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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할배는 가로수길이 두렵지 않아

꽃할배는 가로수길이 두렵지 않아


노인들을 배척하는 듯한 젊음의 거리에서 패션 사진을 찍자 지나던 사진작가들이 걸음을 멈추고 이 풍경을 담았다.

[한겨레] [매거진 esc] 라이프

젊은층과 노년층의 단절을 뛰어넘기 위한 ‘젠틀맨 되기 프로젝트-헬로, 젠틀?’


1월1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스타가 떴다. 연한 베이지색 재킷을 걸친 한 백발 신사가 젊은이들만 북적이는 가로수길에 나타나자 백성원씨, 알렉스 핀치 등 사진작가들이 그를 보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무심히 지나가던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휴대폰부터 꺼내 이 장면을 담는다.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은 이날의 모델은 연예인도, 연예인 지망생도 아닌 전만수(59)라는 남성이었다. ‘헬로, 젠틀?’이라는 대학생들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주말 가로수길에 나온 참이었다.

‘헬로, 젠틀?’은 서울 사회적 경제 아이디어 대회인 ‘위키 서울’에서 선정된 ‘젠틀맨 되기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이 프로젝트는 평범한 노인을 ‘꽃할배’로 변신시키겠다는 것이다. 서울 은평구 응암동 골목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평범하게 나이 들던 전씨가 프로젝트를 기획한 권정현(26)씨를 우연히 만나 졸지에 ‘꽃할배’가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지난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노숙자의 변신’이라는 동영상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이 동영상의 주인공인 미국의 퇴역 군인 짐 울프는 가난과 알코올중독으로 노숙자가 되었다. 미국의 한 사회단체가 만든 동영상에서 그는 머리 모양과 옷차림을 바꿔 3분 만에 패셔너블한 중년 신사로 변했다. 외모가 바뀌면 내면도 변할 수 있을까? 자신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본 짐 울프는 그 뒤 삶에 대한 희망을 얻고 알코올중독 상담을 받으며 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했다.

 

‘헬로, 젠틀?’ 프로젝트를 기획한 권정현씨(왼쪽)와 전만수씨.

이 동영상에서 힌트를 얻은 권정현씨는 지하철 노약자석, 사회복지관을 돌면서 한국판 짐 울프를 찾아다녔다.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노인들에게 이 프로젝트를 이해시키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집 근처에 백발의 바리스타가 하는 카페가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카페 주인인 전만수 선생님을 찾아가 수줍게 말을 건넸더니 혼쾌히 ‘하자’고 하셨어요.” 권씨의 말이다. 한양대 경제학과에서 강의를 하다가 몇년 전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는 전씨는 “사실 무슨 이야긴지 지금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점점 평범하게 나이 들어가는 길에서 일탈할 수 없을까 꿈만 꾸던 차에 젊은 애들이 내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게 좋았다”고 했다. 한국의 ‘꽃할배 되기’ 프로젝트는 미국 동영상 같은 극적인 외모 변화 대신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십대 젊은이들과 환갑을 바라보는 주인공 사이의 소통에 초점을 맞추었다.

노숙자를 신사로 변신시킨 외국 동영상에 착안

환갑 즈음한 노년층 단장해 가로수길·홍대 앞 촬영해서

패션책자로 만들 예정


우리 사회에서 나이 든다는 것은 공포다. 프로젝트에서 촬영을 맡은 이샘이(23)씨는 “내가 노인이 되면 지금 노인을 보는 시선으로 나를 볼까봐 두렵다. 지하철이나 도심에서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노인들을 보는 시선이 불편하다”고 했다. 권정현씨도 “노인들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보는 것이 싫다. 우리는 노인을 돕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꽃할배 프로젝트’는 홍대 앞과 가로수길에서 촬영한 사진을 패션책자로 만든다. 그들의 대화와 촬영 과정은 동영상으로도 담긴다. 모델 전만수씨의 패션 코드는 ‘나이 없는 패션’이다. 편안한 캐주얼 복장을 주로 하되 나이 들었다고 해서 특별히 가리는 것 없이 젊은 사람들처럼 입는다는 것이다.

가로수길에서 전만수씨는 평범한 베이지 재킷 속에 산뜻한 주황색 스웨터를 입고 양말까지 똑같은 주황색으로 색깔을 맞춰 신었다. 여기에 선글라스까지 걸치고 거리를 걷는 모습을 보고 길거리 사진가들이 셔터를 누른 것이다. 사진작가 백성원씨는 “주말마다 가로수길에서 옷을 잘 차려입은 패션피플들을 찍지만 나이 드신 분이 나온 것도 처음 봤고 자신감 있게 거리를 걷는 모습 자체가 그림”이라고 했다. 권정현씨는 “외국에는 스즈키 하루오, 기노시타 다카히로, 닉 우스터, 브루스 패스크 등 꽃할배 패셔니스타가 굉장히 많다. 2008년 뉴욕의 한 블로거가 ‘어드밴스트 스타일’이라는 노인 패셔니스타만을 모아놓은 패션 블로그를 열자 전 세계에서 방문자가 폭증했다.

‘골목카페’를 운영하다 대학생들의 프로젝트에 참여한 전만수씨.

그런데 우리나라 노인들은 패션에서도 소외계층이다. 젊은이들과 노인의 세계 사이의 경계를 없애고 싶었다”고 했다. 이샘이씨는 “사실 젊은이들은 ‘중후한 매력’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나이 들면 무게 잡는 게 멋있다며 중후한 매력에 집착하는 태도가 싫다. 노인 스스로가 틀 안에 갇히는 듯하다”고 했다.

어르신이거나 스승이거나, 높고 외로운 노인 대신 친근하고 말 걸고 싶은 ‘꽃할배’가 나왔다. ‘꽃할배’라는 말을 낳은 케이블 채널 티브이엔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 나온 배우 신구는 여행길에서 어떤 젊은이들을 만나든 그들에게 “부럽다” “존경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꽃할배들은 권위 대신 지지를 얻는다. 전만수씨는 “경계에 서서 보니 청년과 노인의 생각이 너무 다른데, 무조건 노인이 젊은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처음에 카페를 열었을 때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질러 놓고 가고 시끄럽게 떠들기도 하고 얘네들은 ‘나’만 있지, ‘우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카페에서 공부하고 자기 할 일들 하는 것 보고 알았다. 자기 자유만큼 남의 자유도 존중하는 게 젊은 사람들이다. ‘우리’만 있지 ‘나’가 없는 우리 세대를 생각하고 반성도 했다.”

권정현씨는 “노인들에겐 문화가 부족하다. 젊은 애들 노는 데라고 꺼리지 말고 자꾸 도심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집 아니면 복지관 아니면 공원을 쳇바퀴 돌듯 돌다 보면 노인들의 세계는 외딴섬이 되어버린다”고 했다. 어두운 방 안에 혼자 놓여 있는 노인을 주체로 불러내는 것까지가 프로젝트의 할 일이라면 그다음은 노인의 몫이다. “노인들 자꾸 일탈해봐야 한다. 가르치려고 들지 않고 얘기를 듣고 내 속내도 함께 털어놓으니까 카페 하면서 고등학생, 대학생 친구들을 얻었다. 노티 나게 살고 싶지 않다. 요즘엔 자꾸 웃는다. 좋아서 웃는다.” ‘헬로, 젠틀?’은 패션 사진작가들과 복지관 노인들을 일대일로 연결해 시니어 패션 블로그를 만들 계획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백성원, 이샘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