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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

실연이 詩로 이끌더니, 투병은 그림으로… 시련없는 詩人은 없지

>“실연이 詩로 이끌더니, 투병은 그림으로… 시련없는 詩人은 없지”


 

나태주 시인이 7일 오후 공주 풀꽃문학관 창가에서 문을 열고 웃고 있다. 부인 김성예 씨가 장난을 치느라 시인의 발아래에서 몸을 웅크린 채 시인의 발을 꼬집은 뒤다. 40여 년을 해로한 노부부는 신혼부부처럼 천진난만했다. 신창섭 기자 bluesky@munhwa.com

나태주시인

2012년 서울 종로구 종로1가 교보문고 빌딩 ‘광화문 글판’에 나태주(71) 시인의 대표작 ‘풀꽃’이 실렸다. 24자로 구성된 3행의 짧은 시. 하지만 사람들은 강렬하면서도 그윽한 여운에 점차 매료됐다. 곱씹을수록 우러나는 맛에 시를 암송하고 SNS를 통해 전파했다. 교보문고는 지난해 글판 25주년을 맞아 가장 기억에 남는 시 구절은 무엇인지 설문조사를 했는데 총 69편 중에 최고로 풀꽃이 뽑혔다. 풀꽃의 주인공 나 시인을 지난 7일 충남 공주 ‘풀꽃문학관’에서 만났다. 풀꽃문학관은 작품에서 이름을 따 2년 전 지은 기념관이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 나 시인의 다양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

◇풀꽃으로 만든 세상

풀꽃문학관이 시인이고 시인이 곧 풀꽃문학관이다. 나 시인은 하루 중 대부분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다. 문학관에서 책을 읽고 시를 쓰고, 손님을 맞이한다. 이날도 나 시인은 교사 시절의 실력을 발휘해 풍금을 연주하며 곡을 붙인 ‘풀꽃’ ‘섬집아기’ 등을 불렀다.

“풀꽃에 많은 작곡가가 곡을 붙였어요. 고마운 일이죠. 저는 이렇게 종종 노래를 불러요.”

문학관에는 풀꽃을 활용한 작품들이 많다. 다양한 크기와 서체로 쓴 풀꽃 액자, 풀꽃 그림과 시를 새겨넣은 병풍, 시 구절이 들어간 컵과 장식품 등…. 전국의 독자 팬들이 보내준 선물이다.

풀꽃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다. 나 시인의 또 다른 시 ‘바다에서 오는 버스’는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돼 있다.

“공주 장기초 교장으로 퇴임하기까지 43년 3개월간 교사로 지냈어요. 하지만 저는 성스러운 교사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교직은 직업이었고, 시가 본업이었다고 말해요. 나쁜 교사는 아니었지만 자랑할 것도 없는 거죠. 대신 그때 시 공부를 많이 했어요. 하루에 한 권씩 시집 읽기를 3년간 한 적도 있어요. 노력한 거죠. 이젠 제 시가 교과서에 실려 있어 감개무량합니다.”

내친김에 시인은 풀꽃문학상도 만들었다. 2014년에 시작해 올해가 3회째다.

“시골에서 시만 쓴 저는 상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상에 관한 안 좋은 인식도 있었고요. 지난달에 받은 공초문학상도 오랜만에 받은 거예요. 쑥스럽죠. 그래서 저는 제가 상을 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강연료 등을 모아서 문학상을 만들었어요. 이런 상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시련이 있어야 성공 있다”

하지만 세상은 늘 풀꽃 같지 않았다. 나 시인에게도 혹독한 시련이 있었다.

첫 번째는 젊은 날 사랑의 실패였다. 1969년 베트남 파병에서 돌아온 후 교직에 들어섰고, 한 여성을 만났다. 나 시인에게 다가온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결국 헤어졌다. 고통과 상심 속에서 나 시인은 시를 썼고, 여기서 나온 작품으로 1971년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제 시 중에 ‘두 여자’란 게 있어요. 연애 실패담을 그대로 옮긴 거예요. 거기엔 시련과 극복이 동시에 있어요. ‘한 여자로부터 버림받고 시인이 됐다/ 한 여자로부터 선택받고 남편이 됐다’ 첫 시련이 저를 시인의 길로 이끈 겁니다.”

두 번째 시련은 훨씬 나중에 더욱 고통스럽게 찾아왔다. 9년 전, 시인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2007년 정년을 앞두고 급성 복막염에 걸렸어요. 쓸개 속에 돌이 자라 터지면서 패혈증까지 갔죠. 의사는 구제불능이라고 진단했어요.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죠. 하지만 저는 스스로 믿고 열심히 치료를 받았어요. 항생제 먹고 치료받고 기도하고…. 그러다가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났어요.”

그때 나 시인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투병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나아가 만족감과 성취감이 점점 커졌다. 어느새 병은 기적처럼 사라졌다.

“그 뒤로 제 시가 또 달라졌어요. 저에 대한 세상의 대우도 변했고요. 저는 지금 남은 것에,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성공이란…자기가 꿈꿨던 그 모습이 되는 것

그렇다면 성공이란 무엇일까. 나 시인은 과거와 현대 시인들의 삶을 비교하며 설명했다.

“과거 시인들은 단명한 사람이 많아요. 무질서한 생활로 불행했던 사람도 많고요. 그러나 현대 시인들은 장수합니다. 그러니 계획을 다시 짜야 합니다. 인생에서 성공이란 자기가 꿈꾸던 모습을 만드는 거예요. 청소년기에 꿈꿨던 모습을 노력해서 노년기에 이루는 겁니다. 그렇다고 거창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바위에 얼굴이 나타나듯’ 서서히 그 열매가 드러납니다.”

누구보다 세속을 초월한 듯한 나 시인은 사실 철저히 현실에 발붙인 작업을 해왔다. 그는 시를 쓰면서 교직을 놓거나 가족 부양을 게을리한 적이 없다.

“저는 한 번도 가정과 직장, 사회와 떨어져서 시를 쓴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비록 ‘한미(寒微)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저의 한계를 알기에 천천히 조금씩 했어요. 사람마다 명(命)·운(運)·기(氣)가 있다고 하죠. 저는 타고난 명·운·기가 안 좋아요. 그러나 제 꿈만큼은 놓지 않았어요. 노년에 자신이 꿈꿨던 모습을 하고 있으면 그게 성공한 겁니다.”

“그런데 모두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대 수준이 높아서 그래요. 너무 성급해요. 제일 개떡 같은 인생이 뭔지 아세요. 넓은 집(아파트)과 화려한 가구가 있고 돈이 풍족하며 시간이 남는 거예요. 말도 안 돼요. 시련 없는 시인이 없듯이, 시련 없는 인생도 불행할 수 있어요.”

그래서 나 시인은 인생에서 일찌감치 꽃을 피우고 성공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신춘문예 출신 작가들이 크게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요. 그만큼의 시련과 결핍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결핍 후에 인생이 보여요. 부모 음덕에 기대면 안 돼요. 요즘 취업 면접에서 아버지 이름, 직업을 노출하는 게 문제가 됐잖아요. 아이들에게 시련 없는 열매를 주는 건 ‘독약’과 같아요. 아이들이 힘들게 공부한다고 안쓰러워할 필요 없어요. 시련을 겪어야 더 단단해집니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에요.”

◇시인은 ‘늙은 아이’…시를 살리는 건 독자다

나 시인은 다작의 작가다. 등단 후 지난 45년간 시집과 산문집 등을 포함해 94권의 책을 냈다. 성실한 글쓰기의 표본이다.

“편운 조병화 선생이 ‘불안해서’ 자주 책을 내셨다고 했는데 저는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해’ 책을 냅니다. 지하철에서도 쓰고, 틈나는 대로 써요. 시인에게 시는 물이자 공기이고 밥입니다. 살아가는 필수요건이죠. 따라서 시인에게 시는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것이어야 해요.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면 안 돼요.”

시인에 대한 철학도 분명했다.

“그래서 시인의 끝은 ‘늙은 아이’입니다. 하드웨어는 노인이지만 소프트웨어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여야 해요. 피카소가 그랬어요. ‘나는 저 아이들처럼 그리기 위해 늙었다’고. 추사 김정희도 자신의 글씨를 ‘교졸(巧拙·교묘하고 졸렬함)의 글씨’라고 했어요. 아이 같았다는 뜻이죠.”

나 시인의 시를 두고 일부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시를 너무 쉽게 쓴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가 있는 것도 잘 알아요. 저 보고 시를 묽게 쓴다고 하고 동어반복이 많다고 하죠. 그러나 뭐 어때요. 저는 시가 오면 거절하지 않는 거예요. 시는 찾아가는 게 아니라 시인을 찾아오게 돼 있어요. 저는 그걸 정리할 뿐이에요. 당연히 많이 쓰게 되죠. 결국 시를 살리는 건 독자예요. 시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가 선택하는 거예요. 시인은 마술사라고 생각해요. 손으로 꽃을 피워내는 마술사. 마술사는 처음엔 종이꽃을 만들지만 차츰 진짜 꽃을 피우게 돼요. 시도 그래요. 시인은 수없이 헛손질을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종이꽃이 나오고 어쩌다 생화도 나오는 겁니다.”

◇“이젠 시와 책에서 해방되고 싶다”

팔순을 바라보는 시인에게 또 다른 꿈이 있을까.

“그동안엔 없다고 했어요. 그저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이젠 바뀌었어요. 시와 책에서 해방되고 싶어요. 더 이상 쓰지 않아도 좋고 책을 내지 않아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즉, 더 많이 쓰고 싶다는 뜻이기도 해요.”

시인은 요즘 빗발치는 강연 요청에 눈코 뜰 새가 없다. 2013년부터 강연 요청을 하나둘 받아들이다가 지난해에는 130회가 넘게 강연했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80∼90회를 한 것 같다. 자꾸 늘어나는 추세다.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절대 거절하지 않습니다. 저처럼 늙고 초라한 시인을 보자고 하니 얼마나 좋아요. 제가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이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라도 줄 수 있는 게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인터뷰 = 김인구 차장(문화부) cl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