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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아직도 학교가 내준 과제로 연구하니?

아직도 학교가 내준 과제로 연구하니?

등록 :2017-09-04 21:35수정 :2017-09-05 11:22

[함께하는 교육] 학생 주도 ‘진짜 배움’ 프로젝트
 

 

지난달 19일 서울 명동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열린 '고등학자' 결과발표회에서 학생들이 연구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진저티프로젝트 제공
중학교 졸업 후 1년 동안 쉬면서 다양한 활동을 해보는 ‘숨쉬는 방학 꽃다운 친구들’(이하 꽃친)의 ‘왕꿈틀이’ 팀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청소년이 원하는 쉼은 무엇일까’를 주제로 연구를 진행했다.

깊이 있는 의견을 듣기 위해 학생 20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먼저 쉼의 정의부터 내렸다. 몸이 일을 멈춘 ‘물리적 쉼’과 몸과 마음이 모두 멈춘 상태인 ‘심리적 쉼’으로 나눴다. “공부 압박감 때문에 쉴 수 없다”, “생각 없이 쉴 때 그 시간이 아깝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순히 뭔가를 안 하는 것보다 ‘마음이 편한’ 쉼이 중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채연양은 “청소년들은 하루 4~5시간 휴식과 충분한 수면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며 “잠시 내려놓는 시간을 억지로라도 갖고, 쉬는 동안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잠깐이나마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는 나름의 결론을 제시했다.

학교·교사 중심 교육과정 벗어나
청소년 목소리 오롯이 담아내는
연구·프로젝트 돕는 창구 생겨
‘부모와의 갈등’ ‘쉼문화’ 등 연구
베트남전쟁 알리는 활동도 기획
주제·과정 직접 짜고, 열린 답 찾아

지난달 19일 서울 명동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열린 '고등학자' 결과발표회에서 학생들이 연구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진저티프로젝트 제공
지난달 19일 서울 명동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열린 '고등학자' 결과발표회에서 학생들이 연구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진저티프로젝트 제공

‘고등학생’ 연구하는 ‘고등학생 학자’

스펙을 위해서가 아닌 학생이 진짜 궁금한 점을 찾아 연구할 수 있도록 돕는 창구가 생겨나고 있다. 학교·교사 중심의 교육과정에서 벗어나 당사자성을 높인다는 뜻에서 청소년의 목소리를 오롯이 담아내려는 시도다.

지난달 19일 서울 명동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열린 ‘고등학자’ 결과발표회도 이 가운데 하나다. 고등학자는 ‘청소년 주도 연구 프로젝트’다. 연구 대상에만 머물러 있던 학생들이 연구 주체가 돼 현장 중심 및 참여자 중심 연구를 하는 것이다. 왕꿈틀이를 포함해 5개 팀 27명의 학생이 6개월간 진행했다.

고등학자는 ‘고등학생을 연구하는 사람’, ‘고등학생인 학자’, ‘고급(high-level) 학자’를 뜻하는 말이다. 이 프로젝트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한다, 위에서 지시하는 ‘수직적’ 연구 체계보다는 누구나 의견을 낼 수 있는 ‘수평적’ 연구 방법을 설계한다, 가설을 미리 정해 검증하는 식의 ‘답정너’가 아닌 ‘열린 답’을 지향한다는 것. 완벽하고 유의미한 연구 결과를 얻는 것보다 학생들에게 스스로 선택하고, 그 과정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게 하자는 의미가 크다.

지난달 26일 경기도 의정부시 몽실학교에서 학생들이 베트남전쟁을 알리는 기념품을 제작하기 위해 논의하고 있다. 최화진 기자
지난달 26일 경기도 의정부시 몽실학교에서 학생들이 베트남전쟁을 알리는 기념품을 제작하기 위해 논의하고 있다. 최화진 기자

이날 발표 연구 주제는 ‘문·이과 학생들이 서로 다른 대우를 받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며, 그들이 원하는 개선책은 무엇일까?’, ‘학생들은 학교에서 진로를 찾을 수 있는가?’ 등이었다. 학생들이 정한 주제인 만큼 그들의 생각과 삶이 녹아 있었다.

양정여고 ‘포스트잇’ 팀은 ‘청소년은 부모님과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를 주제로 연구했다. 온·오프라인 설문조사는 물론 근처 학교를 방문해 의견을 들었다.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학부모, 학생과 각각 수다회를 열고 교육심리학 교수와 좌담회도 진행했다.

이수미양은 “연구 결과 학생 51%가 갈등을 겪는다고 답했고, 그 가운데 37%는 성격 차이를 원인으로 꼽았다. 하루 평균 대화 시간은 1~2시간이며 갈등이 적은 청소년일수록 대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교내에 패널을 설치해 각각 상대에게 했던 상처 되는 말, 상대에게 들었을 때 상처받았던 말, 상대에게 듣고 싶거나 해주고 싶은 말 등을 들은 뒤 카드뉴스와 영상으로 만들어 에스엔에스(SNS)에 올리기도 했다. “서로 대화를 원하지만 자녀는 ‘부모가 딴 곳에서 화난 걸 자신에게 푼다’, 부모는 ‘미워서가 아니라 안타까워서 혼낸다’는 등 오해하는 부분이 있었다. 연구하면서 상대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그들은 ‘나 표현의 대화’(I-Message·나를 주어로 사용해 상대에게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도 제시했다. “너 빨리 숙제 안 하고 뭐 해?”보다 “이따 졸려서 숙제를 마치지 못할까 봐 엄마는 걱정돼”라는 식으로, 상대를 탓하며 화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다.

고등학자를 기획하고 운영한 학습조직 ‘진저티프로젝트’는 출판, 교육, 멘토링 등 분야에서 새로운 흐름을 연구하고 대안을 제안하는 실험을 기획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벤처 기부펀드 씨프로그램과 함께 진행했다. 강진향 매니저는 “이미 국외에서는 청소년 주도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국외 자료와 연구 가이드팁을 정리해 학생들과 세 차례 워크숍을 열었다”며 “연구 주제를 공유하며 피드백을 주고받고 구체적인 방향을 잡아갔다. 학교 교사와 외부 퍼실리테이터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필요할 때만 도움을 줬다”고 했다.

꽃친의 코디네이터 교사를 맡은 이예지씨는 “아이들을 지켜보니 단체 카톡방에서 나가버리거나 서로 머리채 잡고 싶은 순간도 많았을 텐데 끝까지 참고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더라.(웃음) 자신들 스스로 아니다 싶으면 끝까지 토론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찾아가며 예상치 못한 영감을 얻는 걸 봤다”고 했다.

이날 학생들은 연구 결과보다 값진 ‘연구 소감’을 쏟아냈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사명감이 생겼다”, “많은 학생의 목소리를 듣고 널리 퍼뜨리고 싶다”, “낯선 사람에게 설문조사를 부탁하며 보험왕이 된 기분이었다”, “태어나서 제일 많은 생각을 해본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빛났던 순간이었다.”

위잉위잉 팀은 이날 몽실학교 옥상에서 김상현 양봉사와 양봉 벌통 내부검사를 했다. 최화진 기자
위잉위잉 팀은 이날 몽실학교 옥상에서 김상현 양봉사와 양봉 벌통 내부검사를 했다. 최화진 기자

도시양봉 등 ‘원하는 대로’ 프로젝트 학교

지난달 26일 찾아간 몽실학교 옥상에는 도시 양봉 프로젝트를 벌이는 ‘위잉위잉’ 팀이 관리하는 벌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이들은 지난 4월부터 양봉장을 방문하고 전문가 도움을 받아 직접 양봉을 하고 있다.

이두빈(덕현고 2)군은 “양봉은 생명을 다루는 일이다. 꿀벌은 생태계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우리가 쓰는 휴대폰 전자파나 환경오염 때문에 개체 수가 줄어든다는 것을 알고 책임감이 생겼다”고 했다. 꿀벌이 전자파로 인해 길을 잃고 집에 돌아가지 못해 죽는다는 것. 처음에는 꿀벌을 늘리고 꿀벌의 중요함을 알리려고 시작했는데 지금은 직접 재배한 꿀로 물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창업 활동도 계획 중이다.

경기도 의정부시에 자리잡은 ‘몽실학교’는 전국 최초 학생 자치 배움터다. 프로젝트를 기반한 학생 배움을 활성화하기 위해 민간 교육공동체가 경기도교육청 ‘꿈의 학교’와 결합해 교육청 북부청사를 리모델링해 공간을 마련했다. 올해는 교육청과 의정부교육지원청이 예산을 지원해 운영한다. 현재까지 경기도 관내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학생 500여명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날 위잉위잉 팀은 벌통 내부검사를 해 꿀벌 상태나 꿀이 제대로 만들어지는지 확인한 뒤 요구르트, 블루베리 등을 활용해 시제품을 만들어봤다. 이수민(덕현고 2)군은 “처음에 우리끼리 공부하며 무작정 시작했다 중간에 포기할 뻔했다. 알아보니 최소 1년은 공부해야 한다더라. 외부 선생님의 도움으로 차근차근 하다 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박지호(한국도예고 2)군은 ‘시나브로su’(역사를 천천히 알아가자는 뜻)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베트남전쟁을 알리는 캠페인을 한 뒤 의미를 살리면서 소장할 수 있는 기념품을 만들기로 했다. 학생들은 사전에 도자기 컵, 우산, 달력과 다이어리, 배지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 사람들의 의견을 물었다.

박군은 실패하더라도 일단 도자기 컵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학교에서는 프로젝트 수업을 안 하고 교사가 주는 과제에 따라 정해진 활동만 한다. 이곳에서는 학생이 직접 틀을 짜고 모든 걸 결정한다. 길잡이 교사도 팀원처럼 함께 참여한다.”

길잡이 교사는 몽실학교를 거쳐 간 청년부터 현직 교사, 주민 등 20살부터 55살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외부 전문강사 섭외를 돕거나 예산을 짜는 등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부분을 조언하는 역할을 한다.

무학년제로 운영하는 몽실학교에 참여하고 싶은 학생은 원하는 프로젝트 활동 제안서를 쓴 뒤 함께할 팀원을 직접 섭외해야 한다. 최소 5명이 모여야 진행할 수 있으며 올해 40개 팀이 신청해 현재 28개 팀이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경기도교육청 서우철 장학사는 “보통 청소년 관련 기구는 미리 짠 예산에 맞춰 계획을 세워 활동한다. 몽실학교는 모든 과정을 학생이 주체적으로 한다는 게 장점이다. 처음 의도대로 안 돼서 중간에 엎어지거나 최종 몇 팀이 나올지 예상할 순 없지만 자유롭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lotus57@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