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미래는?

"실패한 천재?…내겐 평범한 삶이 평생 과제였다

"실패한 천재?…내겐 평범한 삶이 평생 과제였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IQ 210의 신동' 김웅용 신한대 교수

[ 임기훈 기자 ]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평생의 과제가 될 줄 몰랐습니다.”

경기 의정부에 있는 신한대 연구실에서 27일 만난 ‘천재’ 김웅용 교양학부 교수(51)는 ‘평범한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주말이면 아내와 두 아들이 있는 충북 청주로 내려가 지인들과 맥주 한 잔 마시는 것이 가장 즐겁다는 김 교수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즐겁다”고 말했다.

‘IQ 210의 천재’ 김웅용이 쉰 살을 넘겨 드디어 교수의 꿈을 이뤘다는 보도가 잇따르면서 다시 화제의 인물이 됐다. 하지만 김 교수는 “사람들이 나를 좀 잊고 이제 그만 관심을 거두면 좋겠다”며 “천재 소년이 교수가 되면서 꿈을 이룬 것이 아니라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교수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나치게 비범했던 유년

김 교수는 1963년 건국대 물리학과 교수였던 아버지 김수선 씨(80)와 한양대 등에서 의학 강사로 일한 어머니 유명현 씨(80)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통 아기들과는 달랐다. 생후 8개월께 집에 찾아온 아버지 후배들이 장기를 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장기 말에 쓰인 ‘차’ ‘포’를 읽는 것을 어머니가 발견한 것이다. 생후 11개월째에는 이틀 만에 한글을 깨우치더니 천자문까지 모두 익히고 쓰기까지 했다. 세 살 때는 시를 짓고 영어 독일어 등 4개 국어를 말하는 것은 물론 작문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두뇌가 비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대체 얼마나 머리가 좋은 걸까’하는 생각에 수학을 가르쳐 봤다. 세 살 꼬마는 단순한 셈이 아니라 곧 미·적분 문제까지 풀어내기에 이르렀다.

‘신동’이라고 소문이 나면서 만 네 살이던 그는 한양대 물리학과에서 특별 청강생 자격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김 교수는 “같은 과 학생들이 미팅을 나갈 때 나를 안고 나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신동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그의 천재성은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1967년 일본 후지TV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복을 입은 네 살짜리 꼬마는 일본 대학생들보다 더 빨리 미·적분 문제를 풀어냈다. 일본 언론은 그를 두고 ‘2000년 만에 한번 나오는 두뇌’라고 칭송했다. 당시 일본의 한 전문기관에서 측정한 그의 지능지수(IQ)는 210. 세계 기네스북에도 가장 머리 좋은 사람으로 등재됐다.

하지만 그는 그 시절이 힘겨웠다고 회상했다. 김 교수는 “눈만 뜨면 신문, TV에서 찾아오고 똑같은 말과 계산을 수십번 반복해야만 하는 생활은 네 살짜리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부모도 그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부모는 1970년 여덟 살인 그를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그는 콜로라도주립대 대학원에서 핵·열물리학 석사와 박사 과정을 이수했다. 열 살 때인 1972년에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 연구원으로 뽑혔다. 김 교수는 “아버지가 나를 보호해야 한다면서 유학 간 나라와 학교도 절대 얘기를 안 하셨다더라”며 “그때부터 사람들이 나에 대해 ‘집에 가둬 키운다더라’ ‘바보가 됐다’ ‘정신병원에 갔다더라’ 등 온갖 소문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왕따’였던 외로운 사춘기

그의 부모는 유학을 떠나는 그에게 ‘나라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금의환향할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열 살의 어린아이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NASA 생활은 버거웠다. 컴퓨터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시절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로켓이 대기권을 통과할 때 필요한 연료량과 속도 등을 찾아내는 복잡한 계산이었다. 주어지는 과제만 풀어서 제출하는 일상에 지쳐갔다.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같이 놀아줄 친구도 없었다. 그는 “동료들이 처음에만 어린 나를 신기해했지 나중에는 동료의 한 사람으로만 대할 뿐이었다”며 “보통 나보다 서른 살씩은 더 많았고, 일과시간 뒤에 같이하는 놀이나 운동에 나와 한편이 되면 재미가 없고 운동으로 내기를 해도 내가 끼면 늘 졌기 때문에 절대 끼워주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왕따’라는 말이 생긴 요즘에 와서야 내가 왕따였구나 하고 느낀다”며 “하루종일 혼자였다”고 말했다.

외로움에 지쳐 한국에 있는 부모에게 편지를 쓰면 ‘너는 특별한 아이고 우리는 너의 성공을 기대하고 있다’는 식의 기대에 가득찬 답장이 왔다. 도저히 힘들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춘기가 찾아오자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생각에 1978년 NASA를 나와 귀국했다. 김 교수는 “내가 지쳐서 나온 건데도 사람들은 ‘어떻게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둘 수 있느냐’며 NASA를 그만둔 이유를 믿어주지 않았다”며 “뭔가 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고 그것을 실패라고 규정 짓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실패한 천재’의 굴레

김 교수는 1978년 여름 귀국하면서 KAIST 교수 자리의 문을 두드렸다. NASA 경력으로 어디서든 계속 연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이수했지만 청강생이었을 뿐 학력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김 교수는 “대학 졸업장은커녕 초·중·고교 졸업장도 없으니 나는 학교를 전혀 다니지 않은 사람이었다”며 “결국 검정고시를 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1979년 검정고시를 보는 그에게 다시 관심이 쏟아졌다. 하지만 검정고시도 체력장도 가까스로 통과하자 세상은 그에게 ‘실패한 천재’라는 낙인을 찍었다. 김 교수는 “시험 과목을 배운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시험을 잘 볼 수가 있느냐”며 “하지만 사람들은 머리가 그렇게 좋으면 다 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고 씁쓸해했다. 그는 “나보고 실패했다고 하는 말이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잘 지경이었고 도저히 서울서 살 수 없다는 생각에 가족 모두가 청주로 이사를 했다”고 말했다.

그가 1981년 충북대에 입학하고 이후 충북대에서 토목공학으로 석·박사까지 마치자 세상은 다시금 그에게 ‘실패’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천재가 지방대를 다닐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학시절이 진정 소중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남들이 가진 학창시절의 추억이 하나도 없었고 대학생활을 하면서 그간 몰랐던 것들을 배우고 친구를 사귀면서 행복했다”며 “남들이 평범하다고 하는 것들이 나는 정말 재미있었는데 그걸 왜 실패한 거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그에게 ‘천재’의 삶은 보통사람과는 뭔가 달라야 하지 않냐고 묻자 김 교수는 정색하며 말했다. “사람들은 ‘전지전능’과 천재를 동일한 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천재가 아니다”며 “나는 내가 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설사 진짜 천재라고 하더라도 천재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냐”고 반문했다.

진짜 내 꿈은 연구와 강의

그의 꿈은 두 가지다. 우선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것이다. 김 교수는 졸업 후 계속 대학 문을 두드려왔다. 1993년부터 한밭대 시간강사를 맡으면서 강단에 서기 시작했다. 2007년까지 KAIST 경기대 대전대 등 10여개 대학에서 시간강사나 겸임교수로 일했다. 14년 동안 그가 강의한 과목은 공업영어 공업수학 유체역학 측량학 적산학 구조역학 교량공학 등 30여개에 달한다. 김 교수는 2006년에는 충북개발공사에 입사해 사업처장으로 일하면서 8년간 충북도와 공사가 추진하는 개발사업을 진두지휘했다. 올해 신한대로 자리를 옮겨 공업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학생들을 잘 가르쳐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그의 두 번째 꿈은 연구다. 김 교수는 1988년부터 틈틈이 전공 관련 논문 100여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했다. 그는 지금 천체, 핵물리학 등을 연구하고 있다. 김 교수는 “갇혀서 계산만 반복하던 NASA 연구원 시절보다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면서 친구도 만나고 학생도 가르칠 수 있는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다”며 “주변 사람들을 챙기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IQ 148 이상 천재는 지능지수 상위 2% 이내 전국 2200여명 멘사 가입

천 재들의 모임으로 알려진 멘사는 지능지수 상위 2% 이내(IQ 148 이상)인 사람만 가입할 수 있다. 국제적 조직인 멘사인터내셔널은 1964년 영국에서 창설돼 현재 100여개국에 11만여명의 회원이 속해 있다. 멘사코리아에는 2200여명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멘사코리아가 수시로 실시하는 멘사테스트에서 상위 2% 이내에 속하면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 가입비는 2만원이며 연회비는 5만원이다.

천재 소년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질투, 또래와 달리 앞선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데 따른 외로움 등으로 영재들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김웅용 교수와 비슷하게 천재 소년으로 알려진 송유근 군(16)도 비슷했다. 송군은 일곱 살에 남양주시 심석초교에 6학년으로 입학했으나 ‘조기 졸업은 저학년 입학 후 조기 진급을 통해 해야 한다’는 교육부 주장으로 입학 취소 처분을 받았다. 소송을 통해 입학한 그는 월반을 해 조기 졸업하고 중·고교 졸업 검정고시를 1년 만에 마쳤다. 2005년 여덟 살에 최연소로 인하대 자연과학계열에 입학했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 2008년 자퇴했다. 독학학위제를 통해 학사학위를 받은 송군은 대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UST)에서 항공우주학 석박사 통합과정을 밟으며 현재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송군이 대학을 자퇴한 당시에도 영재교육의 효용성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김웅용 교수는

‘IQ 210의 신동’으로 알려진 김웅용 교수는 1963년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생후 3개월에 ‘엄마 아빠’를 말했고 5개월 때는 걸었으며 한 살 때 천자문을 뗐다고 한다. 한글은 이틀 만에 익혔고 세 살 때는 그의 시와 일기 그림 등을 담아 펴낸 ‘별들에게 물어봐라’ ‘책속에 무엇 있나 글이 있지 글 속엔 무엇 있나 우주가 있다’라는 책도 출간했다.

아들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한 김웅용 교수의 부모는 직접 아들을 가르치다가 1966년 4월 한양중에 청강생으로 보냈고 한양대 물리학과, 건국대 등에서 공부했다. 1970년 미국 유학을 가 항공우주국(NASA) 연구원을 거쳐 1978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의 지능지수는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12년 미국 비영리단체인 ‘슈퍼스칼라(SuperScholar)’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10인’에 뽑혔다. 2006년에는 ‘마르퀴스 후즈 후 인 더 월드’ 등 세계 3대 인명사전에 등재되기도 했다.

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