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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스티브 잡스 닮은 ‘이야기꾼’ 인재 길러요

스티브 잡스 닮은 ‘이야기꾼’ 인재 길러요

[한겨레] [함께하는 교육] 교실에 부는 ‘스토리 텔링’ 바람



 

지난 10월28일 서울 강남구 숙명여중 1학년1반 교실에서 ‘미술작품 감상을 통한 북 스토리텔링하기’란 주제로 수업이 진행됐다. 한 학생이 여러 화가들의 그림을 각각 긍정적 느낌과 부정적 느낌으로 분류하고 있다.

‘합격사과’ 이야기. 1991년 일본 아오모리현은 태풍 피해를 겪었다. 당시 그곳에서 재배하던 사과의 90%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농민들은 농사를 망쳐 시름에 젖은 상태. 하지만 한 사람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살아남은 10%의 사과에 이야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이 사과는 모진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남은 사과다. 이 사과를 먹으면 시험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합격한다.” 이후 ‘합격사과’는 평소보다 두 배나 비싼 가격에 두 배나 많이 팔렸다. 바로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스토리텔링’은 ‘스토리’(story)와 ‘텔링’(telling)의 합성어로 말 그대로 ‘이야기하다’라는 뜻이다. 원래 문학이나 영화, 교육학 등에서 활용됐던 개념이다. 하지만 시간 순서대로 내용을 연결하는 ‘서사’나 사건을 재구성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플롯’과는 다르다. 정보를 무미건조하게 나열해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와 청자 사이에 감정적 교감이 오가도록 다양한 사례를 언급하거나 매체를 활용해 이야기하는 방법을 뜻한다.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창덕여중. 중등교사를 대상으로 한 ‘북 스토리텔러 양성 직무연수’가 열렸다. 강사로 참여한 황신웅 유텔링스토리텔링교육연구소 대표는 ‘합격 사과’ 이야기를 사례로 들며 “눈으로 보기에 평범한 사과인데 이야기를 덧붙이니 ‘합격사과’로 변했다”며 “스토리텔링은 있는 그대로 사물을 객관화하는 게 아니라 말하는 이가 의미나 가치를 부여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식 주입하는 수업 대신
‘이야기짓기’ 가르치는 교실 늘어
책·그림 읽고 나만의 스토리 만들기
상담때 마음 들여다보기 활용
대입 자기소개서 작성에도 도움


UCC 제작·연설문 쓰며 이야기 만드는 법 익혀

이런 ‘스토리텔링 바람’이 교육현장에서도 불고 있다. 대입에서 자기소개서가 중요해지면서 스토리텔링에 대한 교사나 학생의 관심도 커진다. 과거와 달리 자기소개서에 ‘나만의 고유한 스토리’를 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나는 성격이 소심하다’, ‘남들보다 적극적이다’ 등을 적는 방식으로 학생들이 자신을 드러냈다면 이제는 현재 성격이 형성된 과정, 성격에 영향을 주었던 책이나 사건 등 사례 위주로 기술해야 한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는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활자를 통한 읽기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걸 익숙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매체 환경에 적합한 ‘텔링’ 방식이 바로 ‘스토리’”라고 설명했다. 또 “스토리텔링을 잘하려면 다른 사람의 발표도 많이 듣고, 고전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많이 찾아 읽어보라”고도 덧붙였다.

“자기소개서 등 각종 자료에서 ‘이 학생은 성실합니다’라는 평가만 놓고 어떤 학생을 온전히 알기란 어렵다. 성실하다면 어떻게 성실한지 구체적인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런 사례를 발굴해 맛깔스럽게 이야기하는 데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한데 기본적으로 먼저 다른 사람의 스토리, 즉 이야기를 많이 들어봐야 한다.”

애플의 최고경영자였던 스티브 잡스는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마다 애플의 브랜드를 가지고 스토리텔링을 했다. 화제가 됐던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연설 때도 본인의 경험에서 교훈을 끌어내고 인상 깊은 문구로 마무리해 스토리텔링 기법을 잘 활용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스토리텔링이 중요해진 때 학교 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교육을 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북 스토리텔러 직무연수 개발위원으로 참여했던 신주은 수석교사(서울 인헌고)는 독서토론 동아리 ‘인헌 독서카페’의 북멘토를 맡아 스토리텔링을 적용한 활동을 했다. 학생들은 각자 관심있는 분야나 책을 소개하는 유시시(UCC)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레미제라블>(빅토르 위고 지음)을 소개한다면 으레 줄거리만 장황하게 늘어놓고 마지막에 짧은 감상평을 넣기 쉽다. 그러면 재미가 없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좋은 스토리텔링의 조건에 맞춰 내용을 짜게 했다.”

신 교사는 활동에 앞서 학생들에게 <떨지마라 떨리게 하라>(길영로 지음)라는 책을 먼저 권했다. 학생들은 프레젠테이션 기술을 다룬 이 책을 읽으며 ‘발표 기술’을 익히고 연습했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읽은 내용을 남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좋은 스토리텔링에 대해 “먼저, 이야기 주제와 관련된 다양한 매체를 통해 흥미를 유발한다. 내용만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딱딱하고 지루하다”며 “이야기 중간 중간 나만의 경험도 곁들이고 청중에게 질문을 해 공감을 끌어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2학년 최예린양은 본인이 감명 깊게 읽은 <멈추지마, 다시 꿈부터 써봐>(김수영 지음)를 소개하는 유시시를 만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진로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최양은 “이 책을 읽고 사소한 꿈까지 다 적어본 뒤 내가 일본에 관심 있다는 걸 알았다. 아시아문명학부에 가서 일본 문화나 한-일 관계를 공부하고 싶다”고 밝혔다.

최양은 “책 내용을 내 경험과 연결해 스토리에 녹여냈다. 스토리텔링은 내가 가진 감성을 친구한테 이야기하듯이 풀어내면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 교사는 국어시간에 윤동주의 <참회록>을 가르칠 때도 스토리텔링 기법을 적용했다. ‘미래의 참회록’ 형식으로 ‘미래의 나의 모습’을 연설문으로 써본 것이다. 그는 먼저 학생들에게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학 졸업식에서 했던 연설 동영상을 보여줬다. 신 교사는 “잡스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되 거기서 교훈을 끌어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문구로 마무리했다. 연설의 모범을 보여주는 동시에 스토리텔링 기법이 다 들어가 있다”고 했다.

신 교사는 “사실 모든 수업이 스토리텔링이다.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듣는 사람이 공감하지 않으면 좋은 말하기가 아니다”라며 “말하기의 목적 자체가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함이다. 교사들도 교과 내용을 일방적으로 설명하기보다 학생들과 소통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기법을 수업에 적용해보라”고 말했다.



미술 감상하며 관련 책 읽으니 감성 풍부해져

서울 강남구 숙명여중 윤주일 교사는 미술 교과를 가르치지만 평소 독서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윤 교사는 “미술은 자칫 추상적으로 보이기 쉬운 과목이다. 또 고교에서는 입시 때문에 미술 교과에 대한 아이들 관심도 덜하다”며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실질적인 학습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미술 시간에 스토리텔링 기법과 독서교육을 활용했다”고 밝혔다.

가령, ‘미술작품은 왜 이렇게 비쌀까’를 주제로 토론 수업을 하거나 작품과 연관돼 있는 인물의 책을 소개해 함께 읽는 방식이다. 특히 동화책은 훌륭한 스토리텔링 도구가 됐다. 동화책 속 그림을 지우고 글에 맞는 그림을 그려 넣거나, 반대로 그림만 보고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 넣어 네컷만화처럼 만들 수 있다.

지난달 28일 윤 교사는 ‘미술작품 감상을 통한 북 스토리텔링하기’란 주제로 수업을 진행했다. 먼저 그는 학생들에게 그림 열 장을 보여주며 작품과 작가 이름 등 작품에 대한 객관적 사실만 짤막하게 설명했다. <북쪽에서>(쉬스킨), <자작나무숲>(구스타프 클림트), <나무와 여인>(박수근) 등 나무를 소재로 한 다양한 화가의 작품들이었다.

학생들은 각각의 그림에 대한 느낌을 적고 짝을 이뤄 그림을 ‘긍정적 느낌’(동적, 변화, 희망)과 ‘부정적 느낌’(정적, 정체, 절망)으로 분류했다. 1학년 김현수양은 “이대원 작가의 <농원>이라는 작품이 기억에 남았다”며 “파란색 배경으로 이루어진 그림은 전반적으로 어두웠다. 여러 색이 섞여 있어 칙칙한 느낌도 줬다. 하지만 나처럼 질풍노도를 겪는 사춘기 소녀의 감성과 닮은 데가 있어서 와 닿았다”고 했다.

이후 윤 교사는 작가들이 각자 어떤 의도로 그림을 그렸는지 알려주고 박완서씨의 소설 <나목>을 소개했다. 이 작품은 작가가 박수근 화백을 떠올리며 쓴 소설이다. 윤 교사는 소설의 한 대목을 이야기하며 “소설 앞부분, 주인공은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보게 된 그림 속 나무를 ‘고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인공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 뒤엔 같은 나무를 보고도 ‘봄을 향한 믿음’이란 뜻의 ‘나목’으로 보인다고 말했다”며 “같은 사물이나 사람도 자신의 감정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은 윤 교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이 소설을 읽고 인상 깊은 구절이나 주인공의 사랑에 대한 태도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눌 계획이다.

장유정양은 “예전에는 그림에 담긴 이야기나 감정을 생각해보지 않았다”며 “소설을 통해 그 작가의 마음을 알고 나니 작품에 대한 느낌이 달라졌다. 스토리텔링은 ‘감정이 담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아이들 마음 읽어내는 심리 상담에도 두루 쓰여

스토리텔링은 사회에서 프레젠테이션 기술 등을 발휘할 때 쓰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교육적 효과가 큰 교수법이다. 황신웅 대표는 “아이들의 그릇된 가치관이나 인식을 바꿔주는 심리 상담에도 스토리텔링 기법이 쓰인다”고 소개했다. 아이 자신이나 타인, 사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경우 그것을 바꿔줄 수 있다. 황 대표는 “그 아이의 스키마(새로운 경험이 내면화되고 이해되는 정신의 모델 또는 틀) 안에 있는 왜곡된 스토리를 끄집어내서 수정해주거나 새로운 스토리를 들려줌으로써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때론 스토리텔링을 통해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도 있다. 부모한테 폭행당한 아이가 있을 경우, 아이는 그 사실을 남한테 쉽게 꺼내지 못한다. 상담사가 그 일을 알고 있더라도 쉽게 물어보기 어렵다. 그때 스토리텔링을 활용해 그 아이의 상황과 비슷한 내용의 책을 보여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주고 “네가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황 대표는 “본인이 아닌 ‘다른 주인공’의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게 해주면 아이들은 마음속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스토리텔링의 교육적 효과가 큰 만큼 여기에 대한 교사들의 관심도 필요하다. 황 대표는 “좋은 스토리텔러는 똑같은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해 전달하는 게 아니라 듣는 이의 요구나 성향에 맞춰서 이야기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교사들이 학생의 수준이나 상황을 고려한 ‘맞춤형 스토리텔러’가 되라는 뜻이다.

글·사진 최화진 기자 lotus57@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