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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의 이야기

독립 공간 지키고 고립 시간 줄이고

독립 공간 지키고 고립 시간 줄이고


 

ⓒ퍼블리싱 컴퍼니 클 제공 일본 도쿄의 공유 주택 ‘오이즈미가쿠엔’의 입체 도면. 총 13가구의 사람들이 주방과 목욕탕, 옥상 텃밭 등을 공유하면서 살아간다. 함께 살면서 맞닥뜨린 문제는 정기 모임, 밥상 모임 등을 통해 얼굴 맞대고 의논하는 구조가 갖춰져 있다.

지난 3월3일 저녁, 서울 미아동 한 아파트에 개강 첫날을 보낸 대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른 뒤 들어온 학생들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놓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이들은 이내 방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라면을 먹거나, 노트북 작업을 하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드문드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거실 한편에 놓인 칠판에는 청소, 설거지, TV 시청 등에 관해 이들이 정해놓은 규칙들이 적혀 있었다. 공유 주택 '사람앤하우스'의 모습이다.

서울 성산동에는 여느 집과 조금 다른 풍경을 지닌 다세대 주택이 있다. 공용 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키패드가 달린 자신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은 똑같다. 하지만 바깥 일과를 마치고 집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이내 집 밖으로 나온다. 건물 안 계단을 타고 내려가 공용 거실과 주방에서 옆집, 윗집, 아랫집 사람들을 만난다. 어른들은 저녁밥을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은 모래 놀이터와 옥상 텃밭을 누비며 함께 뛰논다. 공동체 하우스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의 풍경이다.

이처럼 '따로 또 같이'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코하우징, 소셜 하우징, 협동 주택, 컬렉티브 하우스, 공동체 하우스, 셰어하우스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공유 주택은 입주 가구의 특성과 운영 방식 등에 따라 그 유형이 다양하다(35~37쪽 상자 기사 참조). 사람앤하우스처럼 싱글들이 모여 사는 곳도 있고 소행주처럼 가족 단위 세대가 주를 이루는 곳도 있다. 단순 임대로 입주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동네사람들(인천시 검암동), 모두들(부천시 역곡동, 38쪽 딸린 기사 참조)처럼 협동조합 방식을 취한 경우도 많다. 충북 영동군 백화마을과 같이 귀촌과 공유 주거 형태를 결합한 곳도 있다.

'방살이'를 넘어 '집살이'로

이렇게 스펙트럼은 다양하지만 공유 주택들은 여타 집과 확실히 구분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개인 공간과 별개로 공동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두고 그곳을 매개 삼아 삶의 일정 부분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공유 공간은 거실이 될 수도 있고 주방이 될 수도 있다. 세탁실을 공유하기도 하고 짐을 쌓아둘 수 있는 창고를 공유하기도 한다. 그런 공유 공간에서 입주민들은 식사, 빨래, 육아, 취미 생활 등을 이웃과 함께한다.

공유 주택의 또 다른 특징은 이런 공유 공간과 생활이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유 주택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고 운영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유 주택에는 함께 살아가는 도중 맞닥뜨린 문제와 새 의제들을 정기 모임, 워크숍, 밥상 모임 등을 통해 얼굴을 맞대고 의논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소행주나 일오집(부산 대연동)처럼 설계 과정에서부터 입주 예정자들이 미리 참여해 공동 거실, 주방, 놀이터, 텃밭 등의 위치와 크기와 매무새를 만들어놓기도 한다. 그렇게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놓은 공용 공간의 활용도와 만족도는 독서실ㆍ키즈카페ㆍ게스트룸 등 건설사가 일방적으로 지어놓은 공용 커뮤니티 공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텅텅 비워놓은 경우가 많은 일반 아파트나 타운하우스 등과는 확연히 비교된다.

타인과 부대끼는 게 싫어 좁고 작은 방 한 칸에 화장실ㆍ주방ㆍ신발장까지 욱여넣은 '풀옵션 원룸'에 들어가고, 옆집 아랫집 이웃과 인사는커녕 전할 용건이 있으면 관리실 인터폰을 통해 간접으로 소통하던 게 도시 사람들이다. 그런데 무엇이 이들을 자신만의 집(방)에서 나가게 만들었을까?

싱글에게 '나만의 방'이란 대개 열악한 환경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 2월 공유 주택 사람앤하우스에 입주한 대학생 이소라씨(21)는 "창문 유무에 따라 방값이 5만원 차이가 나는 고시텔에 살면서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생면부지 이웃의 코 고는 소리가 너무 괴로웠다"라고 말했다. 공유 주택은 타인과 아예 대놓고 공간을 공유하니 고시텔보다 더 불편하지 않을까. 이씨는 "같은 소음이라도 인사를 트고 지내는 사람이 내는 것이라면 훨씬 나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대개의 경우 공유 주택이 상대적으로 비용이 싼 것도 이점이다. 인천 검암동의 공유 주택 '우리동네사람들'에 사는 조정훈씨(35)는 "혼자서 월세ㆍ관리비ㆍ식비 등을 부담하는 것보다 여럿이 나눠 내니 훨씬 비용이 절감된다. 혼자 자취할 때는 주거를 위해 월 65만원가량을 지출했는데, 지금은 주거 환경이 그때보다 더 쾌적한 데다 좋은 이웃을 얻고도 비용이 월 15만원에 그친다"라고 말했다.

아이를 키우는 가족들은 '이웃 없는 팍팍한 삶'이 공유 주택으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 도심에서 아이 둘을 키우는 임정화씨(39)는 아이들에게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마당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이웃을 마련해주고 싶은 마음에 서울 근교의 땅콩 주택도 둘러보고 소행주와 같은 공유 주택도 눈여겨보았다. 임씨는 "우리처럼 친척이 가까이 없이 아이를 키우며 맞벌이를 하는 부부에게는 비슷한 처지의 이웃이 어울려 살며 서로를 돕는 주거 형태가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공유 주택은 그간 공동체 활동의 기반을 닦아온 지역과 사람들에 의해 먼저 확산되고 있다. 마을 안에 공동체 육아, 교육, 식당, 병원 시설 등을 갖추고 네트워크를 만들어온 서울 성미산 마을에서 소행주가 탄생하고 최근 4호점까지 이어진 사례가 대표적이다. '우리동네사람들'도 카페 오공, 귀촌 모임 등을 통해 꾸준히 교류하던 사람들이 발전시킨 또 하나의 공동체이다.

공유 주택을 찾는 또 다른 이유 '층간 소음'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송기운씨는 부모들이 출자금을 내고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공동 육아에 참여하면서 이웃과 나눔의 즐거움을 체험했는데 그 경험이 소행주와 같은 공유 주택을 향한 관심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친분으로만 어울리는 관계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공동 육아를 하면서 이웃이 생기니 도시에서의 각박한 생활이 한결 즐겁고 행복해졌다." '같이 어울려보니 좋더라'는 경험이 함께 사는 데까지 나아가게 만든 것이다.

부동산 가치에 대한 기대가 내려앉은 지금, 나라 경제 차원에서 보면 공유 주택의 확산은 어쩌면 '어두운 미래의 징조'일 수도 있다. 지난 2월19일 1인 가구 공유 주택 '함께주택 1호' 입주자를 모집하기 위한 설명회에 참석한 직장인 조미라씨(31)는 최근 젊은 사람들이 공유 주택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소득이 늘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 집을 살 수 없을 거라는 생각, 결혼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공유 주택은 그 어두운 미래에서 인간다운 주거를 누릴 수 있는 길을 찾는 사람들이 기대를 거는 희망이기도 하다. 소행주 기획 코디네이터 한정운씨는 "소행주와 같은 공유 주택에 관심을 갖고 입주 상담을 해오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많은 부류가 층간 소음으로 이웃 간에 스트레스를 받던 이들이다. 층간 소음으로 인한 갈등의 핵심 원인은 이웃 간에 서로 모르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인데, 이웃이 누군지 알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한 공유 주택에 살면 층간 소음이 있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층간 소음을 해결하기 위해 경찰서에 신고하거나 소음 방지 매트를 까는 대신 내 이웃이 누구인지 아는 데에서부터 실마리를 풀려고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명문 중ㆍ고 학군 신축 30평대 아파트' 따위로 수렴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거 로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변진경 기자 alm242@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