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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나요!

거리에서 사라진 군고구마… 그 겨울날의 추억만 남아

거리에서 사라진 군고구마… 그 겨울날의 추억만 남아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귀하신 몸' 고구마

건강식품으로 수요 급증

생산량은 줄어드는 추세

병충해 우려 수입도 금지

도매價 10년새 2~3배 올라

노점상에서 3개 5000원

직접 구워 먹는 집 늘어

전용 직화 냄비도 인기

백화점·대형마트서 파는

추억의 '고급 간식'으로


거리에서 겨울철 별미(別味) 군고구마가 사라졌다.

지난 12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명동. 300여개의 노점상이 몰려 있는 이 지역엔 각종 과일 주스와 꼬치, 해물전, 오징어다리 등 온갖 먹거리가 널려 있지만 군고구마는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시작해 명동성당 부근, 뒷골목을 돌아다닌 끝에 롯데백화점 건너편 유네스코길 초입에서 가까스로 군고구마 장수를 발견했다. 숨바꼭질하듯 찾아다닌 지 40여분이 지났을 때였다. 노점은 쥐포·오징어·군밤 등을 함께 팔았다. 가로 40cm 세로 70cm가량의 조그만 오븐에 장작이 아닌 가스로 고구마를 굽고 있었다.

주변 상인은 "명동에서 거의 유일하게 군고구마를 파는 곳"이라고 했다. 군고구마는 세 개에 5000원으로 생각만큼 싸지 않았다.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지갑을 여는 사람들이 있었다. 회사원 김모(54)씨는 "지나가다 보니 반가워서 샀다. 옛날엔 군고구마 많이 먹었는데…"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신촌·여의도 일대도 둘러봤다. 20여개 노점상이 밀집한 종각 '젊음의 거리'와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는 인사동 '문화의 거리' 650m를 걷는 동안에도 군고구마는 보이지 않았다. 신촌역에서 연세대에 이르는 연세로 500m 구간에도 오코노미야키(일본식 전)·와플·김밥 등을 파는 노점상 20여곳이 성업 중이었지만 군고구마는 없었다.

여의도에서는 증권가 한 도로에서 군고구마 트럭 한 대를 찾았다. 군밤·대추 등과 함께 군고구마를 파는 이곳에서도 역시 가스불에 고구마가 익고 있었다. 지나가던 60대 남성 한 사람이 가격을 물었다. "세 개 5000원"이라는 말을 듣더니 발길을 돌렸다. 기자가 5000원어치를 달라고 하자 주인 정모(51)씨는 "요새 잘 팔리지도 않는데"라며 한 개를 더 줬다.

한국인의 겨울 추억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길거리 군고구마는 이제 어쩌다 볼 수 있는 귀한 존재가 됐다. 10여년 전만 해도 길에서 흔하게 사먹을 수 있었던 그 많던 군고구마는 다 어디로 갔을까.

고구마 도매가 10년 새 2~3배 넘게 올라

군고구마가 거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가격 상승이다.

지난 15일 오전 서울 송파구 가락도매시장 채소 구역. 100여개 넘는 채소 가게 중 고구마를 취급하는 곳은 60여개쯤이었다. 고구마는 10kg 한 상자에 2만2000~3만원, 1kg 단위로는 4000원 선이었다. 1kg이면 어른 주먹 크기만 한 고구마 네 개다. 20년 경력 도매상 이연순(78)씨는 "처음 장사 시작할 때보다 고구마 가격이 서너 배는 올랐다"고 말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2000년 1㎏에 913원이었던 고구마 도매가는 2012년 3614원까지 올랐다. 지난해엔 2310원으로 내려갔지만 10여년 전에 비해 두 배 넘게 올랐다. 1999년 1010원이었던 감자 도매가(1㎏)가 지난해 1042원으로 15년 동안 32원 오르는 데 그친 데 비하면 고구마의 가격 상승은 극적이다. 종각 골목에서 30여년째 노점상을 하고 있다는 최모(81)씨는 "요즘은 고구마 가격이 너무 올라 사람들이 절대 그 가격에 사 먹지 않는다"며 "올겨울엔 군밤만 판다"고 말했다.

고구마 생산량도 줄어드는 추세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고구마 생산량은 연 30만t 규모다. 1990년 43만1689t에서 2000년 34만4881t, 2005년 28만2526t까지 줄었다가 2013년엔 32만9516t을 기록했다.

게다가 고구마는 군밤·붕어빵·호떡 등 다른 겨울 간식과 달리 원재료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종로에서 만난 한 노점상은 "군밤은 저렴한 중국산을 쓰면 되고, 붕어빵·호떡 역시 중국산 밀가루나 팥을 써서 원가를 낮출 수 있지만 군고구마는 고구마 가격이 오르면 꼼짝없이 비싸게 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가격이 오르는데 농민들은 왜 고구마를 심지 않을까. 고구마는 섭씨 7~8도 이하 저온에서도 금방 썩기 때문에 겨울에도 보관·유통이 까다롭다. 38~39도로 고온 처리하는 '큐어링(curing) 과정'을 거쳐야 장기간 저온 보관이 가능하다. 정일관 한국고구마산업중앙연합회 사무처장은 "큐어링 장비를 갖추는 데만 농가별로 1억~2억원은 들고 고구마 1㎏을 큐어링 처리하는 데 비용이 평균 1000원은 되기 때문에 농민들이 쉽게 뛰어들지 못한다"고 말했다.

고구마는 수입도 금지돼 있다. 우리 정부는 생(生)고구마 수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고구마 흙에 개미바구미나 고구마바구미 등 해충이 묻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해충들은 국내에는 없는 것으로 자칫 잘못 유입되면 국산 고구마의 씨를 말려버릴 위험이 있다. 다만 껍질을 벗겨 깍두기처럼 자른 뒤 냉동한 제품이나 고구마 가루는 중국 등에서 연 2만~3만t 정도 수입되고 있다.

"그 돈이면 집에서 구워 먹지"

군고구마는 판매자 입장에서 '안 남는 품목'이 됐지만 그렇다고 소비자들 입맛이 아예 끊긴 건 아니었다. 소비자들은 좀 더 싸게 먹을 수 있는 방법, 즉 집에서 구워 먹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고구마가 건강식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자 직화(直火) 냄비가 등장했다. 냄비 바닥에 구멍을 뚫어 가정집 가스레인지로도 고구마를 구울 수 있다. 직화 냄비 가격은 7000~1만원. 1만원이면 군고구마 6개 값이다. 2010년부터 군고구마 직화 냄비를 판매하고 있는 키친아트 김형석 대리는 "한 달 평균 1400개가량 팔린다. 제품 출시 이후 4~5년간 직화 냄비 시장에 뛰어드는 업체가 수십 곳이 넘어 매출이 줄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지난 12일 서울의 한 백화점 직원이 군고구마를 쪼개 노란 속살을 보여주고 있다. 겨울철 대표 서민 간식이었던 고구마, 이젠 백화점으로 진출한 ‘귀하신 몸’이 됐다. / 김연정 객원기자

'귀하신 몸'이 된 군고구마는 길거리에선 거의 사라졌지만 대신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로 진출했다. "꿈에도 군고구마 맛을 잊지 못하겠다"는 사람들 중에선 비싼 돈을 주고라도 백화점 등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3일 오후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 지하 식품관. 명품관과 연결된 통로 바로 앞에 가로 세로 2m 크기의 군고구마 판매대가 마련돼 있었다. 가격표를 보니 100g에 1500원이었다. 어른 주먹 두 배만 한 고구마 한 개를 집어들자 4290원이라고 했다. 길거리 군고구마의 세 배쯤이다. 주부 장모(58)씨는 "추운 겨울날 거리를 헤매고 다닐 수 없어서 왔다. 백화점이 비싸다곤 하지만 중국산 군밤보단 국내산 고구마가 낫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점포당 군고구마 평균 매출이 월평균 1500만원쯤 되고 2010년 처음 군고구마 매장을 선보인 당시에 비해서도 40%가량 매출이 늘었다"고 말했다. 갤러리아·신세계·현대백화점 등도 '추억의 군고구마' 마케팅으로 소비자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지난 15일 서울 송파구의 한 대형마트에서는 군고구마 1㎏(4개)을 세일해서 4000원에 팔았다. 길거리 군고구마보다 싼 가격이었다.

서울 시내에서 끝내 찾지 못한 재래식 군고구마통(장작으로 굽는 방식)을 지난 13일 밤 경기 수원시의 한 상가 앞에서 발견했다. 주인 전모(51)씨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회식 끝난 30·40대 가장들이 '너희 집 애들 줘라' 하며 서로 군고구마 한 봉지씩 안겨주곤 했는데 요즘은 가격 듣고 돌아서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찐고구마보다 군고구마가 더 달콤한 이유는

고구마를 맛있게 먹는 방법

군고구마는 고구마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 고구마 속 녹말을 당분으로 변화시키는 효소 ‘베타아밀라아제’는 끓는 물이나 고온의 찜통 안에서는 활동하기 어렵다. 하지만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며 구워질 경우엔 비교적 오랜 시간 활발하게 작용해 고구마의 단맛을 높인다. 군고구마가 찐고구마보다 단 이유다. 하지만 당뇨병이 있다면 주의해야 한다. 군고구마의 혈당지수(GI)는 80 이상이다.

고구마가 다이어트에 좋다고?

고구마는 건강식품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100g당 식이섬유(2.6g)가 감자(0.7g)의 네 배다. 생고구마나 찐고구마의 혈당지수는 55로 감자(90)보다 훨씬 낮다. 섬유질이 많아 적은 양으로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어 다이어트에 좋다. 비타민A는 감자의 19배, 비타민C는 3배 넘게 함유돼 있다.

일본 거쳐 한국으로

고구마는 조선 후기 때 국내에 들어왔다. 1763년(영조 39년) 통신사로 일본 쓰시마섬에 파견됐던 조엄이 이듬해 고구마 종자를 들고 부산으로 입항했다. 우리나라에선 전라남도 해남이 고구마 산지로 유명하다.

고구마의 고향은 중남미

고구마의 원산지는 중앙아메리카 또는 남아메리카로 추정된다. 생장 기간은 120일로 열대·온대 지방에서 널리 재배된다. 한·중·일과 동남아·남미 등에서 주로 재배하고 소비한다. 전 세계에서 연간 1억4000만t 정도 생산되는데 이 중 70% 이상이 중국산이다. 감자를 선호하는 유럽과 미국에선 고구마를 거의 먹지 않는다.

[원선우 기자 sun@chosun.com]

[엄미선 인턴기자(경희대 응용물리학과 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