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바람따라 춤추는 능선에 햇살이 부서지다

바람따라 춤추는 능선에 햇살이 부서지다


작지만 볼거리로 꽉찬 섬, 굴업도

 

 개머리능선을 뒤덮은 수크령 이삭으로 파고든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오길 잘 했다.

이런 생각이 든 건 섬에 발을 딛고 채 5분도 되지 않아서다. 사실 오는 과정에서 몇 번이고 망설였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굴업리, 여의도 면적의 절반이 조금 넘는 섬에는 9가구 20여명이 살고 있다. 바로 가는 배편도 없어 덕적도에서 갈아타야 한다. 오전 8시 20분에 출항하는 덕적도행 쾌속선을 타기 위해 아침 일찍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했지만 11시까지 대기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기상특보도 없었는데 먼 바다 물결은 연안과는 또 다른 모양이다. 망설임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처음부터 일정이 틀어지는데 가볼 만한 곳이라고 소개해도 되나? 다행히 바다 사정이 좋아져 11시에 출항한 배는 1시간10분 후 중간 기착지인 덕적도에 도착했지만, 이곳에서 두 번째 회의가 밀려왔다. 오후 1시30분 출항예정인 굴업도행 배는 또 3시까지 대기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오늘 중으로 갈 수는 있는 걸까? 결국 1시50분 출항 허가가 떨어지고 1시간 후 굴업도에 무사히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해변 숲길 사구 일몰, 발길 닿는 곳마다 탄성 목기미해변의 바다색이 하늘색과 대칭을 이룬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선착장에서 마을로 가는 오솔길은 '아름다운 숲' 대상을 받았을 정도로 운치있는 숲길이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목기미해변에서 부자가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고 있다. 뒤편으로 보이는 산이 연평산이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모래사장과 하늘이 지평선을 이루는 목기미해변에 나무 전신주가 서 있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연평산으로 가는 언덕에 자리잡은 캠핑족. 인공의 방해가 적은 굴업도는 캠핑족의 로망이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연평산 정상에서 본 굴업도 전경. 잘록한 해변이 갈라놓은 바다와 덕적군도의 섬들이 한눈에 보인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풍선사구에 자란 풀이 바람의 힘으로 모래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코끼리바위 해변의 일몰. 마침 날이 좋아 붉은 하늘 기운과 검푸른 파도가 조화를 이뤘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코끼리바위해변에서 일몰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한 여행객이 맨발로 얕은 바다위를 걷고 있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배에서 내린 승객들은 선착장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핸드폰을 꺼내 들고 사진 찍기에 바쁘다. 날씨는 점점 좋아져 뭉게구름이 떠 있는 하늘은 더없이 쾌청했다. 바다는 하늘색을 닮는다고 했던가? 야트막한 산을 사이에 두고 위아래로 분리된 하늘과 바다는 짙은 코발트 빛으로 대칭이다. 선착장에서 마을로 가는 길모퉁이 바위 언덕에는 연보랏빛 해국과 노란 산국이 여행객을 반긴다. 섬에 마을은 하나밖에 없다. 도로도 선착장에서 마을까지 1.5km 정도가 전부다. 마을로 가는 길은 찻길로 돌아가거나 오솔길로 질러가는 방법이 있다. 택시나 버스도 없으니 걷는 수밖에 없다. 섬을 동서로 연결하는 목기미해변 초입에서 왼편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오붓한 숲길이다. 규모는 작지만 ‘아름다운 숲’ 대상까지 받은 오솔길이다. 높지 않은 소사나무 군락이 아담하게 터널을 만들었고, 바닥엔 잎 넓은 천남성 천지다. 꽃대마다 알알이 붉어질 주먹만한 열매뭉치가 탐스럽다. 숲길을 빠져 나와 언덕을 한 모퉁이 돌면 마을이다. 어울리지 않게 마을 이름이 ‘큰말(큰 마을)’이다. 옛날엔 ‘작은말’도 있었다는 얘기다.

굳이 마을로 먼저 간 이유는 민박집에 점심을 예약했기 때문이었다. 덕적도에서 미리 요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민박집 음식 맛이 궁금했다. 꽃게간장게장과 꽃게 탕, 가시리 튀김 등 바다 내 물씬 풍기는 점심상이다.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그 이상이다.

굴업도도 식후경, 본격적으로 섬 여행에 나섰다. 첫 번째 행선지는 섬 동쪽 연평산이다. 해발 128m로 덕물산(138m) 다음으로 높은 곳이다. 덕물산은 덕적도, 연평산은 연평도 방향으로 튀어나와 있다. 마을로 오던 길에서 먼발치로 봤던 목기미해변을 지난다. 폭이 좁은 해변이 바다를 양편으로 갈라 놓은 모양새가 사빈(沙濱)이기도 하고, 모래 언덕과 연결된 사구(沙丘)이기도 하다. 모래사장과 하늘이 맞닿는 지평선에 애자만 매달린 나무 전신주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애잔하다. 지금은 없어진 작은말에 전기를 공급하던 흔적이다.

해변을 지나 전망 좋은 언덕엔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미리 자리 잡았다. 사실 굴업도는 캠핑족들의 로망이다. 어떤 인공의 소음과 불빛도 없는 완전한 자연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섬에 숙박시설이 부족한 것도 야영객이 많은 이유다.

연평산으로 오르는 길은 바람에 몸을 낮춘 소사나무군락 사이로 나 있다. 대체로 걷기에 어렵지 않지만 마지막 약 20m는 수직절벽이다.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마침내 정상에 서면 잘록한 허리를 따라 분리된 세 개의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목기미해변이 갈라놓은 양쪽 바다와, 덕물산과 연평산 사이 붉은모래해변이다. 섬의 반대편 끝인 개머리 능선까지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로 덕적군도가 바다 위로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하산하는 길엔 풍선사구를 거쳐 코끼리바위 해변으로 내려간다. 늪으로 빨려 들어가듯 쑥쑥 빠지면서 미끄러지는 사구의 느낌이 생경하면서도 기분 좋다. 사람들이 왜 모래사막을 그리워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이름에서 짐작하듯 코끼리 모양의 바위가 있는 해변엔 일몰풍경을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날이 좋았다. 붉은 하늘아래 검푸른 바다, 노을이 반사되는 해변, 모든 게 완벽한 색의 조화를 이뤘다. 해가 지자 목기미해변 맞은편엔 이미 달이 높이 떠올라 있었다. 물기 어린 해변의 달빛산책이 운치를 더한다.

바람의 섬, 바람의 풍경, 굴업도의 바람. 개머리능선을 뒤덮은 수크령 수염으로 파고든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수크령이 뒤덮힌 개머리능선 뒤로 푸른 덕적군도의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개머리능선으로 오르는 길에서 본 큰말해수욕장은 마을보다 훨씬 넓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여행객들이 수크령이 뒤덮힌 개머리능선을 걷고 있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큰말해수욕장의 파도가 빚은 모래결이 아름답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다음날 목적지는 개머리능선이다. 큰말해변 오른쪽 끝에 언덕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약 80m 높이의 산 중턱부터는 나무도 없어 전망이 툭 트였다. 마을보다 훨씬 넓은 큰말해변과 오른쪽 귀퉁이 토끼섬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능선의 길이는 약 1km, 양쪽 바다에서 시작한 바람은 끊임없이 경사면을 따라 불어 오르고, 나무도 풀도 그 바람 따라 능선을 향해 눕는다. 나무가 없는 초지는 억새대신 온통 수크령이 점령했다. 햇살이 파고든 수크령 수염은 바람에 일렁이며 붉었다 희었다 더러는 푸르렀다 제멋대로 색깔을 바꾼다. 개머리 능선이 빚어내는 풍경의 8할은 바람과 햇살이 담당한다고 해도 될 듯하다. 길은 능선이 뚝 떨어지는 곳, 해안절벽에서 끝난다. 못내 아쉬운 발걸음은 더 갈 곳이 없는데도 자꾸 바다로 향한다. 서해에서 만나는 푸른 바다는 동해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아름다운 해변과 사구, 초원과 숲길, 일출과 일몰에 바람의 풍경까지 굴업도는 작지만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풍경으로 꽉 차 있다. 섬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다시 배에 오를 때까지 발길 닿는 곳마다 탄성이 끊이질 않지만, 굴업도 여행이 마냥 맘 편한 것만은 아니다. 사실 선착장에서 가장 먼저 여행객을 맞는 것은 C레저개발㈜의 ‘알림’판이다. 말이 알림이지 내용은 경고에 가깝다. 섬의 98% 이상이 이 회사 소유고, 외지인은 의도치 않게 ‘무단침입자’다. 다행히 골프장개발을 포기해 큰 훼손은 막을 수 있게 됐지만 앞으로 섬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땅은 사유지가 됐지만 풍경은 공유해야 한다. 굴업도를 본 이들의 공통된 바람이다. 굴업도의 바람은 그 말이 듣고 싶어 오늘도 끊임없이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는지 모른다.

[여행메모]

●덕적도행 쾌속선의 운항시간과 횟수는 날짜마다 다르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dom.icferry.or.kr)에서 미리 확인해야 한다. 덕적도에서 굴업도행 여객선은 평일 1회, 주말 2회 운항한다. 굴업도행 배는 덕적군도 5개 섬을 순회하는 노선으로 짝수일은 시계방향, 홀수일은 그 반대방향으로 운행한다. 시계방향으로는 2시간, 반대방향으로는 1시간 걸린다. 홀수일 들어가고 짝수일 나와야 배타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굴업도에는 식당과 상점이 없다. 모든 걸 민박집에 의존해야 한다. 5가구가 민박을 하고 있다. 굴업도민박(032-832-7100)에선 간단한 음료와 주류도 판매한다. 방 하나에 5만원, 식사 한끼에 7,000원 선이다. ●야영객이 많지만 공식적인 야영장은 없다. 그나마 수도와 화장실 등을 갖춘 곳은 큰말해수욕장뿐이다. 개머리능선 끝자락이 야영지로 인기 있지만 물이 없다. 오물 해결책도 단단히 세워야 한다.

굴업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