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진로체험학습

예습·복습하며 떠나는 여행은 이제 그만

예습·복습하며 떠나는 여행은 이제 그만

등록 :2016-05-16 20:37

아이가 행복한 여행
 

 

여행전문작가 이동미씨는 “유년기 여행에서 느낀 감정들은 아이들 평생에 걸쳐 ‘감성창고’ 구실을 한다”고 했다. 아이들과의 여행에서 ‘무엇을’ 더 많이 보느냐보다 ‘어떻게’ 느끼고 왔느냐가 중요한 이유다. 사진은 아이들이 자연사한 나무 줄기에서 말 타는 포즈를 취하며 놀고 있는 모습이다. 이동미씨 제공
“내일 어디 간다고?”

“경주.”

“통일신라시대 우리나라 보물이 많이 있는 곳이야. 책에 나오지? 거기 가면 뭐가 있지?”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도 보고 올 거잖아. 다녀와서 보고서도 써야 하니까 입장권 챙기는 거 잊지 말자.”

초등학교 4학년 손아무개군의 엄마 최정혜씨는 요즘 가족여행 준비로 바쁘다. 아이들이 초등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가족여행은 말 그대로 가족들이 모여 놀고 오는 여행이었다. 부담이 없었다. 아이가 고학년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가족여행은 이제 고학년 아들을 위한 ‘공부여행’이 됐다. 최씨는 출발 전, 아들한테 여행지와 관련한 지식을 얼마나 아는지 알아보기 위해 ‘확인형’ 질문을 한다.

최씨는 “아이들 여행 관련 카페도 즐겨찾기를 해두고 정보도 잘 정리해서 여행을 가긴 하는데 매번 부족함을 느낀다”고 했다.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데 매번 놓치고 오는 게 많아서”다.

‘여행도 공부라는데 돈과 시간 들여서 가는 거니까 역사나 사회 공부에 큰 도움이 됐으면….’ 많은 부모들이 최씨처럼 이런 바람을 갖지만 이렇게 눈에 보이는 투자 대비 효과에만 관심을 뒀다간 여행의 의미가 퇴색할 수도 있다. 실제로 손군은 “여행이 재미있긴 한데 엄마가 나중에 ‘너 그때 직접 봤는데 왜 몰라’라고 할까봐 부담이 있다”고 했다.

“돈 주고 가는데, 뭐라도 더 배워 와야”
‘확인형’ 질문하며 부담주는 부모들
숙소부터 이동시간, 체험할 내용 등
‘완벽한 여행’ 강박관념 버려야

여행은 ‘우연한 경험’ 마주하는 공부
게릴라식으로 준비 없이 떠나도 보고
아이 스스로 여정 짜게 기회도 주세요

‘어떻게’에 방점 찍은 여행 해봐요

2. 아이들이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김범우의 집 주변 풍경을 구경하고 있다.
2. 아이들이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김범우의 집 주변 풍경을 구경하고 있다.
여행이 또 하나의 교과목이 된 시대다. 최근 <엄마표 아이 여행>을 펴낸 여행전문작가 이동미씨는 “많은 부모들이 하나라도 더 많이 보고 와야 한다는 정량 논리, 돈 들였으니 그만큼 뽑아야 한다는 본전 심리 등을 품고 아이와 여행을 떠난다.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했다.

“어디 가야 남는 게 많을까요?”

이씨에게 학부모들이 종종 묻는 말이다. 어디를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사실 인터넷만 뒤져보면 다 나온다. 이씨는 “아이들과의 여행에서 ‘어디’(Where)와 ‘무엇’(What)에만 신경을 쓰지 말고 ‘어떻게’(How)를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부모들은 아이가 “경주에 가서 석굴암을 봤는데 그 석굴암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는 지식을 정확히 말할 수 있는지 등을 확인하며 여행의 가치를 따진다. “봤어?” “알겠어?” ‘어디’, ‘무엇’에 집중한 여행에서는 이런 식으로 지식을 얼마나 많이, 잘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반면 ‘어떻게’에 방점을 찍은 여행에서는 아이가 손과 발, 피부로 느낀 경험이 더 중요하다. 이씨는 “내 아이가 그때 어떤 얘기를 했는지, 왜 걷다가 하늘을 봤는지, 어떤 대목에서 호기심을 보이며 눈을 반짝였는지를 살피는 게 ‘어떻게’에 주목한 여행”이라고 설명했다.

고속도로 대신 국도 달려보면 어떨까?

3. 강화 풍물시장에서 아이들이 토끼를 보고 있다.
3. 강화 풍물시장에서 아이들이 토끼를 보고 있다.
“여행 준비는 어떻게 하죠?” ‘어디’와 ‘무엇’에 집중하는 부모들이 많이 던지는 또다른 질문들이다. 이동 방법부터 숙소, 여행지에서의 동선, 보고 체험하고 와야 할 것들, 유명한 맛집, 미리 읽고 가야 할 책과 자료 등을 체크하느라 정신이 없는 부모를 보며 아이는 여행을 ‘준비해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 ‘미리 공부를 해놓고 가야 하는 것’으로 학습하게 된다.

이씨는 “나도 출장으로 여행을 많이 다닌 탓에 늘 150%를 준비하고 갔던 것 같다”며 “그런 여행은 현장에 가서 뭔가 더 경험할 여지가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 가는 길에 시골 버스터미널에서 그 동네 할머니를 만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여백’이 있어야 예상치 못한 사람과 상황을 만나죠. 요즘 엄마들은 준비를 너무 많이 합니다. 숙소 상황도 열 번 더 체크를 하죠. 벌레가 있진 않은지 춥지 않은지 살펴봅니다. 살면서 임기응변, 문제해결력이 필요한 순간이 있잖아요. 덜 준비하고 여행을 떠나야 아이들이 돌발 상황에서 대처하는 법도 배우죠.”

초등 2학년 아들, 돌 갓 지난 딸의 아빠인 연정석(42)씨는 지난해 아들 상빈군과 함께 1박2일로 경주에 다녀왔다. 다른 가족들 같았으면 미리 여러 가지 공부할 내용을 뽑아 숙지하고 갔을 테지만 두 사람의 여행은 아무 계획이 없었다. 차도 안 갖고 갔고, 숙소도 미리 잡지 않았다. “아이들 데리고 오면 리조트로 많이 가시던데….” 아들과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서자 숙소에서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 많이 걸어서 발이 아프긴 했지만 덕분에 아빠와 아들은 평소 못 나누던 대화를 많이 나눴다. 그것 자체가 큰 소득이었다. 연씨는 “평소 바쁘게 살다 보니 아들과 놀아주지 못했단 생각이 들어 아내한테 양해를 구하고 갑자기 떠났다”며 “그 경험이 좋아서 일 년에 한 번씩은 이렇게 부자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했다.

4. 경기도 양평군 보릿고개 마을에서 엄마와 아이가 맷돌을 돌려보고 있다.
4. 경기도 양평군 보릿고개 마을에서 엄마와 아이가 맷돌을 돌려보고 있다.
결혼 전에는 연씨도 다른 사람들처럼 계획하고 떠나는 여행을 했다. 어느 날, 이모부 댁이 “우리 내일 동해나 갈까?” 제안해 불쑥 떠난 여행을 통해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기 기저귀도 없이 추리닝 바람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정석아, 120~130킬로미터로 달려서 동해에 빨리 가면 누가 상이라도 주냐? 쉬엄쉬엄 가다 좋은 거 있으면 보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먹으면 되지.” 연씨가 속도를 내며 달리자 이모부가 하신 말씀이었다. 연씨는 “그 뒤로 아이를 데리고 ‘준비 없이 가는 여행’을 시도했다. 일본 나가사키 여행도 3일 전 예약해서 100만원 조금 넘는 비용으로 다녀왔다”고 했다.

“예전에는 여행이라고 하면 편해야 하고, 맛있는 걸 먹어야 하는 등 모든 걸 충족하는 여행을 생각했는데 그걸 다 충족하기도 힘들고, 그러면 재미도 없잖아요. 운전하며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서 ‘여긴 어디지?’ 하고 다시 길 찾기를 하는 것도 공부죠. 시간이 좀 들겠지만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로 다녀보는 것도 좋죠. 아이한테 생각하지 못했던 풍경을 만나게 해줄 수 있으니까요.”

여행에도 ‘자기주도’ 기회 줍시다

연씨의 아들 상빈군은 지난해 여행을 계기로 여행에 재미와 자신감이 붙어 올해 여행 계획을 스스로 정하고, 추진해보려는 중이다.

아이가 고학년쯤 되면 여행의 열쇠를 아이한테 쥐여주는 것도 좋다. “2박3일 가족여행을 갈 건데 돈은 50만원 쓸 수 있어. 우리 주연이가 큰 틀에서 계획을 좀 짜볼까?” 이런 식의 제안과 함께 “아빠가 좋아할 장소도 하나 넣고, 제철 먹거리도 넣으면 좋겠다”는 등 임무를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를 계기로 아이 스스로 사회, 역사, 경제 공부를 해볼 수도 있다.

여행 때 짐 챙기기는 대체로 엄마 몫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각자 자기 짐 챙기기’를 해보는 것도 자기주도 여행법의 하나다. 이동미씨는 “내 경우는 아이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작은 가방에 여벌 옷 한 벌과 간식, 우유, 기저귀 등을 넣어주어 자기 물건은 자기가 갖고 다니게 했다”며 “더 자라니까 학습지, 소설책 등 아이들 각자 가방에 넣는 물건이 달라졌다”고 했다.

‘유년기 여행’은 평생 살아가는 힘

“여행은 아기 때 많이 다녔으니까 이젠 그만!”

아이 학년이 올라가면서 많은 부모들이 가족여행 횟수를 줄이지만 ‘유년기 여행’은 다른 시기 여행보다 의미가 남다르다. 이동미씨의 딸 임소라(강화여고 2년)양은 “공부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어린 시절 가족들과 가본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멋진 장면 등을 떠올리곤 하는데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나한테 큰 위안을 준다”고 했다. 이씨는 “여행을 통해 몸과 마음으로 만난 것들은 성장해서 글이든, 그림이든, 무엇이든 간에 아이한테 영감을 주기도 하고, 마음을 다독여주는 구실을 한다”고 했다.

“소설 <태백산맥>이 나오고 조정래 작가의 할머니가 많이 놀라셨다고 하더라고요. 소설에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가 생생하게 나오죠. 초등 4~6학년 때 벌교에 잠깐 살았던 건데 어떻게 그곳을 그렇게 잘 기억하고, 사투리까지 생생하게 썼나 놀라셨던 거죠. 유년기에 아이들이 보고 듣고 느낀 건 몸과 마음에 깊숙이 흡수됩니다. 그 느낌과 기억은 평생에 걸쳐 영향을 주는 ‘감성창고’ 구실을 하죠. 아이들 데리고 당장 효율을 따지거나 지식을 확인하는 여행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김청연 <함께하는 교육> 기자 carax3@hanedui.com

참고자료: <엄마표 아이 여행>(지식너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