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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행복한 책읽기

“독서는 섹시하다”…올해는 꼭! 결심해보세요

“독서는 섹시하다”…올해는 꼭! 결심해보세요

 


▲ 박수근 <독서>(왼쪽)와 르누아르 <책 읽는 소녀>(오른쪽)

왼쪽은 국민화가 박수근의 <독서>라는 그림입니다. 지난해 박수근 50주기 기념특별전에서 공개된 작품인데요. 그림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소녀는 고 박수근 화백의 장녀 박인숙 씨입니다. 아마도 박수근 화백이 남긴 작품 가운데선 유일하게 책을 읽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가만히 쪼그려 앉아서 작은 책을 고사리손에 쥐고 책을 읽는 모습이 참으로 정겹기 그지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독서를 소재로 한 그림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것이에요.

오른쪽에 있는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의 <책 읽는 소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화가가 그린 다른 작품인데도 책 읽기에 몰입한 모습이 어쩜 그리 닮았는지요. 이렇듯 독서 그림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보편적 정서를 공유하면서 보는 이에게 한없이 평온하고 따뜻한 정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특유의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환기하면서 독서라는 행위의 의미와 가치를 되돌아보게도 해주지요.

주변 분들이 간혹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을 해옵니다. 그럼 저는 이렇게 되묻습니다. ‘읽을 만한 책’이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세요? 1년에 책을 몇 권이나 읽으십니까? 만약 1년에 한 권도 안 읽는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에 도움이 되는 책을 골라 읽는 게 좋습니다. 무턱대고 덤벼들어서는 승산이 없어요.

독서에는 뚜렷한 필요나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책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남들 다 하니까 왠지 나도 읽어야 할 것만 같은 어떤 의무감이나 강박에서 시작하는 독서는 괴롭습니다. 그런 독서는 오히려 책을 멀리하게 만드는 독(毒)이 되기도 하죠. 사실 독서는 습관입니다. 어찌어찌해서 책을 펼쳐 들고 머리말과 목차를 넘어 한 장, 두 장 읽는 데까지는 성공한다 해도 도중에 그만 내가 이걸 왜 꼭 읽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면 지레 덮어버리고 싶어집니다.


▲ 주세페 아르침볼도 <사서>(왼쪽)와 홍경택 <서재>(오른쪽)

책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위 그림들을 한 번 보시죠. 둘 다 책을 소재로 한 작품들입니다. 왼쪽은 과일이나 사물 따위를 이용해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그림으로 유명한 16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himboldo)의 <사서>라는 작품입니다. 신성로마제국 궁정화가로 활약했던 그가 실제로 궁정 도서관 사서를 모델로 완성한 그림으로 여겨지고 있는데요. 아르침볼도의 그림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초현실주의의 대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보세요. 세계 미술사에서 이렇게 책으로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초상화가 또 있을까요. 오른쪽에 있는 작품은 우리나라 작가 홍경택의 <서재>입니다. 아예 책장을 통째로 캔버스 안에 들여놓았습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이 이 그림의 어엿한 주인공들이죠. 이 그림들 속에서 책은 곧 사람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오랜 세월 가다듬고 발전시켜온 지식과 지혜의 총체입니다. 그래서 책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두 그림은 그걸 환기해줍니다.


▲ 조지 클라우센 <등불 옆에서의 독서>(왼쪽)와 에드워드 호퍼 <293호 열차 C칸>(오른쪽)

“마치 내가 한 권의 책이 된 기분이다.” 미술 에세이스트 우지현 씨가 <나를 위로하는 그림>이란 책에서 위의 왼쪽 그림을 두고 한 얘깁니다. 영국의 자연주의 화가 조지 클라우센(George Clausen, 1852~1944)의 <등불 옆에서의 독서>란 작품입니다. 화면에 가득한 어둠 속에서 작은 등불 하나가 책과 여인을 비추고 있습니다. 창문 너머로 비치는 푸르스름한 빛을 보면 새벽에 책을 읽고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책 읽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모두 잠들어 고요한 밤과 새벽입니다. 오로지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그 시간은 오롯이 책 읽는 이를 위한 축복의 시간이죠. 책과 나만 존재하는 시간. 이럴 때 책은 내게 친구가 되어줍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책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일입니다.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이다 보면 책에서 삶의 위안을 얻습니다.

어느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위의 오른쪽 그림은 미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293호 열차 C칸>이란 작품입니다. 열차 안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퍽 쓸쓸해 보입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어둠과 주인공이 입고 있는 검은 옷의 색깔이 스산함을 도드라지게 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고독한 내면을 엿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열차를 타고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저 여인은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삶이라는 여행 속에서 책이 동반자가 되어주고 있다는 점일 겁니다.


▲ 이명기 <초당 독서도>

옛사람들에게 책과 독서가 주는 의미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조선 후기 최고의 초상화가 이명기의 작품입니다. 선비는 책을 읽고, 시동은 차를 달입니다.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책 읽으며 유유자적하는 일보다 더 큰 호사가 또 있을까요. 하지만 옛사람들의 독서 편력은 이 그림처럼 결코 한가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로 무시무시했죠.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의 <책 읽는 소리>에 몇 가지 사례가 나오는데요.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독서광’으로 불리는 김득신의 독서는 세상에나, 정말 어떻게 저랬을까 싶을 만큼 입이 딱 벌어지게 합니다. 책 한 권을 1만 번 이상 읽은 건 차라리 애교에 가까울 지경이지요. 한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백이전(伯夷傳」은 1억 1만 1천 번을 읽었고, 「노자전(老子傳)」은 2만 번, 「분왕(分王)」도 2만 번을 읽었다. 「벽력금(霹靂琴)」은 2만 번, 「제책(齊策)」은 1만 6천 번, 「능허대기(凌虛臺記)」는 2만 5백 번을 읽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심지어 김득신은 읽은 횟수가 만 번이 안 넘는 책은 굳이 기록하지 않았다고까지 적고 있습니다. 정민 교수는 이 대목에서 “게다가 이것이 그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읽은 성독(聲讀)이고 보면 그저 어안이 벙벙해진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뭐 저런 미련한 짓을 했을까 싶겠지만, 옛사람에게 독서는 곧 삶이었습니다. 같은 책을 소리 내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 독서는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존재 이유와도 같았습니다. 그런 분들의 삶에서 독서를 빼고 나면 뭐가 남을까요. 김득신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독서를 통해 무려 쉰아홉 살에 과거에 급제한 인간 승리의 주인공으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행에 가까운 독서는 궁극적으로 땀과 노력의 가치를 되새겨보게 합니다.

그래서 정민 교수의 말이 더 절실하게 와 닿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엉덩이로 한다. 타고난 재능보다 성실한 노력이 값지다. 머리만으로 얻는 것은 한때의 칭찬뿐이다.” 옛사람들의 독서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책 읽는 소녀>(왼쪽)와 프란츠 아이블 <독서하는 처녀>(오른쪽)

책 읽는 모습이 참 아름답죠? 왼쪽은 18세기 프랑스의 로코코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 Honore Fragonard)의 <책 읽는 소녀>라는 유명한 작품이고, 오른쪽은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초상화가 프란츠 아이블(Franz Eybl)의 <독서하는 처녀>입니다. “독서는 섹시하다.”고 했던 영국 작가 재닛 윈터슨의 말이 너무도 딱 들어맞지 않나요?

그런데 이 아름다움 뒤에는 긴 어둠의 터널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독서의 역사를 돌아보면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여성적인 삶의 형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불과 30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죠. 책 읽는 여성들이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도 18세기부터의 일이랍니다. 오랜 세월 동안 책과 독서는 전적으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거죠.

다시 그림을 볼까요. 감상자가 책 읽는 두 여인을 주목해서 보지 않을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둘 다 책 속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독서 삼매경이라 하죠.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책 속에 펼쳐진 세계에 자신을 온전히 파묻는 독서는 그래서 여성의 존재 양식에 정말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 윤덕희 <책 읽는 여인>

그렇다면 우리 옛 그림 중에도 이런 작품이 남아 있을까요? 놀랍게도 있습니다. 엄연한 남녀의 차별이 존재했던 이 땅에서도 조선시대까지 여성의 독서는 규방 안에 꼭꼭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풍속화가 만개한 18세기에 그려진 <책 읽는 여인>이란 제목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남긴 화가는 저 유명한 조선 후기 화가 윤두서의 아들인 윤덕희(尹德熙, 1685~1776)라는 문인화가입니다. 평상에 앉아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고 읽는 모습을 차분하고 따뜻한 필치로 묘사했습니다.

<사람 보는 눈>이란 책에 이 그림을 소개한 미술평론가 손철주 선생이 그림 속 주인공에 대해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했습니다. “독서 캠페인에 홍보대사로 내세워도 손색없을 그녀다.” 여성들이 책을 쓰고 읽는 행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된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뭐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여성들의 독서는 사회적 통념과 편견에 부딪혀가며 자유를 쟁취해간 역사의 산물입니다.

그림 속 여인의 모습을 들여다보세요. 손가락으로 행간을 가리키며 독서에 푹 빠진 모습이 보이지요. 얼마나 책을 읽고 싶었을까 하는 그 간절함마저 그림 밖으로 전해져오는 것만 같습니다. 과거 어떤 이에게는 책 읽기가 비웃음과 모멸을 감수해야 하는, 때론 정신병자 취급까지 받아야 하는 금기였지요. 그럼에도 ‘그녀들’은 끝끝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 뇌 활동 변화 MRI 사진

지난해 우리나라 가구당 도서구매비는 통계를 수집하기 시작한 이후 사상 최저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하향 곡선을 그린 지는 꽤 오래됐는데 반등할 기미는 안 보입니다. 책 읽는 사람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대형 서점에 가면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 버스나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다들 스마트폰에 시선을 빼앗겨 있지요. 책을 안 읽는 겁니다. 안타깝습니다. 책보다 훌륭한 스승은 없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걸 말로만 하면 설득력이 없지요. 위 사진들을 한 번 보실까요.

책을 읽을 때와 비디오게임을 할 때, 만화를 볼 때와 책을 읽을 때 각각 인간의 뇌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MRI로 찍은 겁니다. 2010년 KBS와 NHK가 공동 기획한 특집 다큐멘터리 <읽기 혁명>에서 일본 도호쿠대 가와시마 류타 교수가 실험한 결과인데요. 보십시오. 비디오게임을 하거나 만화책을 볼 때는 뇌에 변화가 별로 없는데, 책을 읽는 뇌는 활동성이 커지면서 훨씬 더 빨간 색깔을 띠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백원근 책과 사회연구소 대표와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독서가 얼마나 생산적인 활동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 김경민 <독서중>

또다시 새해가 밝았습니다. 담배 끊겠다는 결심이 유행하는 시기죠. 그렇다면 올해는 한 권이라도 책을 꼭 읽어보겠다는 결심을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독서가 금연보다 더 실천하기 힘든 다짐은 아닐 겁니다. 몸에 해로운 것에 작별을 고하고, 삶에 밑거름이 되는 벗을 만나는 겁니다.

반전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제5 도살장>의 작가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는 자신의 회고록 <나라 없는 사람>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매체는 책밖에 없다.”고 말이죠. 저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위대한 작가의 이 말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판문화> 12월호에 실린 정여울 작가의 글 한 대목을 빌려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누릴 수 있는 가장 멋진 권리를 저버리는 것이라는 점을.”

■작품 출처
박수근, <독서>, 1950년대, 개인 소장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책 읽는 소녀>, 1890년, 뮤지엄 오브 파인 아츠 휴스턴
주세페 아르침볼도, <사서>, 1566년경, 스톡홀름, 스코클로스터 성
홍경택, <서재>, 2014, 개인 소장
조지 클라우센, <등불 옆에서의 독서>, 1909, 리즈 갤러리
에드워드 호퍼, <293호 열차 C칸>, 1938, IBM사 뉴욕주 아몬크
이명기, <초당독서도>, 18세기 말~19세기 초,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책 읽는 소녀>, 1770년,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프란츠 아이블, <독서하는 처녀>, 1850년, 벨베데레 궁 미술관
윤덕희, <책 읽는 여인>, 18세기, 서울대박물관
김경민, <독서중>, 2015, 개인 소장

■참고한 책들
대한출판문화협회 <출판문화> 2015년 12월호
미야시타 기쿠로 <모티프로 그림을 읽다>(재승출판, 2015)
박수근 50주기 기념특별전 도록 <국민화가 박수근>(서울디자인재단 DDP, 2015)
손철주 <사람 보는 눈>(현암사, 2013)
신성욱 <뇌가 좋은 아이>(마더북스, 2010)
우지현 <나를 위로하는 그림>(책이있는풍경, 2015)
유경희 <치유의 미술관>(아트북스, 2015)
정민 <책 읽는 소리>(마음산책, 2002)
조선화원대전 도록 <화원>(삼성미술관 리움, 2011)

김석기자 (stone21@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