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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행복한 책읽기

‘낭만 도서관’은 밤에도 쉬지 않는다

‘낭만 도서관’은 밤에도 쉬지 않는다


24시간 불을 밝힌 서울 합정동 북카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한겨레] [매거진 esc] 라이프

심야와 이른 아침에도 애서가들의 책장 넘기는 소리 분주한 홍대 앞 북카페 24시

늦은 밤이면 북카페로 숨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연말 홍대 앞 밤거리는 한없이 들썩이는데 북카페는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더욱 고요해진다. 새벽 2시, 3시… 30명쯤 되는 카페 안 사람들은 밤을 잊은 채 각기 자기 일에 몰두해 있다. 24시간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북카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밤 풍경이다.

홍대 앞 북카페의 시계가 길어졌다. 아침 7시30분이면 서교동과 동교동에 있는 두개의 북카페, 카페 꼼마 1, 2호점이 문을 연다. 동교동 카페 꼼마 2호점 대표 장으뜸씨는 “원래는 출근하는 회사원들에게 테이크아웃 커피를 팔기 위해서 일찍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침 7시부터 6~7명이 항상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 출근하는 회사원보다는 아침 일찍 찾아와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 매출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이른 아침 카페에 앉아 여유있게 책을 읽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낭만적이지 않으냐”고 말했다.

 

아침 7시30분 문을 열어 자정까지 하는 ‘카페 꼼마’.

‘낭만도서관’ 북카페가 늘어나면서 꼬박꼬박 북카페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른 아침 카페 꼼마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이유는 ‘상석’을 잡기 위해서란다. 카페 꼼마 매장 안쪽엔 단을 높여 테이블을 두었는데 오가는 사람에게 부대끼지 않고 창밖 전망이 좋아서 가장 일찍 사람이 차는 자리다. 학교 친구 이형민(26)·남서해(23)씨는 일주일에 두번은 이 자리에 앉아 카페가 문을 닫는 밤 12시까지 공부하거나 책을 읽는다. 이형민씨는 “그림을 전공하는데 밤 11시쯤이면 한창 발동이 걸릴 시점이어서 북카페가 좀더 오래 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220㎡ 정도 넓이의 카페 꼼마 2호점 매장 한쪽에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높은 책장으로 가득 차 있다.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운영하는 이 북카페가 소장한 책은 5000권. 지금껏 출판사에서 낸 책이 8000종쯤이라니 절반이 넘는 책을 여기서 볼 수 있는 셈이다. 책장의 책을 반값에 팔기도 하는 이곳은 애서가들의 천국이다. 인문, 사회과학 서적은 물론 만화책, 어린이책도 많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있었다면 다른 책들 사이에서 묻혀버렸을 책도 애서가들을 만나 한권 한권 꼼꼼히 눈을 탄다. 아침부터 늦은 시간까지 높은 책장에 있는 책을 꺼내기 위해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공부하는 학생들뿐 아니라

퇴근 뒤 카페 출근하는 직장인 많아

새벽 될수록 커피보다

홍대 북카페 중 가장 오래된 ‘작업실’.

레몬차나 자몽차 주문 늘어

맑은 머리로 책 읽거나 일에 몰두


장으뜸씨는 “보통 하루에 300명 넘는 손님들이 찾는데 그중 3분의 1은 책을 읽고, 다른 3분의 1은 공부나 자기 작업을 하고, 나머지는 이야기를 한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라고 했다. 카페 꼼마 주문 현황을 살펴보니 그중 10~20%는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 북카페를 찾는 사람들이다. 오래 머물고 매일 찾는 충성 고객들이 많은 셈이다.

홍대 주차장거리 근처에 있는 북카페 ‘작업실’은 2006년 문을 열었다. 2004년 동교동에 ㈜좋은생각이 ‘잔디와 소나무’ 북카페를 연 것이 홍대 북카페 시작으로 꼽히니 거의 1세대인 셈이다. 방송 예능작가이면서 ‘작업실’ 을 운영하는 김진태씨는 “홍대 부류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에게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을 싫어하는 문화가 있다. 그런 홍대 문화가 프랜차이즈 커피점 대신 개인 카페를, 일률적인 다방 문화 대신 북카페를 번성시켰다”고 말했다. 북카페 단골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러 올 때까지 매일 여기서 공부하던 대학생이 있었다. 매일 담배 한갑씩 피우며 원고를 쓰던 시나리오 작가도 있었다. 주인은 그 손님 얼굴만 보면 제발 오늘은 글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고 기원했단다. 가게 안까지 슬슬 술냄새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 혼자 메모하며 책을 읽는 사람들은 많았다. 공연을 기다리는 인디밴드도 오고 술에 취해 혼자 생각에 잠겼다 가는 사람도 있었다. 주인은 “저 문만 열면 시끌시끌하다. 여긴 소음의 도피처다.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정거장 같은 곳”이라고 했다.

2011년 3월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책다방’과 문학동네의 ‘카페 꼼마 1호점’이 홍대 근처에 문을 열었다. 그 뒤 문학과지성사, 자음과모음, 창비 출판사들이 잇따라 북카페를 열고 유흥에 잠긴 홍대 거리의 도피처가 되었다. 지난해 7월엔 다산북스의 북카페 ‘나나흰’(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 문을 열었다. 출판사가 운영하는 북카페론 6번째다. 주변의 작은 북카페를 합치면 이 근처에만 15곳이 넘는다. 내년에도 대형 출판사 2~3곳이 파주 북카페를 옮겨오거나 새로 열 계획이다.

24시간 불을 밝힌 서울 합정동 북카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일요일 밤 몇시간을 빼곤 나나흰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다산북스 김은영 이사는 “다른 출판사보다 늦게 시작했으니 특색있는 전략이 필요했다”고 24시간 북카페를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이 전략은 밤에 일할 곳을 찾던 프리랜서나 작가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자리가 없어 발길을 돌리는 손님들이 많단다.

새벽 2시, 나나흰에서 북카페 금기를 깨고 옆자리 손님에게 말을 걸었다. 청소년 기관에서 일하는 이정림(가명·38)씨는 내일 중요한 회의가 있어 이곳에서 기획서를 쓰고 있단다. 이씨는 “사무실에서 일하면 다른 일거리도 같이 하게 되니까 진도가 안 나간다. 보통 저녁 6시에 퇴근하고 북카페를 찾아 밀린 일을 하는데 그럼 집중력이 높아지는 느낌이 든다. 카페에서 일하는 것을 사랑하는 나 같은 사람을 스스로 ‘까근족’(카페 근무족)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새벽이 될수록 북카페에선 커피 주문이 뚝 끊기고 레몬차나 자몽차 같은 정신이 번쩍 드는 음료수가 팔린다. 새벽 6시, 밤을 꼬박 새워 그림을 그리던 이유리(34)씨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미술학원을 하는 이씨는 밤 10시에 학원 문을 닫고 여기에 와서 그림책에 실을 그림을 그린다. “집에서 혼자 작업을 하면 새벽엔 공허하고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선 외로움 없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북카페에서 밤을 새우는 이유다. 아침 7시, 날이 훤하게 밝아왔다. 첫 손님이 북카페로 들어온다. 아직도 카페에선 자리에서 외국어 공부, 시험과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카페 꼼마에도 불이 켜질 시간이었다. 북카페 ‘까근족’은 24시간 쉬지 않는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카페 꼼마 제공 공식 SNS [통하니] [트위터] [미투데이] | 구독신청 [한겨레신문]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