대입제도 역시 국영수 성적 위주를 탈피해 다양한 진로별 맞춤형 제도로 가야 한다”고 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