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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행복한 책읽기

베스트셀러인데…이건 책일까 아닐까

베스트셀러인데…이건 책일까 아닐까

[한겨레] 책의 격동기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 컬러링북들이 진열되어 있다.

갈림길에 섰다. 이것은 책일까 아닐까. 읽기 위한 것일까, 소장용인 것일까. 다이어리 같은데 저자와 번역자가 있다. 글자라고는 제목이 다인 색칠공부 책도 있다. 좋은 글을 옮기라고 빈 페이지를 둔 필사 책도 있다. 옛날 방식의 서체와 표기를 써서 가독성을 부러 떨어뜨리기도 한다. 이런 책 같지 않은 책에 대한 독자 반응도 열광적이다. 서점들은 고민에 싸였다. 이것은 책일까 아닐까. 2016년 한국에 책의 격동기가 펼쳐지고 있다.


■ ‘책인지 궁금한 책’, ‘읽기엔 피곤한 책’ <5년 후 나에게 큐앤에이 어 데이(Q&A a day)>(토네이도 출판사)는 365일 매일마다 질문이 인쇄되어 있고, 질문 아래 5년간 자신의 생각을 적는 다이어리 형식이다. 예를 들어 1월31일의 질문은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이고 2월1일의 질문은 ‘내일 무엇을 할 계획인가?’이다. 지난해 11월16일 출간되어 1월 말 8쇄를 찍었다.

<고전필사>(토트)는 <대학> <명심보감> <논어>나 정약용, 정도전, 이덕무, 홍대용의 글귀를 왼쪽 페이지에 넣고 오른쪽에 빈 페이지를 둬 베껴 적도록 하고 있다. <필사의 힘: 헤르만 헤세처럼, 데미안 따라쓰기>(미르북컴퍼니)는 제목 그대로 소설책을 따라 쓰게 만들어졌다. <필사다이어리-북> 고전편과 성경편을 내고 있는 도서출판 숲은 페이지 디자인에 특허를 내기도 했다. 이런저런 형식의 필사 책은 현재 100여종이 발간되었다.

인스타그램 글·글·글 #비밀의정원컬러링북 #스트레스해소 중.....^^;?? 새로 산 캔들도 맘에 들고 해바라기도 맘에 든당 ?? #coloringbook #secretgarden #컬러링북 #비밀의정원 #비밀의정원컬러링북
<2016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에스티앤북스)는 공무원 시험 준비생을 위한 한국사 책이다. 책은 특이하게 우등생의 노트처럼 정리되어 있다. 손글씨, 형광펜과 밑줄 등 ‘손으로 쓴 노트’처럼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2014년 처음 나왔고(2015년판), 지난해 11월 ‘2016년 개정판’을 냈다. 개정판의 변은 이렇다. “2015년판은 ‘내용은 훌륭한데 글씨가 좀 불만이다’라는 지적에 따라서 2016년판은 글씨를 알아보기 쉽도록 더 치밀하게 썼습니다.” 책은 수험서 분야에서 1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소와다리 출판사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는 윤동주의 시집 1955년본을 당시 한자와 표기, 활자를 그대로 살려 제작했다. 활자가 이상하다며 인쇄소에서 인쇄를 멈춘 사연을 품고 있다. 시집은 지난해 12월 넷째 주 예약판매로 인터넷 서점 알라딘 베스트셀러 순위 1위를 차지한 뒤 계속해서 1위를 지키고 있다. 이 책은 1월 넷째 주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에 첫 진입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구매자 중 20대가 37%, 30대가 33%를 차지한다. 주문량이 폭주해 서점에는 ‘일시품절’ 표시가 자주 걸렸다. 출판사는 1월 말 현재 5만권이 팔렸다고 집계했다.

인스타그램 글·글·글 #하늘과바람과별과시 드디어 도착했다 읽고 읽고 또 읽어야지! #윤동주 #하늘과바람과별과시 #하늘과바람과별과詩
교보문고에서 지난해 10월 나온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미술관이 보관하고 있는 책을 본 삼아 그대로 만들고, 해설서를 붙인 세트다. 4개의 침을 박아 엮는 ‘4침 안정법’, 인쇄면이 밖으로 나오게 종이를 접은 뒤 묶은 ‘자루매기’를 그대로 재현했다. 가격은 25만원으로 매겨졌다. 초판 3천부가 거의 소진되었다.

■ 서점의 고민 시작됐다 2014년 어른들의 색칠공부 열풍을 불러일으킨 <비밀의 정원>(클)은 중국 수출 물량을 합쳐 140만권 정도 판매되었다. 한 드라마에서 아이돌 스타가 컬러링북을 사용하는 장면이 나온 뒤 중국 주문 건수가 치솟았다. 같은 책이 중국에서도 출간되었지만 한국에서 나온 책이 종이가 더 좋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중국으로 누적 70만~80만권가량 수출됐다.

인스타그램 글·글·글 #5년후나에게qnaday 일기장 대신에 사용하려고 구매했다. 365일 365개의 질문이 있고 5년간 답을 할 빈칸이 5개가 있다. 예를 들면, 오늘 1월 28일 “최근에 가장 많이 웃었던 적은?” 이란 질문이 쓰여 있으면 그 질문에 2016년 1월 28일, 2017년 1월 28일...2020년 1월 28일에 대답하는 식이다. 단순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보면 나 자신도 몰랐던 날 알게 될 것 같다.?? #일기장 #북스타그램 #베스트셀러
‘컬러링북’ 카테고리에는 현재 597개의 상품이 있다.(알라딘 1월29일 현재 통계) <비밀의 정원>의 성공 뒤 하루 한 권꼴로 나온 셈이다. 컬러링북이라는 카테고리는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박태근 알라딘 엠디는 이를 보기 드문 ‘사건’이라고 말한다. “분류는 보수적으로 관리한다. 카테고리를 한 번 만들고 나면 지속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논의 끝에 분류를 만들었는데, 다른 서점들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었더라.”

컬러링북이 책일까 아닐까의 고민은 ‘상술’에 이용되기도 했다. 한 출판사는 컬러링북을 낸 뒤 반값 마케팅을 했다. 문구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도서정가제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

도서출판 클 박종우 마케팅팀장은 ‘색칠공부’라는 콘셉트를 ‘책’으로 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문구로 나왔으면 전국 유통망을 이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책으로 나왔기 때문에 문구와 같이 결합해서 판매한다든지 하는 아이디어도 풍부하게 나왔다. 문구로 나왔으면 역으로 힘들지 않았을까.”

교보문고는 <5년 후 나에게 큐앤에이 어 데이>를 문구로 분류해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빼고 있다. 교보문고 쪽은 “문구류 중에 인쇄된 다이어리 등이 많다. <5년 후 나에게…>의 경우 책으로 판매하고 있지만 집계에서는 일시적으로 제외하고 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며 논의 중”이라고 고민의 일단을 드러냈다.

인스타그램 글·글·글 #필사 책이니까 나도 필사를~^^ 긴 문장을 다 써도 좋지만 내 맘에 쏙 들어온 문장만 쓰고 여백을 남겨도 좋아요. 펜은 지그 메탈릭펜으로 썼습니다. 끝이 납작하게 되어 있어서 세워서 쓰기도 하고, 눕혀서 쓰기도 하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강약조절을 해요. 실제로 보면 더 예쁜 컬러인데...^^ 뒷면에 살짝 비침은 있지만 괜찮아요~
■ 철저히 디지털인 아날로그 사람들이 이런 책을 찾는 것은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적 감성’에 대한 갈증이 원인으로 보인다. ‘손글씨’에 대한 갈망, 수제 제본에 대한 소구, 옛적 잃어버린 손의 감각을 찾으려는 시도 등이다. 역설적으로 이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중계하는 것은 ‘디지털 감수성’이다. 박종우 클 마케팅팀장은 “지금도 ‘비밀의 정원 컬러링북’으로 에스엔에스를 검색하면 10만건이 검색된다”고 말한다. <5년후 나에게…>를 펴낸 토네이도북스 김지혜 기획실장은 페이스북 타깃 마케팅을 했는데 이 책이 어느 때보다도 효과가 있었다고 말한다. “독자들이 태그로 친구를 불러들이더라. 에스엔에스를 통해 빠르게 퍼졌다.”

문화평론가 박사는 이렇게 진단한다. “시간이 없는데 캘리그래피도 하고 자기계발도 하고 싶은 사람이 필사를 하고, 힐링하면서 성과도 남기고 싶은 사람이 컬러링을 한다. 그 성취감을 부추기는 배경에는 ‘인스타그램’(사진 중심 에스엔에스)이 있다. 여행이나 맛집에 비해 책은 값싸고 효율 좋은 에스엔에스 소재다.” 이명석 문화평론가는 ‘두들링’(이것저것 끄적이는 행위)이 한국인의 일상으로 파고들고 있다고 진단한다. “낙서처럼 끄적이는데 내용적으로 의미가 있으면 자기 발견의 수단이 된다.”

인스타그램 글·글·글 큰맘먹고 지른 #훈민정음해례본 복간본. 25만원이라는 가격에 한 번 긴장했고, 고풍스러운 포장에 한 번 더 떨었다. 569돌 한글날이 갓 지나자마자 받아서 감동이 2배.학창시절 뭣 모르고 외웠던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생각도 나고... #세종대왕 만세, #정의공주 도 만세, #간송미술문화재단 과 #교보문고 도 고맙습니다.
베스트셀러 시장이 취약해진 것도 상대적으로 ‘문구류’ 책들이 두드러진 이유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최근 가장 많이 팔리는 소설책이 몇 만부 수준이다. 전체 시장 규모나 판매량이 축소되면서 조금만 팔려도 상위권에 올라선다”고 말한다. ‘문구의 모험’에 책들이 밀려난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 책의 활로 또는 책의 온난화? “서적 그 자체를 판매하려 하기 때문에 ‘서점의 위기’라는 사태를 불러오게 된 것이다.”(<지적자본론>) 다이칸야마의 쓰타야 서점을 일본 최고의 서점으로 키운 마스다 무네아키가 <지적자본론>에서 펼치는 ‘서점론’은 출판계의 화두다. 마스다는 판매자 중심으로 짜인 서점을 구매자 중심으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서적 자체가 아니라 서적 안에 든 라이프스타일을 판매하는 서점을 만든다”는 것이다. 대만의 청핀서점도 요리책을 요리도구와 함께 파는 등 라이프스타일 서점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교보문고 쪽은 “필사책 옆에 만년필, 컬러링북 옆에 색연필을 팔면 편리할 것”이라며 “이런 큐레이션 개념을 도입한 기획전을 구상하고 있지만 아직은 초기 단계”라고 말한다.

서점의 변화와 함께 책에 대한 개념도 유연해지고 있다. 책의 연성화는 세계적인 추세다. 컬러링북은 프랑스가 선도한 세계적인 유행이고 <5년 후 나에게…>도 미국 자기계발서 시장을 주목하던 기획자가 소개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필사 책이 유행이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책을 텍스트를 읽는 상품이 아니라 보고 느끼는 문화상품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책의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주장도 나온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우선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컬러링북, 필사책, 다이어리책 등 모든 팬시책들을 빼자고 주장한다. “좋은 텍스트를 마련해 교정·교열을 거치고, 미려한 편집을 통해 텍스트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출판이다. 출판이 텍스트와 멀어진다면 이런 기획들은 결국 자충수가 될 것이다.” ‘책 아닌 것’이 출판계를 흔드는, 꼬리가 개를 흔드는 형국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정은숙 사장 역시도 책 만드는 현장의 걱정을 전한다. “분위기라는 게 있다. 팬시화된 책들이 늘어나면 만드는 사람이 책의 가치에 충실하기는 어려워진다. 공기가 바뀌는 것이다.” ‘책의 온난화’가 꾸무럭거리며 출판계를 휘감아오고 있다.

글·사진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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