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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한국판 파브르 소년' 뽑았더니… 풍뎅이 소녀, 철새 소년만 몰려

'한국판 파브르 소년' 뽑았더니… 풍뎅이 소녀, 철새 소년만 몰려

[한국 입시문화에 좌절된 연세대의 '창의 인재 실험']

첫해엔 다양한 학생들 지원

'파브르 소년' 이듬해부터 사교육으로 '가공'된 아류만…

결국 선발인원 4분의 1로 줄여

2011년 춘천고 3학년이었던 차석호(21·당시 17세)군의 내신은 전체 9등급 중 8등급이었다. 그런 그가 2012학년도 입시에서 연세대 시스템생물학과에 합격했다. 차군은 수학 실력은 떨어졌지만, 어릴 때부터 곤충 연구에 빠져 채집을 하러 다니고 밤새워 관찰한 열정에 면접관들이 감동했다. 교수들은 "반드시 뽑아야 할 인재"라며 만장일치로 합격시켰다. 그해 연세대가 처음 도입한 '창의 인재 전형' 덕분이었다. 차군은 '한국의 앙리 파브르를 꿈꾸는 학생'이라 불리며, 연일 화제가 됐다. 연세대의 창의 인재 전형은 '줄 세우기식 입시 문화를 바꿀 혁신'으로 평가받았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그로부터 만 4년. 연세대는 '창의 인재 전형'의 내년 정원을 올해의 절반인 10명으로 줄이는 안을 통과시켰다. 2013학년도에 40명을 뽑았던 것에 비하면 정원이 4분의 1로 쪼그라든 것이다. 수능이나 내신 성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창의 잠재력'을 가늠해 인재를 선발하겠다고 야심 차게 시작한 전형이 이렇게 축소된 배경엔 "뽑을 인재가 없다"는 고민이 깔려 있다.

시행 첫해인 2012학년도엔 차군을 포함해 모두 31명이 합격했다. 당시 정원은 30명이었지만 연세대는 마지막 두 명을 동점 처리하면서까지 31명을 뽑았다. 입학처 관계자는 "차군을 포함해 신선하고 다양한 학생들이 지원했다"고 기억했다. 서울대 교수에게 무작정 이메일을 보내 대학생들과 함께 라틴어 수업을 청강한 어학 특기생부터 자신이 직접 쓴 영화 시나리오를 들고 충무로 영화감독들에게 조언을 구하러 다닌 여고생도 있었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그다음 해부터 2012학년도 기존 합격생들의 특장(特長)을 그대로 흉내 낸 지원자들이 속출해 크게 당황했다"고 했다. '연세대 창의 인재 전형 전문 학원'과 '창의 인재 전형 집중 분석서'라는 제목의 책이 시장에 나타난 후였다.

연세대 입학처의 한 교수는 "파브르 고교생이 뜬 뒤 '장수풍뎅이 여고생' '철새 박사 소년' 등이 앞다퉈 지원서를 냈다"며 "이 같은 아류(亞流)들은 얼마 전 끝난 2015학년도 입시에서도 계속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의 뜻은 '기존 제도가 담지 못하는 학생들을 뽑자'는 것인데 첫해를 제외한 2013학년도부터 사교육으로 만들어진 듯한 학생들의 지원이 몰렸다"고 말했다. 면접을 통해 과거가 조작된 학생들이 나타날 때마다 교수들은 좌절했다고 했다. '학창 시절 내내 곤충을 관찰하며 지냈다'고 자기소개서를 쓴 학생을 면접했더니 실제 서울 밖으로 벗어나 흙 냄새 맡아본 적이 손에 꼽는다고 실토한 경우도 있었다.

이 전형을 통해 뽑힌 학생들이 대학에서 원만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창의 인재 전형 정원을 줄이는 데 영향을 미쳤다. 연세대 공과대학의 한 교수는 "신입생들이 처음으로 듣는 공학수학 같은 과목은 수학 내신 1등급을 받고 들어온 학생들도 버거워한다"며 "기초 과목에서 좌절한 창의 인재 합격생들은 전공 수업에서도 줄줄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차석호 학생도 입학 후 한 차례 휴학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2013년부터 적용된 교육부 지침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공교육 정상화를 이유로 "외부 활동을 많이 한 학생보다 학생생활기록부가 우수한 학생을 선발할 것"을 각 대학에 요청한 것이다. 튀는 인재를 선발할 길이 더욱 좁아져버린 것이다.

[엄보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