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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행복한 책읽기

동화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동화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시사IN 윤무영

동화는 읽는 책이 아니다. 읽어주는 책이다. 어른들에게는 그렇다. 자신을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위해 읽어주는 책이다. 그래서 읽고 나서는 자신의 느낌보다 자녀의 반응을 살핀다.

그런데 이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는 사람들이 있다. 동화의 유효기간이 단지 어린이일 때만이 아니라 평생이라는 것이다. 일생일대 중요한 판단을 내릴 때, 혹은 삶의 고비에서 지쳐 있을 때 동화가 길잡이가 되어주고 응원해주며 어린 시절의 감성을 일깨워 삶을 풍부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혼자 조용히 동화를 읽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들에게 동화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를 들어보았다.

첫째, 동화는 치유 기능이 있다. 소문난 독서가로 책 읽기에 대한 책을 여러 권 낸 CBS 정혜윤 PD는 요즘 밤마다 쥘 베른과 로알드 달 그리고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는다. 정 PD가 다시 동화를 손에 잡은 것은 한 야채 가게 아주머니 덕분이었다. 그녀는 동화로 심리치료를 하고 있다고 했다. 동화를 처음 읽었을 때의 감정을 되살려보는 것이다.

"동화책을 읽으면서 우울증을 이겨냈어요. 어려서 아이들에게 읽어주던 것들을 다시 꺼내서 읽기 시작했어요. 어린애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던 엄마의 마음이 다시 찾아오더라고요. 동화책을 읽어줄 때 제 자식 잘못되라고 생각하는 사람 없잖아요. 내가 이러면 안 되잖아 생각하잖아요. 피곤해도 힘내잖아요. 그 마음이 오롯이 살아나더라고요."

둘째, 동화는 현재의 자신을 변호해준다. 고민정 KBS 아나운서는 최근에 <인어 공주>를 읽고 깊은 위안을 얻었다. 인어 공주의 할머니는 높은 계급의 표시로 인어 공주의 꼬리에 커다란 진주조개 장식을 달아준다. 그녀는 아나운서의 화려한 삶을 보여주는 사치품이 인어 공주의 꼬리에 상처를 내면서 다는 조개 장식이라고 생각했다. 시인과 결혼한 자신은 그 조개 장식을 떼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 아나운서는 "벤치에 앉아서 바람의 시원함을 느낄 여유조차 없는 나에게 동화는 한 줄기 바람 같았다. 한 호흡 쉬게 해주고 위로해주는 생명과도 같은 바람이었다"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어서 동화를 읽으면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 또한 어린이일 때와 어른일 때 공감의 포인트가 달라진다. 고 아나운서는 <인어 공주>를 다시 읽으며 <인어 공주>가 '사랑' 말고 '세상'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마녀가 인어 공주에게 꼬리를 버리고 다리를 얻게 해주는 대신 목소리를 가져가는 대목을 어릴 때는 단지 나쁜 마녀가 착한 인어 공주를 괴롭히는 것으로만 해석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어 공주가 세상에 나간 뒤 감내해야 할 외로움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재해석됐다.

셋째, 동화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앤 시리즈> 전집 등 다양한 동화책을 가지고 있는 김진애 전 의원은 동화 마니아다. 공대 재학 시절 800명 가운데 유일한 여학생이었던 김 전 의원은 동화가 진로를 정할 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남들이 하지 않는 선택을 할 때 동화의 주인공들이 나침반이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천방지축 소녀 <빨간머리 앤>을 읽으며 주변 여학생들과 다른 자신의 성향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매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빨간머리 앤>의 앤과 <작은 아씨들>의 둘째 딸 조, 그리고 <캔디 캔디>의 캔디처럼 예쁘지는 않지만 씩씩하고 유쾌하며 자존심 강한 캐릭터들이 남자들과 훨씬 잘 지내는 것을 보고 자신감을 얻었다.

김 전 의원은 대학에 다닐 때, 연애할 때, 아기를 가졌을 때, 아이를 키울 때,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할 때 계속 <앤 시리즈>를 꺼내 읽으며 위안을 얻고 답을 찾았다. 환갑이 넘은 지금도 '앤은 요즘 같은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어떤 세상을 꿈꿀까?' 생각해본다.

넷째, 동화는 근본으로 돌아가게 해준다. 팟캐스트 <빨간 책방>의 허은실 작가는 "삶의 근본적ㆍ철학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에 동화는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답을 준다. 동서양 모두 동화에는 괴물, 유령, 도깨비, 마녀 같은 존재(타자)가 많이 등장하는데 동화는 이런 존재를 타자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어른들이 다른 존재에 대한 상상력을 키우고 더불어 살 수 있는 감성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동화를 읽을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동화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쓰인 글이지만 동화를 쓰는 작가는 삶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짧고 단순하지만 자신이 깨우친 삶의 진리를 담아낸다. 그래서 그 동화에는 자신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

당신이 알고 있던 동화는 '틀렸다'?

다섯째, 동화 다시 읽기는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명사들의 동화 다시 읽기 경험을 모은 <다시 동화를 읽는다면>의 기획자 김선아 에디터(반비출판사)는 "동화 다시 읽기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찾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 미처 알지 못했던 인생의 진실을 깨닫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어른으로 더 잘 살아나갈 힘을 얻는 충전의 과정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EBS FM <어른을 위한 동화>(월~토요일 오전 10~11시)는 동화 다시 읽기의 성지다. 2012년 봄 편성부터 '책 읽어주는 라디오'를 표방한 EBS가 공을 들인 프로그램 중 하나가 바로 <어른을 위한 동화>다. 문영주 PD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화를 실제로는 읽지 않았다거나 발췌본을 읽었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처음부터 낭독을 하면 상당히 새롭게 느끼고 또 다른 감성과 깨달음을 얻는다고들 한다"라고 말했다.

여섯째, 동화는 지금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은 어릴 적 우유와 함께 배달되었던 <플란더스의 개>를 올해 첫 책으로 읽었다. 어릴 적에는 네로와 파트라슈의 우정이라고 읽었던 <플란더스의 개>를 다시 읽으면서 세상을 보았다. '노예의 노예, 하층민들의 개, 수레를 끄는 짐승'으로 평생을 산 파트라슈와, 루벤스의 그림을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던 네로가 여자친구 아버지의 냉대와 마을 사람들의 따돌림 속에 죽어가는 모습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읽었다.

오늘 여기 우리의 처지에서 비판적으로 동화책을 읽어보는 것도 가능하다.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는 <15소년 표류기>를 다시 읽고 책의 내용 가운데 여러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유럽 제국주의에 대한 선망, 노골적인 민족주의, 백인 우월주의, 여성에 대한 배제, 폭력을 당연시하는 내용 등이 버젓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이 '비판적 독서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추천의 대상은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때로는 동심의 편견을 걷어낼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일곱째, 동화 다시 읽기는 영감을 준다.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는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영감을 얻어 <88만원 세대>의 마지막 장을 썼다. 그가 주목한 것은 <크리스마스 캐럴>의 멜서스적 세계관이었다. 가난을 가난한 사람의 탓으로 돌리며 그들의 불행에 대해 '잉여 인구를 줄여준다'고 말하는 스크루지 영감의 세계관과 오늘의 비정규직 문제를 결합시켰다.

또한 동화는 콘텐츠의 경쟁력을 키워준다. <눈의 여왕>을 각색한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크게 흥행한 것처럼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모티브로 한 <말레피센트>도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을 제작했던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동화는 이야기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의 기본형을 만날 수 있다. 권정생 선생의 <강아지똥>을 보면 가장 하찮은 것을 통해 가장 숭고한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의 기본이다"라고 말했다.

어른 책ㆍ아이 책 구분하지 말자

마지막으로, 동화는 건강에 좋다. <어른을 위한 동화>의 문 PD는 "태교에 좋다고 임신부들이 우리 프로그램을 많이 듣는다. 진행자인 배우 김지우씨도 최근에 임신을 했는데 그런 점에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걸 무척 의미 있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세월호 참사로 적잖이 위축되고 우울해하는데, 안정과 위안을 얻는 데 동화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화를 읽으면 대놓고 훈계하고 다그치기보다 비유적으로 유쾌하게 말할 수 있다."

노인에게도 권할 만하다. 글씨가 커서 노인이 보기에도 좋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를 다시 읽는 것이 특히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한다. 치매가 시작되는 사람들은 뇌 해마가 손상되어 장기 기억부터 잃는데 동화가 어릴 적 기억을 복원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제 동화를 다시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보통 도서관은 어른 책과 어린이 책이 나뉘어 꽂혀 있다. 어른들도 자연스럽게 동화를 볼 수 있도록 굳이 어른 책ㆍ아이 책을 나누지 않는 게 낫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동화 수집가이기도 한 이용훈 서울도서관 관장은 "갈수록 꿈과 도전의식을 잃어가는 어른들이 동화나 그림책을 읽고 다시금 새로운 시대를 꿈꾸고 만들어가는 용기를 되찾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도서관은 어린이실과 어른실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어른들도 언제든지 아이들 책을 읽어보고, 아이들과 함께 얘기해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고재열 기자 scoop@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