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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만남

"만년필, 3천원짜리나 백만원짜리나 다르지 않다"

"만년필, 3천원짜리나 백만원짜리나 다르지 않다"

 



기자의 주 업무는 ‘인터뷰’다. 오랫동안 계획해서 치밀한 질문을 짜내서 만나는 경우도 있고, 사건 사고 현장처럼 언제 누구를 만나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정신 없이 질문을 던지는 경우도 있다. 며칠 뒤면 잊혀지는 사람도 있고, 시간이 오래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인터뷰이도 있다.

지난해 초, 눈 오던 추운 날 을지로에서 만난 박종진 씨는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인터뷰이다. 그 때 받은 인상이 매우 강했다. 2월에 취재하고 3월에야 뉴스에 방송되면서 취재파일을 쓸 타이밍을 놓쳤다. (당시 8시뉴스에 방송된 ‘만년필 인기’ 리포트를 먼저 보시면, 이 사람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을 듯. - 기사 보러 가기)



그러나 이틀을 만나고 고작 2분짜리 기사 하나로 넘긴 뒤, 1년 내내 마음이 찜찜했다. 나 혼자만 듣고 간직하기엔 아까운 얘기들이 한 보따리다. 만 1년을 채우기 전에 나눠야겠다. 당시 인터뷰 녹취록과 촬영 화면 정리본을 꺼내본다. (따옴표 안은 박종진 씨의 말을 그대로 옮긴 부분이다.)




●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만년필에 대한 것이라면…

‘국내 유일 만년필 연구소장’, ‘국내 최고의 만년필 전문가’, ‘국내 최대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 회장’, '서울 펜쇼 기획자’…

화려한 수식어의 이 사람, 박종진 회장을 만나게 된 건, ‘만년필입니다’란 책 때문이다. 2013년 말, ‘만년필입니다’라는 주어도 없는 독특한 제목의 책이 서점에 등장했다. ‘디지털 시대에 더욱 빛나는 아날로그 감성. 수집하고, 사용하고, 수리하는 즐거움’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만년필의 탄생부터 변천사, 브랜드별 특징, 유명한 만년필들, 고르고 사용하고 관리하는 방법 등, 만년필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책이다. 연락했더니, 흔쾌히 촬영에 응하겠다는 답이 왔다. 을지로의 ‘만년필 연구소’ 주소를 받고, 토요일 오후에 찾아가기로 했다.

주말의 을지로는 대부분의 사무실이 문을 닫고 썰렁했는데, 여기 과연 사람이 있는 거 맞나 싶은 허름한 건물의 작은 사무실 한 칸이 ‘만년필 연구소’였다. 찾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입구 밖에서부터 이미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끼는 만년필을 한 자루, 혹은 필통 가득 품에 안고, 수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작은 종이에 만년필의 종류와 증상(잉크가 안나와요, 펜촉이 휘었어요 등등), 소유자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고, 입구에서 회장님을 돕는 동호회의 다른 회원들이 접수를 받으면, 길게는 몇 시간을 기다려야 비로소 회장님에게 만년필을 진찰받은 기회를 누리는 것이, 마치 대형 종합병원 같은 분위기였다.

회장님은 맨눈으로, 확대경으로 만년필을 세심히 관찰하고는, 수리가 필요한지, 사용자가 손에 힘을 빼거나 관리만 잘해 줘도 되는지, 당장 수리가 안되니 입원(만년필을 맡기고 갔다가 다음 주에 찾으러 오는 것)이 필요한지를 결정한다.

“그립을 고치시기 전까지는 만년필을 고쳐도 또 고장나요”, “쓰는 문제가 고장의 90%예요.” “손이 이렇게 되면 안돼요. 다시 한 번 써보세요.” 대략 이런 진단이 내려진다. 6~7명만 앉아도 꽉 찰 사무실에 수십명이 오가는 틈에서 몇 시간 동안 촬영하고, 드디어 여유 있는 인터뷰 시간을 얻었다. 인터뷰는 며칠 뒤 강남의 한 펜카페에서 한 번 더 이어졌다.




● 만년필은 '소통의 도구'

“만년필을 쓰는 매력은, 소통의 도구라는 거예요. 만년필의 원리는 잉크가 중력으로 아래로 내려와 펜촉에서 종이로 스며들거든요. 만년필은 종이하고 소통하지 않으면 글씨가 써지지 않아요. 잉크를 흡수할 수 없는 유리나 비닐에는 쓸 수 없죠. 그리고, 볼펜 같은 경우는, 종이의 의견이라든가 생각이라든가 그런 것 없이, 그냥 꾹 눌러 쓴단 말이에요, 하지만 만년필은 무생물이지만, 종이와 소통을 해야 써져요. 인위적으로 압력을 줘서 꾹꾹 눌러쓰는 게 아니라, 힘을 주지 않아도 자연의 원리에 따라 써지는 필기구죠.

그리고 만년필은 사용자와도 소통을 하죠. 만년필이라는 게 일주일만 써도 쓰는 사람에게 맞춰져요. 펜촉이 미세하게 그 사람에게 맞게 마모가 돼서, 그 사람만의 펜이 되요. 관리하면 30~40년도 끄떡없이 쓸 수 있어요.

이렇게 만년필은 쓰는 사람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주고, 남에게도 각별하게 다가가요. 만년필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년필로 쓴 편지나 글을 받으면 ‘아, 이거 좀 특별한 글씨같다’는 느낌을 받아요.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매개체가 되는 거죠.”


게다가 만년필은 ‘萬年筆’ 이라는 이름답게 오래오래 쓸 수 있다.

“볼펜은 잉크를 다 쓰면, 통째로 버리거나 볼펜심을 갈아 끼워야 하지요. 하지만 만년필은 잉크만 채우면 되요. 백년 된 것도 지금 충분히 사용하는 게 많아요. 만년필에는 ‘일회용’이라는 말이 연관성이 없어요. 그러니 지금 지구에서 진짜 필요한 필기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 굳이 비쌀 필요 없어요

그러나 만년필에 대해서는 대부분 고정관념이 있지 않나. 몽*랑, 파*, 등등 사장님이 계약서에 사인할 때 폼나게 꺼내들어야 할 것 같고, 왠지 비싸야 좋을 것 같고. 그런데, 박종진씨는 이런 얘기에 손사래를 친다.

“만년필은 3천 원짜리나 몇백만 원짜리나 써지는 원리는 똑같아요. 더 비싸다고 해서 필기감이 좋은 것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동일한 원리이기 때문이죠. 원리가 똑같듯이 필기감은 거의 같아요. 게다가 3천 원짜리나 몇 백만 원짜리나 모두 ‘절정의 필기감’을 보여주는 순간이 와요.

이건 펜촉이 쓰는 사람의 필기 습관과 필기 각도, 필기량, 잉크와의 궁합, 종이와의 궁합에 맞춰져서 미세하게 조금씩 닳아서, 어느 순간 아주 놀라운 필기감을 주는 순간을 말해요. 신기한 건, 모든 만년필은 다 이런 순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꼭 비싼 만년필을 구입하시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쓰임새에 맞게 편하게 구입해서 쓰면 됩니다. 중요한 건, 그 만년필을 어떤 사람이 쓰느냐, 어떤 글씨가 나오느냐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보도국에도 만년필을 쓰는 기자들이 많다. 만년필 좋아하냐고 물으면, 대부분 ‘난 그냥 싸구려를 쓰고 있어서…’라고 말끝을 흐리는데, 그럴 필요 전혀 없다는 거다. 기자는 뚜껑을 재빨리 열어 빠른 속도로 글씨를 쓰고, 수첩에 꽂고 다니기 좋은, 회전식이 아닌 쑥 뽑아서 여는 뚜껑에 펜촉이 튼튼하고 잉크가 술술 잘 나오는 만년필이면 된다는 게 박종진 씨의 설명이다.



● 중요한 건 매일 사용하는 것!

앞서 말했듯 쓰는 사람에 맞게 펜촉이 마모되어 놀랄만한 필기감을 보여주는 단계까지 오려면, 중요한 건 ‘매일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주 써서 잉크가 늘 흐르고, 새 잉크를 넣고 하면 고장이 나지 않는다고. 가끔 써서 잉크가 마르고, 잉크가 말랐는데, 무리하게 힘줘서 눌러 쓰면 펜촉이 망가지게 되고, ‘만년필’이란 이름과 달리 오랫동안 쓸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건, 쓰는 방법이다. 볼펜을 쓰듯이 힘을 꽉 줘서 쓰는 건 펜촉의 생명과는 상극이다. 힘을 빼고 부드럽게 쓰는 게 정답.

박종진 씨는 “외국 동호회와 교류해보면, 한국에 대해 놀라워해요. 다른 나라는, 만년필의 주된 사용층이 60~70대예요. 가까운 일본도 그렇고요. 그런데 한국은 20대부터 40대까지 활발히 만년필을 쓰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외국 사람들이 너무 부러워하는 거예요.

요즘이 필기가 필수시대는 아닙니다. 그런데 만년필로 글씨를 쓰거나 만년필을 구입하는 사람이 느는 것은, 글씨를 많이 쓰지 않기 때문에 글씨를 쓸 때, 좋아하는 글귀를 옮겨 적을 때, 내가 좋아하는 필기구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고 봐요. 이 때문에 만년필이 요즘 젊은이들에게도 인기가 있고 새롭게 조명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만년필이 좋아서 이렇게 수집도 하고 주말에 시간을 내서 무료로 수리도 하고 있어요.(주중엔 본업에 종사한다. 본업은 밝히지 않음) 만년필을 쓰는 사람이 좋거든요. 내 만년필이 아니더라도 만년필을 좋아하는 사람의 만년필이면 고쳐주고 싶어요. 저는 이게 일생의 하나의 수행 목표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만년필 잘 고치는 사람이 되고 싶죠.”




이 인터뷰를 끝내고, 나도 이제 만년필 좀 정석대로 – 매일, 힘주지 않고- 쓰겠다며 구입했다. 하지만 만년필은 주인 잘 못 만난 죄로 지금 서랍속에서 잉크가 다 마른채로 고이 모셔져 있다. 이 참에 회생시켜서 ‘놀랄만한 필기감을 보여주는’ 그 순간을 향해 세월을 함께 해봐야겠다.

이 취재파일을 읽고, 문득 서랍 속 만년필이 떠오르셨다거나, 만년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지셨다면? 박종진 씨의 책 ‘만년필입니다’를 권해드린다.


▶ "글씨로 나를 표현"…펜에 밀렸던 만년필의 부활

 

 

"글씨로 나를 표현"…펜에 밀렸던 만년필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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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4.03.01 17:49|수정 : 2014.03.01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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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이렇게 손글씨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뭘로 쓰느냐도 중요해졌습니다. 특히, 사각거리는 만년필의 인기가 뜨겁습니다.

    조지현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토요일 오후, 서울 을지로의 한 사무실에 긴 줄이 늘어섰습니다.

    이들이 들고 온 건 만년필입니다.

    [노태원/경기도 안양 : 점검도 받고 고칠 수 있으면 고치려고요.]

    국내 최고의 만년필 전문가 박종진 씨의 사무실엔 이렇게 매주 토요일마다 만년필에 대해 상담받고, 고치려는 사람들이 50~60명씩 찾아옵니다.

    [이용호/서울 관악구 : 쓰는 재미가 있어요. 쓰다보면 계속 쓰고 싶고.]

    [김재욱/서울 중랑구 : 사각거리는 특유의 필감이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이런 매력이 주목받으면서, 볼펜의 편리함에 뒷전으로 밀려났던 만년필은 최근 3년간 판매가 다시 늘고 있습니다.

    필기구에 대한 관심은, 지난달 한 문구회사가 내놓은 2만 원짜리 한정판 볼펜의 폭발적 인기로도 나타났습니다.

    [정명희/모나미 마케팅과장 : 1만 개가 출시되었는데요, 홍보가 나가자마자 하루 만에 매진이 되었어요.]

    종이 다이어리의 매출 또한 줄기는 커녕 매년 20%씩 늘고 있습니다.

    [박종진/만년필 연구소장 : 필기가 필수가 아닌 시대에, 몇 자를 쓰더라도 좋은 필기구로 쓰고 싶은 그런 마음.]

    글씨로 나를 표현하는 시대, 개성있는 옷과 장신구로 몸을 꾸미듯, 나만의 필기구로 글씨를 쓰는 건 자연스러운 추세입니다.

    (영상취재 : 최호준·주 범·공진구, 영상편집 : 김종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