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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아이들을 걷게 하라”… 동선 늘리려 건물 구조까지 바꿔

“아이들을 걷게 하라”… 동선 늘리려 건물 구조까지 바꿔

[동아일보]
[글로벌기획]‘자동차-햄버거의 나라’ 美에 부는 건강 바람 걷기 Yes!… 패스트푸드 No!

 

미국 비영리단체인 ‘네트워킹아웃’이 운영하는 ‘런 디스 타운(run this town)’ 프로젝트에 참가한 일리노이 주 시카고 시 지역 주민들이 달리기 전 준비운동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네트워킹아웃

살면서 오로지 자동차에 출퇴근을 의존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미국에 들어온 2012년 12월부터 약 1년 8개월 동안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카운티의 집에서 워싱턴DC에 있는 사무실과 주미 한국 대사관, 각종 싱크탱크 사무실 등을 오가기 위해 자동차만 이용해야 했다.

버지니아 주 덜레스 국제공항에서 워싱턴DC를 잇는 메트로(한국의 전철과 지하철) 실버 라인의 1단계 구간이 개통된다는 말을 지난해 여름에 듣고 비엔나 타운 북쪽의 타운 하우스(일종의 미국식 연립주택)에 세를 들었다. 올해 7월 26일 메트로가 드디어 개통됐다. 지금까지는 싫건 좋건 자동차가 거의 유일한 출퇴근용 이동수단이었지만 대체 수단이 생긴 것이다.

서울에서 ‘걷기’는 건강을 챙기는 가장 쉬운 운동이었다. 특히 하루 한 시간 이상 걷기는 고마운 특효약이었다. 하지만 ‘자동차의 나라’ 미국에서는 따로 시간을 내 공원을 산책하지 않는 한 걷기가 쉽지 않았다.

운전자 처지에서 본 미국은 사통팔달로 잘 정비된 고속도로와 간선도로를 갖춘 나라지만 ‘걷기족’에게는 매우 불편한 곳이다. 도시 구조 자체가 걷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설계됐다. 아예 ‘함부로 걷지 말라’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집에서 각종 모임이 있는 한국 식당까지 걸으면 꼭 30분이 걸린다. 슬슬 걸어가기 딱 좋은 거리다. 그런데 20분 정도까지는 길가에 걸어서 갈 보도가 있지만 이 식당이 눈앞에 보이는 간선도로(7번과 123번) 교차로에서 보도가 끊어진다. 할 수 없이 20분 정도를 다시 돌아가거나 아니면 무단횡단을 감행해야 한다.

한국의 한 특파원은 저녁에 술을 한잔 걸친 채 걸어서 집에 가다가 경찰에게 연행돼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를 적발한 경찰관은 “음주 운전뿐만 아니라 음주 도보도 공공안녕을 해친다. 당신도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루 자고 가는 게 낫다”고 ‘친절하게’ 안내했다고 한다.

워싱턴DC 시내 중심은 보도가 잘 연결됐지만 걸어서 진입하는 것이 문제다. 주차난 때문에 2시간 이상 사설 주차장에 차를 대면 20달러(약 2만 원) 안팎의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길가에 돈을 내고 차를 세워두는 주차는 규칙이 복잡해 그동안 25∼100달러의 주차 위반 딱지를 두세 번이나 떼였다. 견인을 당하면 200달러를 내고 찾아와야 한다.

버지니아 지역 기존 메트로 주차장에 차를 대고 워싱턴DC로 들어가려 해도 빈 공간이 없어 5달러에 가까운 주차료만 내고 다시 돌아 나온 일도 허다했다. 하다못해 DC 북서쪽에 있는 한국 영사관 무료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하루 종일 걸어서 돌아다니다 다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눈물겨운 걷기 투쟁을 하기도 했다.



‘걷기’를 도와준 메트로 개통

두 달 전부터 집 앞에 메트로가 개통되면서 모든 고민과 고통이 사라졌다. 집 문을 나와 메트로를 타고 내려 워싱턴DC 사무실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시간. 자동차로 나올 때보다 시간은 두 배나 걸리지만 삶은 더 윤택해졌다. 운전과 주차의 고통에서 해방됐다. 메트로로 이동하는 동안 신문을 읽고 e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다. DC의 도시 풍광을 즐길 수도 있다.

메트로 개통식 날 1단계 개통구간 종착역인 필레-레스턴 역에서 메트로를 타고 한 정거장 지나 실버 스프링 역에 내린 데버러 슈프렌츠 씨(여·자영업) 부부를 만났다. 평소 자동차로 이용했던 월마트 쇼핑을 걸어서 해보기 위해 부부가 손을 잡고 나왔다고 했다.

슈프렌츠 씨는 “정말 행복하다. 이젠 지하철을 타고 걸어서 워싱턴DC나 인근 지역 어디라도 다닐 수 있게 됐다”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이어진 그린즈버러, 매클린 등 이날 개통된 5개의 지상 메트로 역 인근 주민들은 저마다 가족의 손을 잡고 시승을 하면서 하늘에서 처음 내려다보는 동네 풍경을 즐겼다. 이 지역 최대 쇼핑몰인 타이슨스 코너 역은 DC에서 지하철을 타고 쇼핑하러 온 미국인들로 붐볐다.

이스트 폴스처치 역에서 기존 오렌지 라인과 만나 워싱턴DC로 들어가는 메트로 실버 라인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기존 메트로는 이용객들이 인근 대형 주차장에 차를 대고 타는 ‘파크 앤드 라이드(Park and Ride)’ 형식이지만 실버 라인 주변에는 종착역인 레스턴 역을 빼곤 주차장이 거의 없다. 걸어와 메트로를 타라는 ‘워크 앤드 라이드(Walk and Ride)’ 방식이다.

주차장 터로 쓸 수 없을 만큼 치솟은 땅값도 이유지만 이면에는 자동차에 갇혀 건강을 잃어가는 미국인들에게 걸어서 지하철 타기를 권하는 뜻이 담겨 있다. ‘패스트푸드의 나라’ 미국에서는 비만과 각종 성인병으로 개인과 사회의 비용이 급격히 늘었다. 그런 몸살을 앓고 있는 개인의 환경을 구조적으로 바꿔 건강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워크 앤드 라이드’다.

올해부터 미국에서는 한국의 전 국민건강보험제도에 해당하는 건강보험개혁법안(오바마 케어)이 발효됐다. 이를 계기로 의사와 약에 건
강을 맡기지 말고 하루하루 삶의 현장에서 국민들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마을과 생활의 구조를 바꾸자는 운동이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다. 올해 6월 워싱턴포스트(WP)가 주최한 ‘건강 보험을 넘어선 건강’ 포럼이 그런 예다. 포럼은 메트로 실버라인 개통에 맞춰 걷기 좋은 ‘타이슨스 코너 만들기’ 운동을 모범 사례로 소개했다.

타이슨스 코너가 속해 있는 페어팩스 카운티는 2010년부터 2050년까지 40년 동안 ‘그린 웨이’ 프로젝트를 실행하기로 했다. 주민과 쇼핑객들이 타이슨스 코너 인근 지역을 보도나 자전거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장기 계획이다. 쇼핑센터들은 벌써부터 메트로 역에서 매장 건물까지 보도를 만드는 공사를 한창 진행하고 있다. 올해 6월에는 당국과 업체들의 동참을 촉구하는 걷기 대회와 자전거 타기 대회가 시민단체들의 주도로 열렸다.

지난해 파산한 미국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미시간 주)에서는 일군의 시민단체들이 시 정부 소유의 공원을 사들여 시민들이 걷기와 요가 등 운동을 즐길 수 있는 자율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비영리단체인 ‘네트워킹아웃’이 운영하는 ‘런 디스 타운(run this town)’ 프로젝트는 매주 화요일 오후와 토요일 오전을 ‘뉴 해피 아워(The new happy hour)’로 정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참가자들은 사전에 등록할 필요 없이 무료로 함께 뛰기 행사에 참여한다. 이 과정에서 건강도 챙기고 비슷한 직종에 종사하는 동료들과 직업적인 관계를 다질 수도 있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네트워킹아웃의 테런스 톰프슨 회장은 “올 4월 19일 37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한 번에 300∼500명의 시민이 모일 정도로 커졌다”고 성과를 자랑했다. 그는 “첫 9주일 동안 23명이 체중 50파운드(약 23kg)를 뺐고 100명 이상이 15∼50파운드를 감량했다”고 전했다.



미국 내 건강 ‘먹거리’ 관심도 고조

도시민의 건강을 위해서 ‘먹거리’ 관심도 새삼스럽게 고조되고 있다. 햄버거와 피자 등 온통 패스트푸드가 지배해 온 식탁 위에 유기농 야채 혁명을 일으키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로 농지의 상당 부분이 물에 잠긴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 시에서는 수해를 피한 땅에 신선한 채소를 직접 가꿔 먹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진보적인 농장주들은 각급 학교 학생들을 농장원으로 채용했다. 학생들은 작물을 가꾸면서 몸을 움직여 살을 빼고 자신이 가꾼 싱싱한 채소를 섭취하며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이 같은 ‘농업+헬스’ 프로그램은 미국 전역으로 번질 조짐이다.

뉴올리언스 시에서 나고 자란 팀 듀브클렛 씨(20)는 학교가 끝나면 이곳저곳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도심 거리를 배회하고 햄버거와 탄산음료로 배를 채우는 보통 흑인 남자 아이였다. 17세 때 몸무게는 이미 300파운드(약 136kg)를 넘었다. 하지만 3년 전 ‘그로 댓 유스 팜(Grow Dat Youth Farm)’에 취직하고부터는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농장에서 일한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무와 양배추 같은 채소를 가꾼다. 최근에는 직접 가꾼 채소로 요리를 하는 일에 흠뻑 빠져 있다. 그 결과 3년 동안 몸무게 80파운드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 듀브클렛 씨는 “농장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패스트푸드와 소다 음료가 건강에 얼마나 나쁜지 알게 됐다”며 “무엇보다 건강한 삶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농장 주인인 조애나 길리건 씨는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도시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야 했고 이전의 많은 저소득층 주민들이 싱싱한 채소를 접하지 못하고 생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학생 농장을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2011년 11명으로 시작한 학생 농부는 현재 40명으로 늘어난 상태다. 자녀들이 패스트푸드를 끊지 못해 애를 먹었던 학부모들은 “농장에 갈 수 없을 때는 아이와 함께 마트에서 채소를 고르는 시간을 가졌다. 그것만으로도 아이의 관심을 건강으로 돌리고 오랜 패스트푸드 중독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헬스 프로그램이 작은 성공을 거두자 일군의 건축가들은 학교의 구조와 식당을 바꾸는 ‘카페테리아 혁명’을 구상하고 있다. 각급 학교 학생들이 먹고 뛰고 공부하는 학교 건물 구조를 바꿔 어린 시절부터 건강한 삶을 위한 교육 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다. 학교 식당에서 피자와 햄버거 등 패스트푸드를 추방하고 학생들의 학습 동선을 늘리도록 건물 구조를 개조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1976년부터 교육시설 설계에 집중해 온 VMDO 설계사무소가 건설한 버지니아 주 버밍햄 초등학교의 식당은 사방이 넓은 창으로 둘러싸여 학생들이 마치 숲 속에 소풍을 온 것 같은 기분으로 식사를 한다. 학생들은 개방식 주방에서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야채 등으로 짜인 식단 가운데 원하는 음식을 스스로 골라 먹을 수 있다. 디나 소런슨 건축사는 “청소년 비만과 건강의 관점에서 학교 건축물을 재구축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워싱턴=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