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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파킨슨 씨도 또박또박

파킨슨 씨도 또박또박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리라던 무하마드 알리도 피해가지 못 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마저 죽음으로 이끌었다. 중국에선 마오쩌뚱이, 한국은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이 이 병으로 혹독한 노년을 보냈다.

파킨슨병은 ‘오래 가는 질병’이다. 현대 의학은 아직까지 완치법을 찾지 못 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병도 아니다. 환자들은 평생을 파킨슨병과 더불어 살아간다. 상황이 이럴진대 숨 쉬고, 먹고, 자는 기본 욕구만 해결한다고 환자들의 삶이 행복할까? 정수민 씨와 전환수 씨는 파킨슨병 환자도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디자인 그룹 도파솔루션.


정수민 씨와 전환수 씨는 디자이너다. 둘은 영국왕립예술학교와 런던임페리얼대학 이중 전공으로 ‘디자인 앤 엔지니어링’ 과정을 밟고 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을 지녔다. ‘메디컬 디자인’에 관심이 많다는 점이다. 둘은 파킨슨병 환자들이 글씨를 쓰기 힘겨워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파킨슨병 환자들은 대개 근육이 경직되고 떨려 글자를 세밀하게 표현할 수 없는 ‘마이크로그라피아’란 질병을 앓는다. 정수민 씨와 전환수 씨는 이들을 돕는 기기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학교 동료 2명도 의기투합했다. 이들 네 학생은 지난해 10월 도파솔루션이란 디자인 그룹을 만들었다. 그리고 3개월여 연구 끝에 ‘아크펜’을 선보였다.

진동으로 손 자극해 글 반듯하게 쓰게 도와줘

아크펜은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펜이다. 겉보기엔 여느 펜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몸통이 일반 펜보다 조금 크고 두꺼울 뿐이다. 비밀은 펜 내부에 있다. 아크펜은 내부에 진동 모터를 장착했다. 파킨슨병 환자가 펜을 손에 쥐면, 모터는 손의 특정 부위를 진동으로 자극한다. 자극은 환자의 손 움직임을 도와, 평소보다 글씨를 크고 바르게 쓰게 해준다.

아크펜.

좀 이상하다. 진동을 주면 손이 덜덜 떨릴 텐데, 어떻게 글씨를 더 또박또박 쓸 수 있는 걸까. 정수민 씨 얘기가 흥미롭다. “초기 리서치 기간 동안 의사와 환자들을 만나며 여러 가지를 실험했어요. 진동이나 마사지, 전기 자극 등을 주며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테스트도 해 보고요. 우리가 직접 기기를 착용해 파킨슨병을 간접 체험하기도 했어요. 실험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는데요. 진동을 주니 오히려 수전증이 줄어들고 글씨를 더 크게 쓰는 걸 발견했어요. 그걸 발전시켜 내놓은 게 아크펜입니다.”

단순해 보이는 디자인에도 인체공학 설계가 숨어 있다. 흔히 쓰는 얇은 펜은 손떨림과 근육 경련이 있는 파킨슨병 환자들이 쥐기엔 무리가 많았다. 아크펜은 보통 펜보다 크게 만들었다. 엄지와 검지가 닿는 부분도 손에 쥐기 편안한 형태로 설계했다. 손에 쥐었을 때 어느 부분에 진동을 주느냐도 중요한 문제였다. 손 전체에 고루 영향력을 미치게 하는 부위를 자극해 효과를 극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종 디자인은 옆에서 보면 살짝 아치형을 그리는 형태로 나왔다. ‘아크펜’이란 이름이 붙게 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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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더형 진동 모터와 제어 도즈, 모바일 칩셋 등을 맞춤 제작했어요. 실험 도중 깨달은 게, 단순히 진동만 줄 게 아니라 강도와 위치, 크기가 매우 중요했어요. 여러 환자를 테스트하며 가장 알맞은 강도나 모터 위치, 크기를 디자인했습니다. 펜 끝부분엔 버튼을 달아 진동 모드나 강도를 조절할 수 있게 했고요. 충전형 리튬이온 배터리도 넣었습니다. 파킨슨병 환자들은 손이 떨려 배터리를 교체하는 것도 쉽지 않거든요.”(전환수)

실험 과정이 녹록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실험에 참가할 환자를 모집하는 일부터가 난관이었다. 영국에선 병원이 환자를 중개해주지 않았기에, 일일이 찾아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14명의 환자를 만났다. 이들에게 아크펜 시제품을 쥐어주고 글쓰기 테스트를 거쳤다. “처음에 아크펜으로 한 문단을 쓰게 했어요. 한 1~2분 정도 걸렸을까요. 다 쓰고 나니 참가자 중 93%의 글씨가 평소보다 커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5분 정도 쉬고, 이번에는 진동 없이 펜으로 글씨를 쓰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86% 참가자가 진동이 없어도 평소보다 글씨를 크고 부드럽게 썼어요. 글씨도 더 또박또박해졌고요. 실험은 성공적이었어요.”(정수민)

실험 참가자 93% 글쓰기 개선…사용 뒤에도 효과 지속

구글도 지난해 11월, 파킨슨병 환자를 돕는 ‘스마트스푼’을 공개했다. 구글이 지난해 9월 인수한 리프트랩이 만들던 숟가락이다. 구글 스마트스푼은 ‘리프트웨어’라 불리는 센서 기술을 적용했다. 숟가락을 든 환자 손이 떨리면 그 반대 방향으로 진동을 줘서 떨림을 상쇄하는 ‘써모캔슬링’이 기본 원리다. 디지털 카메라에 내장된 손떨림 방지 기술과 같은 원리다. 아크펜은 구글 스마트스푼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구글 '스마트스푼'.

“써모캔슬링 기술은 손글씨처럼 작고 세밀한 움직임에 대응하긴 어렵습니다. 파킨슨병 환자 특징이 한 방향으로 손이 떨리지도 않고 떨림 정도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아크펜은 떨림을 상쇄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적극적으로 방향성을 제공합니다. 또 진동이 근육 이완에도 영향을 미쳐, 사용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효과가 지속되죠. 저희는 거기서 잠재력을 보고 있어요.”(전환수)

정수민 씨는 아크펜 이전에도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가운데 ‘브루즈’(Bruise)는 장애인 운동선수의 부상 여부를 알려주는 스마트 센싱 프로젝트다. 신체 마비가 있는 운동선수들은 골절상을 당해도 인지하지 못해 방치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다보면 부상이 악화되거나 2차 감염에 노출되기도 한다. 정수미 씨는 압력감지필름을 내장해 한도 이상의 힘이 가해지면 색이 바뀌어 부상 가능성을 미리 알려주는 스마트 운동복을 만들었다. 이 프로젝트는 ‘2014년 다이슨 어워드’에서 우수상을 타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RwePNcXZ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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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수 씨 프로젝트도 흥미롭다. “장애인올림픽 경기를 보고 있었어요. 시각장애인 스키어가 활강하며 내려오는 장면이었는데요. 캐스터가 말하더군요. 정작 시각장애인들은 이 장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이 현실이 모순이라고요. 그 얘길 듣고 ‘티아’(Theia)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티아는 움직임을 청각과 촉각 경험으로 변환하는 새로운 언어다. 프로젝트 핵심은 시각장애인용 헤드셋이다. 선수의 움직임을 센서로 수집해 진동과 소리로 변환해 헤드셋으로 시각장애인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보는’ 스포츠에서 ‘느끼는’ 스포츠로 바꿔주는 것이다.






화장용 브러시, PC 마우스 등 적용 대상 확대

아크펜 프로젝트가 조금씩 알려지며 곳곳에서 문의도 쏟아지고 있다. 대부분은 ‘아크펜을 어떻게 구매할 수 있느냐’거나 ‘실험에 꼭 참가하고 싶다’는 내용이란다. 정수민 씨는 그래서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고 말했다. “환자분들을 만나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어요. 이런저런 실험 제의가 들어와도 참여를 머뭇거리게 만드는 요인이 있다는데요.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만 제시하고 사라지는 학생들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그러면 환자들은 2배로 상처를 받는다고 해요. 우리는 정말 가능성 있는 해결안을 찾아서 끝까지 밀고 나가고 싶어요. 그걸 환자분들 손에 쥐어드리고 싶어요.”

도파솔루션팀은 앞으로 더 많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아크펜의 효능과 개선점을 모색할 예정이다. 프로젝트를 지속하는 데 필요한 자금도 더 끌어모을 생각이다. 크라우드펀딩도 고민했지만, 일단은 미뤘다. “아크펜을 당장 시장에 내놓을 수도 있긴 해요. 기술적으로 어려운 게 아니고, 디자인도 이미 나왔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좀 더 효과를 증명하고 발전시키고 싶어요. 지금으로선 연구를 더 진행하고 싶습니다.”










정수민 씨와 전환수 씨는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화장용 브러시나 PC용 마우스 등에도 아크펜의 진동 원리를 적용할 심산이다. 파킨슨병 환자 뿐 아니라, 수전증을 앓는 사람에게도 아크펜은 도움이 된다.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계세요. 올해 72살인 키스 웰튼 할아버지인데요. 할아버지는 저를 무척 친절히 대해주셨어요. 그런데,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화난 것처럼 보여도 그런 게 아냐. 이 병이 나를 무뚝뚝하게 보이게 만든 거야.’ 실험 끝무렵, 할아버지가 얘기했어요. ‘내 글씨가 커졌어’라고요. 그러면서 환하게 웃으시는 거예요. 그 웃음이 제겐 무척 큰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224949" align="aligncenter" ] 키스 웰튼(72) 할아버지 사례는 도파솔루션의 ☞Youtube에서 영상 보기
☞Youtube에서 영상 보기">☞Youtube에서 영상 보기;amp;v=64oVdh4Mw_c" target="_blank">'아크펜' 소개 동영상에도 등장한다.[/caption]
이희욱 기자 asadal@blot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