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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학교 끝나고 저녁에 놀았다고? 그거 진짜야?"잃어버린 '저녁'을 찾아서

학교 끝나고 저녁에 놀았다고? 그거 진짜야?"잃어버린 '저녁'을 찾아서

16.07.02 15:19l최종 업데이트 16.07.02 15:19l 김찬호(hoho3646)

 한 학생이 밤 늦은 시각까지 학교에 남아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최근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놀란 적이 있다. "학교 끝나고 저녁 때 친구들과 놀러 나가곤 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다시 한 번 친구에게 확인했다.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란다.

단지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놀러 나갔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문장에 놀란 이유는 무엇일까. 나에게는 "학교 끝나고 저녁"이라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시간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야간자율학습을 시작했다. 물론 강요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학원도 다니지 않았고, 집에 있는 것보다야 저녁까지 학교에 있는 게 편하기도 했다. 나와 비슷한 선택을 한 친구는 한 학년 통틀어 10명 남짓이었다. 그 10명이 한 교실에 모여 때로 조용하게 또 때로 시끌벅적하게 공부하곤 했다.

고등학교 때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모든 학생들이 강제로 아홉시 반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90% 이상의 학생이 기숙사에 사는 학교였는데, 기숙사에 사는 학생들은 반드시 11시 반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했다. 예외는 없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나에게 저녁은 없었다. 저녁은 교실과 자습실에 앉아 공부하는 시간일 뿐이었고,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적은 없었다. 그런데 "학교 끝나고 저녁"이라니! 그런 시간이 존재할 수 있었다니!

그러던 차에 포털에서 뉴스 하나를 발견했다.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이 내년부터 경기도내 야간자율학습을 전면 폐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경기도내 야간자율학습 참여율은 20% 정도지만, 아직 강제로 야간자율학습을 시키는 학교가 남아있다는 점을 고려해 강수를 둔 것이다.

이재정 교육감은 야간자율학습을 "비인간적, 비교육적 제도"라고 칭하며, 이를 '예비대학 교육과정'으로 대체하겠다고 밝혔다. 학생들이 인문학, 예술, IT 기술, 기초학문 등을 직접 대학에 찾아가 배울 수 있는 과정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운영 시간을 오후 7~9시로 잡아 장기적으로 야간자율학습을 대체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교육감은 이런 정책을 시도교육감협의회에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9시 등교 정책처럼, 이재정 교육감이 제안한 이번 정책이 전국 시도에 확대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물론 반론도 존재한다. 특히 사교육비 문제가 가장 크게 지적된다. 야간자율학습을 폐지하면 공부를 원하는 학생들은 학원이나 독서실로 가야하고, 결국 사교육비의 인상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저소득층 학생의 경우 타격이 클 것으로 보인다. 2011년에도 경기도교육청은 야자 폐지를 추진했지만, 사교육비 문제가 불거지며 정책을 철회한 바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야간자율학습 폐지에 반론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누군가가 진보의 과정에서 소외된다면, 사회의 힘은 그 진보를 거부하는 방향이 아니라 소외된 이를 돕는 방향으로 작동해야 한다.

야간자율학습 폐지가 사교육비를 올릴 것이라며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야간자율학습이 폐지돼도 학생들이 원하는 대로 공부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 사회가 해야 할 역할이다.

마을 도서관의 확충, 지자체 도서관의 확장, 청소년들이 공부하고 활동할 수 있는 문화공간의 확장까지, 정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단순히 이런 이유만으로 야간자율학습 존치를 논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진보가 누군가를 소외시킬 때 사회가 막아야 하는 건 그 소외다

입시 문제도 제기됐다. 만약 경기도교육청만 야간자율학습을 폐지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야간자율학습을 지속한다면 결국 경기도 지역에서만 성적이 저하될 수 있다는 비판이다. 이렇게 되면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단순히 학생들을 한 교실에 모아 놓고, 시간을 채우기만 하면 성적이 올라가고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가?

이것은 일종의 판타지다. 학생들의 의욕을 끌어내는 '어려운' 방법이 아니라, 그저 강제로 자리에 앉혀 놓는 '쉬운' 방법으로 성적을 얼마든지 올릴 수 있다는 환상이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많은 돈을 벌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소설적인 망상이다.

그래, 만약 그렇다고 치자. 단순히 야간자율학습을 더 오래, 더 많이 시킬수록 성적이 올라간다고 치자. 그래서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얻은 것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그들은 학생들의 저녁과 맞바꿀 정도로 소중한 것인가? 그렇게 해서 얻는 '성공'이란 대체 어디에서의 성공인가.

대학의 이름, 그리고 그 이름에 붙는 순위가 한국 사회에서 많은 의미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름의 뒤에는 무엇이 남는가. 우리가 손에 넣고자 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을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일까.

왠지 2012년 대선 당시 손학규 후보가 외쳤던 공약이 생각난다. "저녁이 있는 삶!" 무얼 얻는다 한들, 우리가 포기한 저녁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것은 교육의 철학에 관한 문제다

우리는 성적표의 숫자로 모든 것이 판가름나는 세상을 가르칠 것인가. 아침부터 밤까지, 저녁도 없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성적은 삶의 전부다. 우리는 성적이 한 사람을 정의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며, 숫자가 떨어질수록 너의 가치도 떨어진다고 가르쳐야 할까.

아니면 세상에는 성적표에 적힌 숫자보다 더 넓은 것이 있음을 가르쳐야 할까. 학생들에게 공부 외의 세상이 생기는 순간, 성적은 삶의 작은 부분이 될 뿐이다.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도 원하는 공부, 원하는 일을 하며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을 가르쳐야 한다. 삶에는 수많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교육은 바로 그 방향을 향해야 한다.

누군가는 앉아서 공부를 하는 것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나가서 뛰어노는 것에서 재미를 찾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음악을 하면서,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재미를 찾을 수 있다. 사람마다 어디에 의미를 두고, 어디에 가치를 두는 지는 다르다.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당연한 이야기'는 그저 교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교육 현장에서 무시당하고 있다. 모든 학생들의 의미와 가치를 무시한 채 앉아서 공부만 하라는 식의 대응은 어느 측면에서 봐도 불합리하다.

물론 학생은 공부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고, 어쨌든 정규적인 교육과정을 밟는 일은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소양을 갖추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국가가 괜히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가며 의무교육을 시행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야간자율학습은 그 '정규적인 교육과정'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야간자율학습이 폐지된다고 교육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 이유는 전혀 없다.

이것은 단순히 '야간자율학습'이라는 제도의 폐지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을 잡아 두고 책상에 앉혀 정해진 시간을 채우는 것이 공부라고 믿는 비합리적 사고의 척결이며, 성적이 전부라고 믿는 왜곡된 교육관의 몰락이다. 학교에 적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공부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억압적 교육의 종말이고, 더 자유로운 교육으로의 전진이다. 저녁을 학교에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의미한다.

나는 대학에 들어왔지만 요즘도 야간자율학습을 한다. 밤까지도 혼자 앉아 이런저런 작업을 하고, 글을 쓰고, 공부를 하는 것이 일상이다. 하지만 이 생활은 고등학교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핵심은 '자율'이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일을 하고, 때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시간을 조정하기도 한다. 피곤한 날에는 일찍 잠들기도 하고,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조금 더 늦게까지 깨어있기도 한다.

모든 학생들이 무엇을 하고 싶든, 얼마나 하고 싶든, 내일 무슨 일이 있든, 오늘 상태가 어떻든 정해진 시간만큼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물 한 모금 마시는 데도, 잠깐 머리를 식히는 데도 감독 선생님의 눈치를 봐야 하는 교실과는 태생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째서, 이런 종류의 야간'자율'학습은 교복을 입은 학생에겐 허용될 수 없는 것일까. 그들이 어리다는 사실, 학생이라는 사실, 앞으로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 이유가 되어줄 수는 없다.

어쨌든 내년부터 경기도에서 야간자율학습은 사라진다. 그런 생각을 해봤다. 미래에 우리가 만날 세대는 '야간자율학습'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자랄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야간자율학습'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학생들은 왜 아무런 의심 없이 그 자리에 앉아있었는지, 그 온갖 비합리를 설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학교 끝나고 저녁 때 무얼 했느냐"는 질문에 고역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 때에도 나름의 낭만이 있었다며 억지로 그 시절을 합리화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런 세상이 온다면, 나는 그간 세상이 겪은 진보의 물결을 생각하며, 그 정도의 고역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 <비더슈탄트, 세상을 읽다>와 팀블로그 <이승로그>에 게재됩니다. 딴지일보 독투불패 게시판에도 올라가며, <이승로그>에 올라간 글은 <직썰>에 중복 게재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