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여유

찰칵! 속도를 지우고, 고요를 담다

찰칵! 속도를 지우고, 고요를 담다


 

로하스길의 버드나무 군락지는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명소다. 바람이 없고 잔잔한 날 버드나무가 비친 금강의 모습은 신비롭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곳은 청송 주산지와 비견된다.

ㆍ사진가들이 많이 찾는 대청오백리길 로하스길·추동 가래울

이번엔 사진 여행지이다. 코스는 대전 대청호변의 대청오백리길. 이 중 사진 찍기 좋은 곳은 21코스 로하스길과 4코스 추동 가래울이다. 거기서 삼각대를 받쳐놓고 사진 찍는 사진가들도 많이 봤다. 대전마케팅공사 이상철씨는 사진가들이 많이 찾는 코스라고 했다. 사실 카메라는 세상을 다시 보게 해주는 도구다.

■ 로하스길

로하스길 사진 포인트는 경북 청송 주산지를 닮았다. 물에 밑동이 잠긴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반영이 아름다운 그 주산지 말이다. 로하스길도 비슷하다. 물에 잠긴 나무는 더 많다. 얼추 십수그루 된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5~6월에는 사진가들이 특히 많이 몰린다. 안개, 호수, 나무가 어우러진 풍광이 신비롭기 때문이다. 길가에는 문화부와 관광공사가 선정한 ‘사진 찍기 좋은 명소’란 표지도 붙어 있다.

왜 사람들은 이런 풍광을 좋아할까. 나는 로하스길의 풍광이 ‘고요와 정적’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초스피드의 시대다. 시간에도 가속도가 붙어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 불과 두 달 전까지 삼성의 스마트폰 모델 갤럭시S1을 썼다. 지금 ‘구석기 유물’ 취급을 받는 이 모델은 불과 5년 전에 출시됐다. 이런 사회에선 가만있으면 사람조차 낡는다. 사람들은 성급해졌다. 나와 너의 거리도 좁혀졌다. 지구 건너편에서 벌어진 일도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란 단어에도 등급과 차별이 생겼다. ‘리얼타임’이란 말이 그 증거다. 이 단어는 ‘지체’를 용납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1분이라도 지체된 시간은 ‘리얼’하지 않다고 규정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실시간 응답하라고 재촉한다. 이런 초스피드 세계, 아니 스피드를 재는 것이 무의미해진 세계에서 온 사람들에게 로하스길의 고요와 정적은 ‘포즈(pause)’ 버튼과 같은 기능을 한다. 가속도가 붙은 시간 기계를 타고 날아다녔던 인간이 이 고요한 금강변 버드나무 앞에서 딱 멈춘 것이다. 거긴 스피드의 진공지대다.

‘멎음’은 세계를 다시 보게 해준다. 사진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것도 바로 멎음에서였다. 사람들은 정지화면에 놀랐다. 포토저널리즘의 선구자로 로버트 카파와 함께 사진그룹 매그넘을 창립한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남긴 ‘결정적 순간’이란 말도 같은 맥락이다.

로하스길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물그림자가 일지 않고, 세상에 정적이 쌓여 있을 때다. 바로 고요와 정적의 시간인 새벽이라는 것은 알아두자.

■ 추동 가래울

억새가 참 인상적이었다. 나무 한 그루가 고개를 내민 억새밭 가장자리로 나무 데크 산책로가 놓여 있었다. ‘셀카’ 찍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풍경이 아름답다 보니 여기저기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사진으로 남는 장소는 특별해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한 순간을 기록한 사진에 ‘추억’ ‘사랑’이란 단어를 붙인다.

거기서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현대인에게 사진의 의미는 뭘까? 현대인은 수렵채집인이다. 문명 시대 이전의 수렵채집인들은 먹거리를 찾아 헤맸다면 현대인은 이미지를 채집한다. 필카(필름 카메라) 시대에는 생각하고, 찍고, 봤다. 그런데 디카(디지털 카메라) 시대에는 찍고, 보고, 생각한다. 필카 시대에는 아름다운 것만 찍었다. 소중한 것들을 담았다. 지금은 꽃 같은 예쁜 것들만 찍는 게 아니라 식당에서 먹고 마시는 것들도 카메라에 담는다. 지하철에서 싸움질이 일어나도 말리기보다는 사진부터 찍는다. 사람들은 이미지에 중독됐다.

왜 그럴까? 사진은 힘이 세기 때문이다. 인증샷에서 ‘인증’이란 단어는 진위를 판단하는 권위를 부여한다는 의미다. ‘이미지=인증’이며, ‘인증=권위’로 인식된다. 교통사고, 폭력사건 현장의 시시비비도 ‘사진 한 방’으로 해결된다.

추동 가래울 지역은 억새밭이 인상적이다. 억새밭을 가로질러 나무데크 길이 놓여 있다.
여기서 다른 궁금증 하나. 사람들은 사진을 앨범 속에 간직하지 않고 왜 페이스북에 올리는 걸까?

철학자 한병철의 해석은 이렇다. 이 시대를 남이 감시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자신을 닦아세우는 ‘성과사회’ ‘피로사회’라고 규정한 그는 온라인에 자신의 사진을 올려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것도 성과사회의 현상이라고 본다.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이다. 우리는 좋아요를 클릭하는 순간 스스로 지배에 예속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효과적인 감시도구일 뿐만 아니라, 모바일 고해실이기도 하다. 페이스북은 디지털 교회, 글로벌한 디지털 시나고그이다.’(심리정치)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현대인을 노마드 즉, 유목민이라고 한다. 비유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세입자들은 전셋값 오르면 집을 찾아 떠나야 하는 신세다. 자기 집을 가진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아이들이 초·중·고교에 진학할 때 학교 따라 이사 다닌다. 연금이 넉넉지 않은 사람들은 노년에 집이라도 팔아야 살 수 있다. 사회학자 노명우는 한국인을 부동산 유목민이라고 했다.

자, 여기서 한 단계 더 생각을 밀고 나가보자. 그럼, 현대인들이 정주할 수 있는 곳은 어딜까?

언제 어디서나 쉽게 접속할 수 있는 곳, 웹 세상이다. 사람들의 집은 인터넷이 됐다. 블로그가 일기장이다. 거기에 소소한 일상을 기록한다. 마치 사막을 횡단하는 유목민 같은 현대인들에게 웹 세계는 오아시스일까? 나는 신기루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접속하고, 싸우고, 비난하고, 위로하고, 친구 맺고, ‘del’ 버튼 하나로 빠져나오고…. 가상의 세계에서는 ‘리얼 버라이어티 쇼’가 벌어지지만 ‘몸’과 분리된 세계는 진정한 안식처가 될 수 없다. 때로는 막말과 비난이 난무하는 싸움터에 가깝다.

사진은 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사진에 대한 아포리즘 한 줄을 소개한다.

‘충동의 무의식적인 부분을 정신분석을 통해 알게 되듯이 이러한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에 관해 사진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된다.’(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 대청오백리길 길잡이

로하스길은 내비게이션에 차윤주차윤도정려각을 찍으면 된다. 차윤주정려각 바로 아래에 사진 포인트가 있다. 추동 가래울은 가래울식당이나 대청호생태관 인근에 있다. 바로 길 옆이어서 찾기 쉽다. 로하스길 인근 대청매실가든(031-931-3838)은 오리고기 집인데 오리 냄새가 안 난다. 괜찮다.


<대전 | 글 최병준 선임기자·사진 이석우 기자 b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