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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글의 시대를 넘어 말의 시대가 왔다

글의 시대를 넘어 말의 시대가 왔다

ㆍ시네마토크·북콘서트 등 성황… 독자들, 평론가·저자와 대화 원해

지난 12월 22일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 영화관에서는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나오는 시네마토크가 있었다. 일본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상영된 뒤 이동진 평론가의 해설과 이야기를 듣는 행사였다. 이동진 평론가가 등장하자 환호성이 터지고 사진기 플래시가 터졌다. 그는 본격적인 평론이라기보다는 영화를 함께 본 영화 마니아의 수다 같은 이야기를 풀어놨다. 고레에다 감독과 간장게장을 먹은 이야기, 감독이 좋아하는 한국 배우 이야기처럼 지면에는 담기 힘든 얘기들을 들려줬다.

그러고는 신문기자 출신의 평론가답게 영화의 구조에 대해서도 재미있게 풀어냈다. 영화에서는 젊은 세 자매가 사는 집으로 재혼한 아버지가 남긴 이복 여동생이 들어와 산다. 이 여동생이 실은 언니 세 사람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암시가 숨어 있다고 했다. 책임감이 지나치게 강한 것은 첫째 언니, 매실주를 마시고 취해서 속을 털어놓는 것은 둘째 언니, 밥그릇을 들어 밥을 털어넣는 것은 셋째 언니라고 했다. 그러자 관객석에서는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라며 탄성이 튀어나왔다.

 

지난 12월 17일 창비 서교사옥에서 있었던 북콘서트. 왼쪽부터 차병직 변호사, 저자 김영란 전 대법관, 송종원 문학 평론가./창비


미디어 환경 변화 새로운 말과 글 등장
마지막으로 내놓은 영화에 대한 평가도 지면에서와는 다르게 자신의 경험을 담아 마무리했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본 캐나다 할머니 관객이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봤다”며 “전 세계 누가 보아도 공감할 만한 영화”라고 했다. 이 행사는 극장을 운영하는 태광그룹 계열 흥국생명보험이 ‘LIFE IS ART’라는 주제로 양방향 소통을 위해 마련한 고객 초청행사였다. 지난해 예정된 네 차례를 모두 마쳤지만 고객들의 요청에 의해 추가로 마련됐다고 한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지난 12월 17일 창비 서교사옥에서 마련된 북콘서트에 나섰다. 최근 발간된 시민을 위한 법사회 교양서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의 독자들을 위한 행사였다. 대법원 대법정의 법대 위에서나 보이던 유명한 얼굴이 콘서트형 소극장 무대에서 청중들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송종원 문학평론가, 차병직 변호사와 함께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존엄사, 주식회사, 명예훼손 등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책보다는 한결 가벼운 이야기였고, 아늑한 공간에서 비밀을 털어놓듯 이야기를 풀어갔다.

이날 북콘서트에는 여성들이 많았다. 김 전 대법관은 “항상 ‘여성 후배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에 관해 고민하고, 롤 모델이 돼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출신 대학 등 사회적 공통분모를 지닌 60세 전후의 남성 대법관들이 다수였다. 그분들의 생각의 틀을 뛰어넘어 보라고, 좀 더 다양성을 추구하라고 제게 대법관직을 주신 것 같다.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고 일하며 산 삶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는 소수자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에는 차병직 변호사와 함께 농담과 진담의 경계를 넘나들며 법에 대해 유쾌한 이야기들을 선보였다.

행사를 기획한 창비의 이상술 팀장의 설명이다. “북콘서트가 대중화된 것은 벌써 10년 전이다. 저자와의 만남이나 강연 같은 게 없어지면서다. 북콘서트는 이야기하고 대화하면서 독자들과 얼굴을 맞대는 일종의 홍보전략이다. 신문광고나 서평의 영향력이 줄면서 주요한 홍보수단이 됐고, 요새 웬만큼 팔리는 책들은 한 번씩들 하는 행사가 됐다. 따라서 판매에 그렇게 영향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특히 김영란 전 대법관의 경우 인지도가 높아서 책을 다 읽지 않은 사람이나 구입하지 않은 사람도 많이 왔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런 기회를 통해 유명인의 강의를 들으려는 사람도 있는 셈이다.”

신문사, 팟캐스트로 콘텐츠회사 표방
이처럼 요즘 사람들은 말에 반응하고 열광한다. 기본적으로 인쇄업자인 출판사가 북콘서트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영상물을 만드는 영화사에서 평론가와 배우를 불러 시네마토크를 주최한다. 매일 수백 개 기사를 쏟아내는 신문사들은 팟캐스트를 만들어 뿌리면서 종합콘텐츠회사를 표방하고 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도 최근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버는 돈의 60%만 글로 벌 수 있다면 저는 방송을 하나도 안 한다. 그런데 글로 버는 돈은 20%도 안 된다. 이상적으로 따지면 책만 쓰며 살고 싶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했다. 말의 시대에 평론으로만 생활이 가능한 사람은 별로 없다고 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주변은 글자를 읽는 사람들로 차고 넘치지만, 엄격히 따지고 들면 늘어난 것은 기존의 글이 아니라 말이다. 추상과 개념을 동원한 문장이 아니라 감정과 사실을 간단히 적은 말인 셈이다. 생각해 보면 페이스북에 올라와 있는 글들도 대부분은 사실 말을 입력해 넣은 것이다. 그렇다면 문장을 팔던 사람과 회사들이 구어에 뛰어드는 일은 왜 일어날까. 우선은 말과 글이 제로섬 경쟁이 아니라 시너지를 일으킨다는 기대 때문이다. 창비 관계자도 “말의 영역이나 시장이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말이 글의 시장을 축소시키는지 반대로 시너지효과를 일으키는지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다만 독자들이 저자와 대면하기를 원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런 요구를 충족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종호 문화평론가는 말과 글이 각각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말이나 글이나 모두 오래된 것이고 상호보완적인 것이지만 지금은 말의 홍수이고 말의 시대다. 당장 종합편성채널이 생기면서 뉴스의 상당 부분을 말이 잠식했다. 팟캐스트가 활성화되면서 강연이나 인터뷰 등을 풀어 글로 정리해 출판하는 경향도 증가하고 있다. 과거에는 말과 글이 서로 다른 역할을 나누어 맡았지만, 오늘날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기반을 둔 새로운 형태의 말과 글이 등장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말이 번성하는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놨다. “어느 지역 어느 시대이든 글을 이해하는 사람은 소수다. 우리나라도 대학졸업자가 크게 늘었지만 문해력이 과거와 비슷하다. 문장은 줄곧 어려웠던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말이 매체의 발전과 함께 확산하는 것일 수 있다. 한편, 글에 비해 말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견해를 명징하게 밝히는 경향이 있다.”

기원전 6세기, 신화에서 철학으로 넘어가던 시기가 있었다. 서사시·서정시·비극과 같은 운문에서 법조문·아포리즘·수사학의 산문으로 바뀌었다. 말이 시대가 끝나고 글의 시대가 시작되던 세상이었다. 로고스의 반란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말의 시대가 오고 있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