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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1999년생 교과 개정만 4번…‘우리가 교육 실험대상인가요’

1999년생 교과 개정만 4번…‘우리가 교육 실험대상인가요’
한겨레 전정윤 기자 메일보내기
경기여고 1학년 김지윤(왼쪽)양이 9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집에서 오빠가 쓰던 학습참고서를 책상에 쌓아둔 채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광복 1945, 희망 2045] 다시, 교육부터
고1 김지윤양을 통해 본 졸속개정

2006년 초등학교에 입학한 김지윤(17·경기여고1)양은 초등 6년간 사회과목 역사 영역을 한번도 배운 적이 없다. 7차 교육과정이었던 1~5학년 때는 역사가 6학년에 있었고, 2007 교육과정을 적용받은 6학년 때는 역사가 5학년으로 내려가면서 ‘교육과정 교체기의 공백’이 발생한 탓이다.

김양은 영문을 몰랐지만 정부가 교육과정 설계를 잘못한 피해를 본 셈이다. 김양과 동갑인 1999년생, 현재 고교 1학년 약 58만9000여명한테 이 정도는 차라리 양호하다. 이들은 초등 1~5학년 7차 교육과정(총론·교과서 개정), 6학년 2007 교육과정(총론·교과서 개정), 중1~3학년 2009 교육과정(총론 개정), 고1~3학년 2011 교육과정(교과서 개정) 등 ‘최다 교육과정 개정’을 겪었는데, 교과서도 준비되지 않은 집중이수제 등 졸속 개정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12년이면 사실 저희들 인생이 걸려 있는데, 교육정책 만드시는 분들이 너무 성의가 없으신 것 같아요.” 교육과정이란 한 나라가 추구하는 교육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교육내용과 학습활동을 정해놓은 ‘설계도’다. 인생을 좌우할지도 모를 학창시절에 교육정책 실험이라도 당하듯 네 번이나 ‘설계 변경’이 이뤄진 셈이니, 김양이 교육당국의 무성의를 탓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신지식인이니, 글로벌 창의 인재 양성이니 교육과정을 바꿀 때마다 목표는 요란했다. 하지만 김양은 “그런 목표에 맞는 교육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아요. 수시로 뭔가 바뀌긴 하는데 바뀔 때마다 내신이든 생활기록부든 수능이든 면접이든 다 잘해야 할 것 같아 부담스럽고 피곤해요”라고 말했다. 교육제도와 시스템과 관련한 변화와 논쟁은 결국 학생 한명 한명의 변화에 그것이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로 평가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막대한 논란을 초래한 수많은 교육과정 개정이 학생 개개인, 가령 김지윤양에게 가져온 변화는 ‘부담’과 ‘피곤’이었던 셈이다.

초등 때 7차·2007, 중학때 2009, 고교때 2011 교과 개정 한번도 배운 적이 없어요.”
초등 영어 사교육…역사 못배우고 중입학…집중이수제 피해…
과정 바뀔 때마다 내신·수능·면접 다 잘해야 할것 같아 부담
“우리에겐 인생 걸렸는데 정책 결정자들 너무 성의없이 바꿔”

김양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교육과정 개정의 폐해’는 2009 교육과정의 집중이수제였다. 수업의 집중도를 높인다며, 사회·도덕·과학·기술·가정·음악·미술 등 일부 과목의 수업을 특정 학기나 학년에 몰아서 수업하는 제도다. 김양의 중학교 입학 직전 해인 2011년 도입됐는데, 온화한 말투의 김양은 집중이수제에 관해서만큼은 유독 “집중이수제는 실패”라고 힘줘 말했다.

집중이수제는 학교현장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정책인데, 교육부는 집중이수제에 걸맞은 교과 재구성이나 통합교과서조차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제도를 도입했다. 수업은 전체 6학기 중 2개 학기에 몰아서 하는데, 교과서는 기존에 3개 학년별로 나눠져 있던 걸 그대로 쓰게 했다. 김양의 경우 역사 과목을 1학년 2학기와 3학년 1학기에 몰아서 배웠다. 김양의 어머니 백혁정(45)씨는 딸이 3학년에 올라갈 때 1·2학년 교과서를 버렸다. 3학년에 올라가면 1·2학년 교과서는 당연히 필요 없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백씨는 “지윤이가 3학년 2학기 때 2학년 사회 교과서로 공부해야 한다고 난리를 쳐서, 결국 대형서점에 가서 교과서를 다시 사줬어요”라고 말했다.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여섯 학기 동안 가르칠 걸 두 학기에 가르치다 보니 ‘진도 빼기’도 벅차했다. 이 때문에 역설적으로 시험에 나오는 것만 뽑아서 가르치는 ‘집중 수업’이 이뤄졌다. 김양은 “시험에 안 나오는 부분은 수업시간에 읽지도 않고 그냥 넘어가 버리니까 교과서가 아깝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어요”라고 말했다. 또 역사 같은 집중이수 과목들은 한번에 시험범위가 100쪽을 넘기기 일쑤였다. 김양은 “시험공부 하기도 진짜 힘들었고 시험이 끝나면 공부했다는 기억도 나지 않았어요”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나마 김양은 전학을 하지 않아 부작용이 덜했다. 2011~2012년에 중학교에 입학한 또래 학생들 가운데 전출·전입 학교의 과목별 집중이수 시기가 맞지 않은 학생들은 특정 과목을 아예 못 배우거나 아니면 중복해서 배우기도 했다.

김양이 공교육에서 처음 경험한 7차 교육과정은 김양이 태어나기도 전인 1997년 12월30일 고시됐다. 교육과정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나이였지만, 7차 교육과정은 김양과 친구들의 초등학생 시절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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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 교육과정 때부터 초등학교 3~6학년에 영어가 들어왔다. 강남에 사는 김양과 또래 친구들은 초등학교 영어에 대비해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우는 게 이미 보편화돼 있었다. 김양은 “유치원에서 영어를 배워서 알파벳 쓰기나 기초적인 자기소개 정도는 할 수 있었고, 초등학교 때도 학원에 계속 다녔어요. 학교 영어는 너무 쉬워서 지루했고 학교에서는 별로 배운 게 없어요”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양의 초등학교 생활통지표를 보면, 6학년 1학기 때 영어 읽기·쓰기·듣기·말하기 중 읽기에서 딱 하나 ‘잘함’(G)이 있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매우 잘함’(E)이었다. 김양이 6학년이었던 2011년 영어 수업시수가 1시간 늘어나면서 수업부담이 커지고, 교육계가 찬반논란으로 또 시끄러웠다. 하지만 김양은 부질없다는 듯 “6학년 영어도 학원에서 배워서 아는 내용이었어요”라며 영어 실력의 비결을 학원에서 찾았다.

7차 교육과정은 ‘사교육 폭증’의 기폭제이기도 하다. 창의교육을 한다고 교과 학습내용을 30% 감축한 반면, 학교 시험은 그대로 어렵게 나오고 수행평가 등이 강화되면서 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학교에서는 교과서대로만 배우니까 문제유형도 단순하고 난이도가 낮았어요. 그런데 시험은 변별력을 위해서 어렵게 내고, 서술형도 엄청 내고, 쪼잔하게 꼬아서 내기도 하니까 ‘사교육 하라’는 거죠. 학원에 다닌 덕분에 점수를 잘 받은 것 같고, 학교는 배우는 곳이라기보다는 시험 치는 곳 같아요.”

김양은 4~5학년 무렵부터 혼자 버스를 타고 20분 거리에 있는 대치동 학원에 다녔다. 영어와 수학 선행학습과 시험준비가 주된 이유였다. “반친구들이 대치동 학원에 많이 다니니까 좀 불안했어요. 지금 영어·수학 실력에 학원이 많은 영향을 미쳤고, 시간을 되돌려도 다시 학원에 다닐 것 같아요.” 김양은 학원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었던 탓인지 처음엔 “초등학교 때 학원을 많이 다니진 않았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논술, 피아노, 미술, 방송댄스, 수영 등 하나둘씩 떠오르는 기억을 복기하더니 “생각보다 꽤 많이 다녔었네요?” 하며 웃었다.

김양의 어머니 백씨는 1998년 2월생인 아들과 1999년생인 김양을 뒀다. 백씨는 “아들이랑 딸이 나이로는 한살, 학년으로는 두 학년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도 학교에서 배우는 게 많이 다르다”며 학부모도 불편하고 혼란스럽다고 했다.

김양은 올해부터 단계적으로 대입 인성 평가가 강화된다는 언론 보도를 언급하면서 목소리 톤이 한 단계 높아졌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공부 잘하라고, 성적이 제일 중요하다고 가르쳐놓고 이제 와서 대학 갈 때 인성도 본다고 하면 어쩌라는 것이냐는 하소연이 이어졌다. 김양은 “선생님들은 윤리 같은 과목도 이제 수시모집 면접 질문으로 나올 수 있으니 중요하다고 하고, 저희 때부터 한국사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필수라고 하고, 음악과 미술은 하는 족족 다 수행평가고, 재미로 하는 과목이 하나도 없어요”라며 교육과정이 바뀔 때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담감을 털어놨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