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따뜻한 삶의 이야기

낭비하지 않는 절박함…시를 닮은 그 여자네 집

낭비하지 않는 절박함…시를 닮은 그 여자네 집

ㆍ시인 조은의 사직동 한옥

벼랑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웃어주고 악수도 벼랑에서 목숨처럼 해다오.

그러면 나는 노루피를 짜서 네 입에 부어줄까 한다.

아, 기적같이

부르고 다니는 발길 속으로

지금은 비가…

-‘지금은 비가…’

조은 시인이 사직동 집 대문 밖을 내다보고 있다. 건넛집에서 샌 수돗물이 빙폭을 이뤘다.

30년 전 이 시를 썼던 그는 아직도 벼랑에서 살고 있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 시인 조은(56)이 17년째 살고 있는 13.75평의 작은 한옥은 대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은 그의 벼랑이다. 한 걸음도 더 뗄 수 없는 절박함, 어떤 여지도 낭비도 없음이 벼랑의 정의라면, 그의 시도 삶도 집도 벼랑이다. 조은의 시어는 단정하고 옹골차다. 화수분처럼 무수한 단어 가운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 골라 쓴다. 산문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글을 쓸 때는 “바위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물까지도 짜내는 심정”이라고 한다.

그의 집도 마찬가지다. 처음 이사올 때부터 재개발을 기다리는 헌 집이었다. 언제 나가야 할지 모르는 전셋집을 살뜰하게 손봐가며 생각보다 굉장히 오래 살았다. 많은 친구들을 떠들썩하게 맞았고, 전화선을 빼놓은 채 몇 달씩 혼자 지내기도 했다. 주인에게 구박받는 강아지 또또와 함께 이사와서 13년 만에 하늘나라로 보냈다. 20권의 책 가운데 16권을 이 집에서 냈다.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1991), <무덤을 맴도는 이유>(1996)였던 시집의 제목은 <따뜻한 흙>(2003)과 <생의 빛살>(2010)로 바뀌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어느 날 시가 내게 찾아왔다’고 했다. 조은에게도 그랬던 것 같다. 우울한 청춘을 보내던 20대 중반의 그에게 언니가 시강좌를 등록해 주었다. 돈을 주면서 등록하라고 하면 아마 안 했을 거란다. 처음 쓴 시가 ‘지금은 비가…’였고, 시의 진가를 알아본 이는 오규원 시인이었다. 그의 추천으로 1988년 계간 ‘세계의 문학’에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 등을 발표하면서 시인이 됐다. 스승인 오규원은 처음에 이 시를 혹평했다. 그러나 등단한 지 3년 만에 민음사에서 나온 첫 시집에는 그의 권유로 이 시를 맨 앞에 실었다. “막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오래 시를 쓴 시인처럼 비약하는 인식이 계속 시를 쓰지 못하게 할까봐”라는 게 혹평의 이유였다.

 

첫 시집에 실렸던 시 ‘지금은 비가…’가 붙어 있는 조은 시인의 방.


그의 삶은 시인으로 정해졌다. 첫 시집이 나온 뒤 가족을 떠나 독립하기로 했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그의 가족은 사람 좋은 아버지와 시골에서 보기 드문 미인이었던 어머니, 셋째 딸인 그를 포함한 2남4녀의 자식들이었다. 아버지가 워낙 다른 사람에게 베풀기를 좋아해 가족들은 종종 경제적 궁지에 몰렸다. 호인인 아버지가 딸에게 어떤 고통을 안기는지 그의 산문집 <벼랑에서 살다>에서 엿볼 수 있다. 열 살 무렵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있었다. 너무 예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지경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여동생이 달려와 강아지가 죽었다고 했다. 놀라고 슬퍼서 그대로 기절했다. 아버지 친구들은 습관처럼 개를 잡아먹었다. 그의 아버지는 보신탕은 입에도 대지 않았으나 친구들에게 어린 딸의 강아지를 넘겨줄 만큼 무심했다.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을 때 집안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독신인 딸을 혼자 내보낸다는 건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끝내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았던 어머니는 작은 방과 살림을 장만해 주었다. 가족들이 살던 태릉으로부터 멀지 않으면서 집값이 싼 곳을 찾다가 선택한 곳이 사직동이었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꺾어 한참 올라가야 하는 언덕배기에서는 길 건너 인왕산의 빼어난 경관이 훤히 보였다.

주인에게 밥과 잠자리를 제공받는 길고양이 두 마리가 찾아왔다.

사직동에서 그의 30대가 시작됐다. “그때까지의 고통은 오롯이 부모 탓이었으나 이후의 고통은 모두 스스로의 책임이 됐다.” 처음 세든 곳은 다세대주택이었다. 10가구나 살았던 만큼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집에 살던 마담은 항상 걸쭉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그를 “어이, 미스 조!”라고 불렀다. 그 마담이 다른 집으로 이사가면서 그 집으로 옮기게 됐는데 자신이 쓰던 도배와 장판 값을 반이라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짐이 들어오기 직전에 도배지와 장판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면 네가 어쩔 건데”라고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웃에 살던 마담은 어리숙해 보이는 시인이 5년 뒤 새로운 집으로 이사갔을 때 그 집에 와 보고는 “도배값과 장판값을 반이라도 꼭 받고 나오라”고 조언했다.

다세대주택에 이은, 사직동의 두 번째 집은 옛날 대감이 살던 집을 쪼갠 개량 한옥이었다. 이 집에서 또또를 만났다. 또또는 주인집에서 기르던 잡종 암캐였다. 선량한 주인집 사람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수시로 개를 때렸다. 영민한 또또는 겁에 질려 사람을 두려워했으며 발정이 나도 짝짓기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상처받고 예민한 짐승을 방에 들여놓고 외출할 때는 데리고 다니게 됐다. 아파서 동물병원에 가도 몸부림이 심해 치료를 받을 수 없고, 정신이 날카로워지면 자신을 돌보는 사람을 물었다. 물고 나서는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또또를 책임지기 위해 자신에게 팔라고 하자 주인은 “같이 키우면 되지”라고 말했다. 주인이 방을 비워달라고 했을 때 자연스럽게 또또와 함께 나왔다. 둘이 만난 지 4년 만이었다. 그렇게 얻은 세 번째 집이 지금까지 살고 있는 작은 한옥이다. 40대로 접어들던 시점이었다. 그때부터 재개발이 결정되면 바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싸게 들어갔던 집은 놀랍게도 17년간 한 번도 전세금이 오르지 않았다. 늘 재개발이 곧 될 것 같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한옥은 자그만 체구의 시인에게 벼랑 위의 삶을 지탱하는 둥지가 돼주었다. 그의 언어와 생활처럼 허실이 하나도 없는 집이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투명한 플라스틱 지붕이 덮인 좁은 마당이 있고 왼쪽은 창고와 부엌, 오른쪽은 욕실 겸 화장실이다. 정면은 세 칸으로 나눠져 침실, 서재, 거실로 쓰인다. 천장은 높고 서까래는 든든하다. 부엌 위로 다락까지 있다. 이 모든 것이 14평이다. 그리고 창을 열면 아랫집 지붕 위로 인왕산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비슷한 크기의 낡은 한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곳을 시인은 ‘노출이 심한 골목’이라고 불렀다. 옆집 꼬마가 “내 수영복! 내 수영복!” 하면 캠프 가기 전날이다. 여름밤에는 이웃집에서 수박 먹는 냄새가 난다. 어느 집 아저씨는 평생 일하지 않고 살았고, 어느 집 밑에는 커다란 바위가 버티고 있어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개조할 수 없고, 어느 집은 투기꾼이 사서 세를 줬다는 사실까지 줄줄이 꿰게 된다. 집을 나서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이웃과 서너번은 인사를 주고받는 골목이다.

한때 이곳은 주인과 친한 문화예술계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시인, 소설가, 화가, 건축가, 기자, 편집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새벽까지 놀다갔다. 왜 그런지는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단박에 알 수 있다. 작은 독채는 어릴 때 소꿉장난을 하던 비밀장소처럼 아늑한 흥분을 준다. 비밀 없는 이웃의 사연은 소설가들을 매혹시켰다. 시내 한가운데 있어서 교통도 편리하다. 무엇보다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아버지를 미워하던 딸이지만 피는 못 속이는지 주인의 인심은 마를 줄 몰랐다. 그렇게 친구들, 또또, 시와 함께 다시 한 세월을 보냈다.



나는 늘 순도 높은 어둠을 그리워했다

어둠을 이기며 스스로 빛나는 것들을 동경했다

겹겹의 흙더미를 뚫는

새싹 같은 언어를 갈망했다//

처음이다, 이런 마음은

슬픔도 외로움도 아픔도 불빛으로

매만지고 얼싸안는

저 무리에서 혼자 떨어져

몸이 옹관처럼 굳어가는 것 같은//

몸이

생의 빛살에 관통당한 것 같은

-‘생의 빛살’ 부분

그는 사직동에 살지 않았더라면 삶이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말한다. 몸은 건강해지고 마음은 성장했다. 골목의 사연과 정서는 시와 산문, 동화로 태어났다. ‘늘 순도 높은 어둠을 그리워했’던 그에게 ‘생의 빛살에 관통당한 것 같은’ 변화가 찾아온 것도 사람들과 부대꼈던 삶 덕분이다.

그가 사는 사직동 한옥은 정말 재개발될 뻔했다. 주변의 엇비슷한 한옥들이 모두 쓸려나간 자리에 고급 아파트가 들어섰다. 재개발을 반대하던 주민들도 하나둘씩 포기한 채 집을 떠났다. 폐가가 늘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곳이 됐다. 그가 떠나지 못한 것은 경제 사정과 함께, 또또 때문이었다. 늘 답답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또또를 데리고 인왕산 산책로를 마르고 닳도록 밟았다.

구박받는 주인집 개와 세입자로 만나 17년을 함께한 또또를 2012년 여름에 안락사시켰다. 아픈 개를 보다 못한 그는 “또또, 우리 오늘 씩씩하게 하자”면서 병원으로 안고 갔다. 이듬해 나온 산문집 <또또>에서 그는 “사람들과 나누는 마음은 여러 이유로 변덕이 잦았지만, 또또만이 고른 마음으로 내 옆에 있었다. 또또는 한 번도 내게 싫증을 내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나의 시시한 면면을 누설하지 않았고, 인간을 통해서는 줄일 수 없었던 내 아픔을 조용히 나눠 가지면서도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또또와 함께 사직동에서 사라질 것 같던 한옥은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서울성곽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지대의 집들은 재개발지구에서 해제하기로 잠정 결정이 내려진 상태다. 또또가 떠난 뒤 적적하면서 홀가분하던 집에 또 다른 손님들이 찾아왔다. 밥을 주던 길고양이들이 개가 사라지자 그의 마당까지 드나든다. 더 이상 생명 있는 것들은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으면서도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에 고양이들이 죽을까봐 마당에 박스를 놓고 전기장판까지 깔았다. 집 사진을 찍을 때 고양이들은 모델이라도 되는 듯 오랫동안 렌즈를 쳐다봤다.


■조은



1960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88년 계간 ‘세계의 문학’에 ‘지금은 비가…’ 등 삶과 죽음을 초월한 시들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림자에서 뿌리의 고요함을 발견해 내는 깊은 시선, 자신과 타인의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용기로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 <무덤을 맴도는 이유> <따뜻한 흙> <생의 빛살> 등 4권의 시집을 비롯해 동화, 산문 등 20권의 책을 냈다.


<글 한윤정 선임기자 yjhan@kyunghyang.com·사진 박기호 사진가 kistone92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