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미래는?

땅끝마을 우체부 딸, 태국·네팔 거쳐 유엔서 뛴다

땅끝마을 우체부 딸, 태국·네팔 거쳐 유엔서 뛴다

 

최선미 UNDP 환경·기후변화 정책 담당관은 “유엔에 대한 막연한 동경 대신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전문성을 갖춰야 성공적으로 유엔에 진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 유엔 본부 앞에 선 최 담당관. /뉴욕=유창재 특파원
화이팅! 글로벌 한국 청년 - 최선미

전남외고 → 한국외대 거쳐 파리정치대서 국제기구 공부

JPO시험 응시 UNEP 3년 근무…아프리카 빈부격차 해결 원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다. 누구는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짐짓 다독였지만 세계 무대에서의 도전과 성취야말로 청춘의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다. 대한민국이란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미국 뉴욕의 유엔 직원과 워싱턴의 국제통화기금(IMF) 직원으로, 일본 오사카의 변호사와 중국 베이징의 무역상으로 드넓은 경쟁 환경에 자신을 던진 한국 청년 4명을 만나봤다.

아버지는 우체국 말단 공무원이었다. 그것도 ‘땅끝마을’ 전남 해남에서다. 주위를 둘러보면 가족을 포함해 모두 가난한 사람들뿐이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해외를 막연히 동경했다. 영어 공부를 시작한 건 영어를 듣고 있으면 이미 해남을 벗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였다. 과외 선생님도, 그 흔한 영어학원도 없었다. 서점에서 구한 유명 어학원의 강의 테이프를 혼자 듣고 또 들었다.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영어로 달달 외울 때까지 읽었다.

처음 해남을 떠난 건 해남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서다. 전남외국어고등학교가 문을 연 나주로 ‘유학’을 떠났다. 1회 입학생이었다. 수재 소리를 들었고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외교관을 꿈꿨고 서울대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운명은 그를 평범한 수재로 놓아두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뇌졸중이었다. 수능을 망쳤고 한국외국어대 프랑스어과 수석입학에 만족해야 했다.

분한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그를 유심히 지켜본 프랑스어과의 한 교수님이 졸업 후 프랑스 유학을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추천했다. 어차피 학비가 비싼 미국 유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프랑스는 등록금이 쌌고 생활비까지 보조해줬다. 그렇게 프랑스의 명문 파리정치대학교(Institut d’Etudes Politiques de Paris)에 입학했다.

최선미 유엔개발계획(UNDP) 환경·기후변화 정책 담당관(34). 미국 뉴욕 유엔 본부 맞은편 UNDP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던 20대 초반까지의 삶은 그저 한국의 입시전쟁과 사회가 강요하는 경쟁심에 밀려 흘러온 인생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다 파리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국제기구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 중에서도 빈곤 퇴치와 개발원조에 대한 수업을 많이 들었죠. 해남 같은 곳에 살면 소외계층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요. ‘TV를 보면 다들 잘 사는데 왜 우리 주변 사람들은 다 이렇게 힘들게 사나. 이런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안고 살게 되죠. 수업을 들으면서 ‘아! 내가 정말로 열정을 갖고 있는 분야를 찾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석사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최소 6개월의 인턴 경험이 필요했다. 프랑스의 플래닛파이낸스라는 소액금융(마이크로파이낸스) 회사에서 9개월 동안 일했다. 남미나 아프리카에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소액금융 지원 사업을 하는 회사였다. 졸업 후에는 유럽연합(EU)집행위원회, 서부아프리카개발은행 등을 상대로 개발 프로그램을 짜주고 조언하는 작은 컨설팅회사에서 일했다. 최 담당관은 “작은 회사였기 때문에 오히려 은행 총재들과 직접 회의를 하는 등 큰일을 할 수 있었다”며 “돈을 받으면서 일을 배운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프랑스에서 4년을 지내다보니 고국이 그리워졌다. 2006년 한국 비정부기구(NGO)에서 일해보자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귀국했다. 운좋게 대통령 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에서 일할 기회를 잡았다. 각국이 짠 지속가능한 발전전략을 서로 평가하는 ‘동료평가(Peer Review)’ 과정에 참여, 국제협력을 조정하는 일을 1년2개월 동안 했다.

경험을 쌓다보니 이제는 국제사회의 중앙무대에 진출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교통상부의 국제기구초급전문가(JPO) 시험에 응시했다. JPO란 각국 정부가 자체 예산으로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에 자국 젊은이들을 최대 2년간 수습직원으로 파견하는 제도다. 그 시험에 합격한 뒤에는 유엔환경계획(UNEP) 근무를 희망했다. ‘친환경 개발을 통한 빈곤퇴치’를 일생의 업으로 삼겠다고 결심한 때문이었다.

“방콕에 있는 UNEP 아시아·태평양지역 사무소에서 3년간 일했어요. 2년의 JPO 과정이 끝나고 1년을 연장했죠. 각국 정부를 상대로 친환경 개발 프로그램을 짜주고 설득하는 일이었어요.”

3년 동안 최 담당관은 아시아 곳곳의 개발 현장을 누볐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차를 타고 여섯 시간을 들어가야 하는 마가마을이라는 곳이 있어요. 주민들에게 ‘길을 만들 때 시멘트로 후딱 짓는 것보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주변의 돌들을 쌓아 만드는 것이 비가 와도 무너지지 않고 좋다’고 설득했죠. 경제적인 비용과 편익을 분석해 숫자로 보여주면 시골 사람들이라도 모두 알아들어요. 친환경적이면서도 노동집약적이어서 경제 개발에 훨씬 도움이 되죠.”

3년이 지나고 그는 유엔에서 가장 큰 개발 관련 조직인 UNDP의 리더십양성프로그램에 지원했다. 경험을 갖춘 젊은 전문가들을 뽑아 유엔의 지도자로 육성하는 프로그램이다. UNDP는 그의 열정과 경험, 전문성을 바로 알아봤다. 그렇게 그는 2011년 1월2일 유엔의 중심인 뉴욕으로 오게 됐다.

“첫 1년은 환경에너지국 국장의 보좌관으로 일했어요. UNDP의 135개국 177개 사무소 일을 꿰뚫어볼 수 있는 기회였죠. 작년부터는 서부아프리카실로 옮겨 환경·기후변화 정책 전문가로 일하고 있어요. 아프리카 국가들이 채광, 원유정제 등 개발에만 몰두하면서 환경을 파괴하고, 또 개발의 과실이 일부 상류층에만 집중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죠.”

최 담당관은 뉴욕에서 일하는 것이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다고 했다. 선망의 대상인 유엔도 결국 조직일 뿐이라는 것.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질문에 그는 “빨리 개발 현장으로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동료 직원들과 인사를 나눌 때면 원어민 뺨치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했다.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다면 물론 언어는 기본이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에 맞는 전문성을 갖추는 게 더 중요해요. 환경, 보건경제, 개발경제 등 수없이 많은 전문 분야가 있지요. 저는 어쩌다가 환경개발 분야에서 일하게 됐지만 전문적으로 이쪽 공부를 하지 않은 게 지금도 후회돼요.”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