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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책·책·책을 묶는다

책·책·책을 묶는다

한겨레21|기사입력 2003-07-16 21:30 |최종수정2003-07-16 21:30
활자 디자이너 이용제씨가 마련한 제본 워크숍…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책을 제본하는 즐거움

학교를 졸업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문구점만 보면 그냥 못 지나치는 어른들이 있다. 자칭타칭 ‘스테이셔너리 마니아’(stationery mania)인데 이들은 새로 나온 최신 디자인의 펜 하나라도 집어들지 않고서는 가게 앞을 그냥 나서는 법이 없다. 액세서리를 비롯해 손으로 만든 수공예 작품이 인기를 끌고 있는 요즘, 수제노트 또한 스테이셔너리 마니아를 유혹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표지를 독특한 질감의 천으로 감싸거나 속지에 작가의 기발하고도 깜찍한 일러스트를 그려넣기도 하고 가죽끈으로 묶어 고급스러움을 살리는 이런 작품(또는 제품)들은 세련된 공업 생산품 속에 끼어서도 개성 있는 빛을 발한다. 하지만 이런 수제노트들은 작은 책이라도 얕봐선 안 된다. 가격을 확인하면 2만원을 훌쩍 넘기기가 예사다. 내가 쓰고 그린 글과 그림을 직접 묶어 책으로 만들어볼 순 없을까?

실과 바늘을 이용한 제본 노하우 전수

7월11일 서울 종로구 팔판동 갤러리 팩토리에서는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실과 바늘을 든 십여명의 남녀가 고개를 숙이고 종이묶음을 ‘꿰매고’ 있다. 앞에는 가위와 칼, 송곳, 자가 한 무더기 펼쳐져 있다. ‘제자’들을 돌아보며 꼼꼼한 지도를 아끼지 않는, 머리가 길고 키 큰 남자가 활자 디자이너 이용제(한글디자인연구소 실장)씨다. 이씨는 자신의 전시기간(‘타이포그라피-한글-책’ 7월27일까지) 중에 제본(북바인딩) 워크숍을 마련했다. 이씨가 지난 3년간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독학으로 연구한, 실과 바늘을 이용한 제본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순간이다.

“우리 모두 정신 치료를 받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한땀한땀 공들이느라 잠시 침묵이 흐르던 갤러리에 웃음이 터졌다. 바늘 땀과 땀 사이에 실이 늘어지면 안 되는데 이것은 금세 느슨해지기 일쑤여서 그러잖아도 신경이 곤두섰던 터다. 뜨개질이나 십자수에 수백, 수천 가지 무늬가 있는 것처럼 북바인딩 방법도 응용하기에 따라 수백 가지 모양이 가능하다. 옛날 한문책처럼 낱장의 종이 안쪽으로 구멍을 뚫고 겉에서 보기에 세로 방향의 긴 줄이 보이도록 묶은 ‘아시아식 제본’이나 가위표 모양을 만들며 앞뒤로 얼기설기 묶은 ‘교차 리본식’ 등 활용 가능한 방법들이 많다. 이씨는 먼저 이런 다양한 제본 모델을 간단하게 보여준 뒤 이날 익힐 콥트식 북바인딩으로 들어갔다.

콥트식 북바인딩은 본래 AD 2세기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원시 기독교도 일파인 콥트교에서 유래한 것이다. 콥트교도들은 지금도 나름의 독특한 공동체와 교회 관습을 유지하면서 이집트 곳곳에 퍼져 살고 있다. 콥트식 북바인딩의 기본은 책의 속지가 낱장이 아니라 한장을 반으로 접어 이 가운데에 구멍을 뚫은 다음 한장씩 실로 엮어 꿰매는 것이다. 겉에서 보면 실의 꼬임이 마치 머리를 땋는 것처럼 사슬고리가 연쇄적으로 이어져 있어 탄탄한 느낌을 준다.

콥트식 제본을 배우는 이 자리엔 이미 북아트 디자이너로 이름난 이나미(스튜디오 바프 디렉터)씨도 함께했다. 예술가의 작품집이나 이미지북, 선물용 책 등 특별한 용도로 책을 만들어온 그이지만 이날처럼 손제본을 해본 적은 없다고 했다. 그는 이 자리를 책 만드는 메커니즘을 익힐 기회로 여기고 회사 사람들을 모두 이끌고 워크숍에 참가했다. “대량생산도 아니고 순수한 작가주의도 아닌 그 중간에 있는 작업을 주로 해왔지요. 물론 이렇게 손으로 제본해서는 한권 만드는 데 2시간 이상은 걸리니까 제품으로 만들긴 어렵지만, 책을 묶어 완성하는 전 과정을 제 손으로 해본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죠.”

“마치 도를 닦듯 한땀한땀 꿰맨다”

워크숍 참가자 중 단체가 아니라 유일하게 혼자 참석했던 배진현(22)씨는 앞으로 미국 뉴욕에서 컴퓨터아트를 공부하길 원한다. 그는 말 없이 앉아 꼼꼼하고 단단하게 책을 묶어냈다. 배씨는 이번에 배운 제본을 이용해 미술대학 입학시험을 위한 포트폴리오를 만들 생각이다. 포트폴리오에 담기는 내용뿐 아니라 포트폴리오 자체의 모양과 느낌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처럼 손수 만들어 완성도를 높임으로써 기성품과는 다른 느낌을 주겠다는 계획이다. “마치 도 닦는 것처럼 어려운 과정이군요.”

전시장에 놓여 있는 이용제씨의 작품 6점들은 한글 디자인을 이용해 책을 만들고 직접 석판화 기법을 이용한 인쇄와 손으로 묶는 제본을 거쳐 하나의 ‘책’으로 완성된 것들이다. 종이만 살 뿐 책 만들기의 나머지 과정는 모두 이씨의 손끝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책의 다양한 형태에만 관심을 둔 것은 아니다. 전시된 여섯권의 책 모두 활자 디자이너로서 이씨가 오랫동안 공부해온 한글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11172>라는 책은 판 하나에 4개의 작은 책을 붙였는데 이 책은 각각 한글의 구조적 특징인 모아쓰기(초성·중성·종성 자리에 놓여 하나의 음절을 형성하는 방법)를 보여준다. 책 한장씩 넘길 때마다 새로운 음절의 조합이 생겨나는 방식이다.

당신도 북아티스트에 도전하세요

이용제씨는 “1930년대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글자는 모두 1만1172개의 조합이 가능한데 이 중 컴퓨터 자판에서 구현하는 것은 2350자에 지나지 않는다. 음가는 있지만 자판에선 쓰지 않는 글자 조합을 만들어보았다”고 설명한다. <액자 속 책>은 뚜껑이 달린 책 안에 손바닥만한 책이 또 한권 자리잡고 있는 작품이다. 직접 디자인한 활자와 그 활자로 만든 이미지, 이야기가 작은 책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계도>는 일상생활에서 쓰이기는 하지만 잘 헷갈리는 친인척의 촌수와 호칭 등을 남·여로 나뉘어 보여주는 ‘실용서’다. 책의 앞면을 펼치면 남자를 중심으로 가계도를 그린 큰 그림이 접혀 있는데 책을 뒤로 한 바퀴 돌리면 여자 중심의 가계도가 나타난다. 납작한 책 속에 담겨진 것은 2차원의 세계가 아니라 3차원 입체다.

갤러리 팩토리 홍보라 대표는 “이번 워크숍엔 우선 10명만 선착순으로 받아보려고 했는데 신청자가 40명이 넘게 몰렸다”며 전시가 끝나는 27일 전에 워크숍을 한 차례 더 열고, 9월 예정인 북아트 전시회를 맞아 한달에 한 차례 꼴로 책 만들기 워크숍을 정례화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www.factory483.org).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