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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행복한 책읽기

한 해의 끝자락에 책장을 펼친다

 한 해의 끝자락에 책장을 펼친다

파주 '지혜의 숲' 서가에서 한 여성이 책을 보고 있다 (파주=연합뉴스) 이진욱 기자.
책, 무엇을 어떻게 읽을까

(서울=연합뉴스) 신재우 기자 = 연말이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준비하는 이 시기는 항상 시끌벅적하다. 호황이면 호황인 대로, 불황이면 불황인 대로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다 보면 온 도시가 시끄러워지기 마련이다.

매일 이어지는 송년회와 폭탄주,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숙취에 괴로워하면서도 우리는 연말을 이렇게 보내는 게 '정석'이라고 믿어왔다. 왠지 모를 불안을 잠재우려고 화려한 네온사인과 비싼 술을 찾는 게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희망으로 가득한 덕담을 위로 삼아 연말을 그렇게 보내고 만다.

좀 달라질 필요는 없을까. 몸과 마음이 어느 때보다 무거운 시기다. 세상은 그대로인 듯이 보이지만 누구나 마음속에서 대변혁을 겪고 있다. 사람들은 불안과 걱정을 극복할 방법을 찾고 있다.

책은 어떨까. 진부하기 짝이 없는 독서 이야기를 연말에 또다시 꺼낸 이유는 독서가 새해를 여는 힘을 기르는 일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무슨 책을 읽고 싶은지,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지금부터 고민해보자.

◇ 독서,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유희

연합뉴스DB
책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문자나 그림의 수단으로 표현된 정신적 소산(所産)을 체계적으로 엮은 물리적 형태'다. 요약하자면 지식을 담은 하나의 물건인데, 물건치고 이토록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배에 가까운 사랑을 받은 것은 없었던 듯하다. 인간 사회가 문명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던 힘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역사적으로 힘 있는 자, 세상을 움직이는 자는 독서를 하는 사람이었다. 세종과 정조, 정약용, 안중근, 카를 마르크스, 레프 톨스토이, 마하트마 간디, 루쉰, 체 게바라, 넬슨 만델라 등이 국가를 경영하고,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싸울 수 있었던 힘은 독서와 무관치 않았다.

책을 읽고 인생을 바꾼 선배들은 오래전부터 책 읽기의 가치를 강조해왔다. 책은 세상을 넓고 새롭게 보는 통찰력을 주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수많은 스승과 타자를 만나게 해준다고 했다.

독서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유희이자, 인간이 삶을 주체적으로 창조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핵심 도구라고 강조했다. 독서의 기쁨을 맛본 이들은 후대 사람이 행여나 책을 멀리할까 걱정하고 또 걱정했다. 인생 최고의 경험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읽은 것의 결과다. 우리가 읽은 그 모든 책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 스며들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법, 느끼는 법, 생각하는 법에 영향을 미친다."(쇼펜하우어)

"책 속에 있는 사람이 지금도 살고 있다면 천리를 불문하고 반드시 찾아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수고도 없이 앉아서 그를 만날 수 있다. 책을 사는데 돈을 많이 쓰지만 먹을 것을 챙겨 그 사람을 찾아가는 먼 여행보다는 훨씬 낫다."(최한기)

"처음 독서할 때는 누구나 힘들다. 이 괴로움을 겪지 않고 편안함만 찾는다면 재주와 능력을 계발하지 못한다. 마음을 단단히 하고 인내하면 열흘 안에 반드시 좋은 소식이 있다. 이렇게 하면 힘들고 어려움은 점점 사라지고 드넓은 독서 세계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홍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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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아가는 한, 그리고 인간이 지적인 욕망을 상실하지 않는 한, 인간은 '책을 더 읽고 싶다', '새로운 책과 더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존재다. 읽고 싶은 책이 계속해서 나타난다는 그 사실 자체가 지적인 인간에게는 살아 있음의 증거다. 그 욕망이 사라진다면 그 사람은 이미 지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다치바나 다카시)

◇ 인간답기 위한 독서, 생존을 위한 독서

우리는 왜 독서를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이유는 선인의 당부에도 책 읽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독서의 효용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지만, 이 시대 성인은 독서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

현실을 숫자로 들여다보면 문제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매년 책 읽기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지만, 성인 10명 중 3명은 일 년 내내 책을 한 권도 보지 않는다. 지하철과 버스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사라지고 너도나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풍경도 이제는 낯설지가 않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표를 보면 성인의 연평균 독서량은 9.2권에 불과하다. 2007년 12.1권을 정점으로 조사할 때마다 독서량은 줄어들고 있다. 성인은 '시간이 없어서', '책 읽는 것이 싫어서', '다른 여가 활동 때문에'라는 이유로 책을 읽지 않는다.

통계청의 생활시간조사에서도 놀랄만한 결과가 나왔다. 성인의 독서시간은 하루 6분이 넘지 않았다. TV 시청 시간 1시간 55분과 비교하면 20분의 1 수준이다. 또 하루 10분 이상 책을 읽는 사람도 10명 중 1명에 그쳤다. 국가별 비교에서도 우리나라의 독서율(1년 동안 책을 1권 이상 읽은 사람의 비율)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저조하다

한국은 문치(文治)의 역사가 오래되고, 문(文)을 숭상하는 문화가 있다. 그래서 국민도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독서가 시민의 삶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문자를 소수 지배층만 소유하는 시대가 아닌데도 이처럼 독서 인구가 적은 현실을 선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2015년 현재 독서를 권장하는 사람들은 독서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강조한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 새로운 직업을 찾기 위해서, 우울함에 빠지지 않고 노년을 보내기 위해서 책을 읽으라는 말이다.

'책 읽는 서울, 책으로 시민의 힘을 키운다'를 모토로 삼고 있는 서울도서관 이용훈 관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시민이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즐겁게 살아갈 힘을 키워 더 나은 삶을 추구하라고 조언한다.

"책을 보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또 다른 생각을 키워내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성인이 될수록 이런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독서를 하지 않으니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지고 상상력이 없어집니다. 닥쳐오는 문제를 해결할 힘도 없어지죠. 책에는 가장 넓은, 가장 깊은 이야기가 있고, 때로는 우주와 상상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민음사 대표에서 물러나 출판과 책에 대한 담론을 개발 중인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독서와 통찰력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독서와 담을 쌓고 사회에 진출하는데 어느 순간 통찰력 부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할 방법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 독서다.

"20대까지는 독서의 필요를 못 느낍니다. 학교 과제가 많고 취업준비에 바쁘죠. 그런데 직장에 가서 승진을 하다 보면 통찰력을 요구받습니다. 이때 많은 이들이 아노미(anomie)에 빠집니다. 어린 시절 책을 읽으면서 기본 지식을 습득하고 자기만의 지식 창조 방법을 익혀야 했는데 대부분 실패하죠. 통찰력 있는 지식은 직접 경험이나 성찰만으로 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깊이 있는 지식은 오직 독서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습니다."

장 대표는 기대 수명이 늘어나 누구나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에서 독서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진다고 말한다. 새로운 길을 떠나기 전에 어른은 누구나 자신의 내면을 채우고 싶은데 독서 외에 똑 부러지는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그는 중·장년기에 내공 쌓기에 소홀하면 '과잉 사회화' 문제에 빠질 위험도 지적한다.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오는데 정신이 채워지지 않으면 물질만 남겠죠. 먹고 사는 문제가 조금 해결된다고 삶의 질이 높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삶이 공허하니 계속해서 사람을 만나려고 할 겁니다. 불안을 이기지 못해서 더 자주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고 페이스북에 가입해 온종일 소셜 관계를 맺으려고 하겠죠. 하지만, 글을 올리면 올릴수록 더 공허해질 게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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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의 생존이 책 읽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안찬수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상임이사는 읽기 문화의 붕괴는 사회를 지탱하는 두 축인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현재의 교육 시스템이 읽기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지성인을 키워내지 못해 시민이 정치적으로 우민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성은 영어로 인터렉트(Intellect)라고 하는데 라틴어 'Intelligere'가 어원이에요. 'Intel'은 '사이·행간', 'Ligere'는 '연결한다'를 뜻합니다. 즉, 지성은 행간 읽기입니다. 지식인은 지식과 지식의 간극을 메우고 그 속 불균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사회는 이런 지식인을 필요로 하는데 독서를 하지 않아 지성의 힘이 점점 약화되면 미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책 읽기가 노령화 사회를 준비하는 유일한 대안이라고도 강조했다. 경제 인구가 줄어드는 엄혹한 현실에서 젊은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고 사회 변화에 맞춰 여러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독서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인구와 경제가 저성장 하는 시대입니다. 현재 청년이 평균 6번 정도 직업을 바꿀 거라고 하는데요. 지금과 같은 읽기 문화에서는 개인이 살아남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유럽에서는 일자리를 바꿀 때 급여를 주지만 한국은 개인이 악전고투해서 일자리를 바꾸어야 하는 사회입니다. 읽으면서 자기를 계발하고 과제를 풀기 위해 또 읽고 취재하고 답사하는 과정 없이는 창조경제도 불가능할 겁니다.”

withwit@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