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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교과 간 경계 허물어 ‘T자형 인재’로 기른다

교과 간 경계 허물어 ‘T자형 인재’로 기른다
한겨레

[함께하는 교육] 융합인재 교육 바람

교육부가 ‘2015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을 발표했다. 통합사회와 통합과학 교과서를 발행해 창의융합형 인재를 기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부의 발표로 ‘융합’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이미 우리 교육 현장에서는 스팀교육이나 융합교육을 통해 교과 간 벽을 허무는 시도가 일었다.

‘메디치(Medici) 효과’. 서로 관련 없는 것들을 결합해 뛰어난 작품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것을 뜻한다. 융합을 얘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용어다. 학문과 학문, 각종 연구 분야, 서비스산업에 이르기까지 ‘융합’은 이미 대세다.

지난 24일 교육부는 ‘2015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을 발표하며 인문·사회·과학기술에 대한 기초 소양을 함양해 창의융합형 인재로 성장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새 교육과정에서 제시한 창의융합형 인재의 정의는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기술 창조력을 갖추고 바른 인성을 겸비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고 다양한 지식을 융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데 교육 현장에서는 이미 융합교육을 시도해 교과 간 벽을 허무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다. 그들 앞에 햄버거가 놓인다. 그들은 햄버거를 먹기 전 손으로 빵 위에 깨알로 적힌 점자를 읽는다. 점자를 읽은 장애인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린다. 이유가 뭘까.

2개 이상 교과목 결합해
추론하고 체험하며 학습
전국 180개 교사동아리 활동
“감성 자극, 흥미 유발에 효과”
방과후교실 활용에 그쳐 한계
미래융합인재 양성 목표로 한
과학예술영재학교 잇따라 생겨

지난 24일 인천 신현여중 과학교과교실. 자유학기제 교과연계 선택 프로그램 시간에 권순애 교사가 보여준 유튜브 동영상 내용이다. 영국 인기 햄버거 브랜드 ‘윔피’의 광고다. 빵 위에 깨알로 ‘당신을 위한 100% 순소고기 햄버거’라는 글귀를 일일이 점자로 새겨 넣었다. 업체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내 전 체인점에 점자메뉴판을 도입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지난 24일 인천 신현여중 과학교과교실에서 권순애 물리교사(맨 오른쪽)가 도덕과 과학, 기술가정 교과를 연계한 스팀교육을 진행했다. 공개수업 뒤 컨설팅이 진행된 이날, 수업에 참관한 이들이 활동 내용을 둘러보고 있다.
이날 수업은 1학년 도덕, 2학년 과학과 기술가정 교과를 합친 ‘스팀교육’으로 이뤄졌다. 구체적으로 시각장애 체험 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갖기(도덕), 눈의 구조와 기능 살펴보기(과학), 거리센서와 엘이디(LED), 아두이노(오픈소스를 기반으로 한 마이크로 컨트롤러. 다수의 스위치나 센서로부터 값을 받아들여 엘이디나 모터와 같은 외부 전자 장치들을 통제해 환경과 상호작용이 가능한 물건을 만들 수 있음)보드를 이용해 거리에 따라 반응하는 창작물 제작하기(기술가정)로 진행됐다.

스팀(STEAM)교육은 ‘Science(과학)·Technology(기술)·Engineering(공학)·Arts(예술)·Mathematics(수학)을 가리키는 말로 ‘융합과학 인재교육’을 뜻한다. 스팀교육의 기준은 세 가지다. 반드시 2개 이상의 교과 또는 요소를 결합할 것, 상황 제시-창의적 설계-감성적 체험 과정으로 학습을 진행할 것, 과학기술에 대한 흥미와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과학 내용을 포함할 것 등이다.

신현여중 권 교사는 올해부터 스팀교사연구회에 참여해 스팀교육을 시작했다. 스팀교사연구회는 스팀교육에 관심 있는 교사들의 동아리 모임으로 현재 전국에 180개가 있다. 앞선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햄버거 광고를 보고 “시각장애인을 배려한 광고가 신선하다”, “우리처럼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손으로 점자의 문구를 읽고 좋아하는 걸 보니 뿌듯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후 아이들은 드라마 예고편 영상을 눈을 감고 들으며 눈으로 보고 들을 때와 차이점을 비교해봤다. 장애인의 애로사항을 느끼는 동시에 눈의 중요성을 깨닫기 위함이다.

또 아이들은 모둠별로 아두이노를 직접 만들어 시작장애인을 위한 경보기나 도난방지 시시티브이에 적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나눴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장치를 만들었어요. 앞에 아무것도 없다가 물체가 다가오면 센서가 반응해서 멜로디 음과 불빛의 색깔이 달라져요. 거리가 멀면 민트색, 가까우면 빨간색으로 변해요.”

수업이 끝난 뒤 권 교사와 그의 수업을 참관한 사람들이 모여 ‘스팀교육 컨설팅’을 진행했다. 스팀교사연구회를 공동 운영·지원하는 시도교육청과 한국과학창의재단은 일 년에 두 번 컨설팅을 한다. 스팀교사연구회 교사의 수업을 보고 조언해주고 스팀교육에 대한 사례와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다. 이날 컨설턴트로 나선 조영식 이화여대 산업디자인과 교수는 “햄버거 동영상을 도덕 교과와 결합해 설명했는데 아이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흥미를 유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며 “반면, 아이들이 만든 아두이노가 거의 다 비슷해 창의적 설계 부분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거리센서를 이용해 실생활과 밀접하게 적용할 수 있는 사례를 들었다. “가령, 남학생들이 좌변기를 사용할 때 소변이 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거리센서를 활용해 좌변기와 일정한 거리에 다가오지 않으면 계속 소리가 나게 한다. 가까이 가야만 ‘조용히’ 볼일을 볼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지난 23일 경기도 성남 분당고 방과후교실에서 열린 스팀교육 현장. 이날 수업은 기후변화와 지속가능 발전의 개념을 과학과 영어를 연계해 게임 형식으로 진행됐다. 임성은 교사가 아이들의 토론을 지켜보며 도움을 주고 있다.
교사들 팀 이뤄 교과 연계 수업하니 효과 톡톡

지난 23일, 경기도 성남 분당고 1학년 방과후교실에서는 장혜경 과학교사와 임성은 영어교사가 스팀교육을 진행했다. 이 학교는 지난해부터 ‘스팀리더스쿨’로 지정돼 운영 중이다. 스팀리더스쿨로 지정되면 지역 거점 연구학교로 전체 수업의 20% 이내로 스팀교육을 적용하고, 1개월에 1개 이상 스팀형 창의적 체험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이날 주제는 ‘기후변화로부터 지구를 지켜라’였다. 과학에서 나온 기후변화와 지속가능발전 개념을 연계해 게임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각국의 기후변화가 부르는 여러 문제를 영어 읽기활동을 통해 읽고 정리하는 프로젝트 수업이었다.

아이들은 모둠별로 한국·일본·캐나다·스웨덴·투발루·덴마크 등의 국가를 정했다. 그리고 총 8차에 걸쳐 경제우선 개발, 균형 개발, 환경우선 개발 중 하나를 선택했다. 각각 경제우선 개발은 10, 균형 개발은 8, 환경우선 개발은 5점의 개발포인트가 주어졌다. 모두의 개발포인트를 합친 숫자에 따라 지구 기온이 마이너스 0.2도에서 플러스 1.2도까지 오르내렸다.

학생들은 국제 상황을 고려해가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투발루 국민은 세계 최고 기후 난민이 됐고 언젠가 나라가 수몰한대. 위기 상황을 고려해 일단 균형 개발을 하자”, “한국은 어떨 거 같아? 경제우선 개발을 택하겠지? 우리는 어떡하면 좋을까?”

4차 개발 이후 각국이 모여 모의유엔환경보전회의를 열고 지구를 살릴 방법을 논의한 뒤 기온에 따라 지구의 상태가 변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진지했다. 조별로 대표 한 명씩 나와 의견을 조율했다. “경제우선 개발만 하는 캐나다가 너무 이기적이다”, “다음 개발 때 환경을 우선시하는 개발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면 차라리 경제우선 개발만 해서 지구를 파괴해버리겠다”는 등의 의견을 주고받았다.

수업 내내 장 교사와 임 교사는 교실을 돌아다니며 질문을 받고 규칙을 설명해주는 ‘수업 도우미’ 노릇을 맡았다. 정규 수업시간에는 진도도 빠듯하고 제약이 있어서 팀티칭 형식의 스팀교육은 주로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이나 방과후교실 시간을 활용한다.

수업에 참여했던 최혜진양은 “난 문과생이다. 평소에 ‘넌 문과니까 과학 안 해도 돼’, ‘이과는 영어 안 해도 돼’ 등의 말들을 하는데 이 수업을 들으니 그 벽이 허물어지는 같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김혜원양도 “보통 아이들이 2학년 때 배울 과정과 연계된 방과후수업을 선택한다”며 “그보다 문·이과 경계 없이 이과생으로서 과학과목도 듣고 영어 공부나 토론까지 할 수 있어서 의미있고 친구들과 활동 위주로 배우니 수업이 살아있는 느낌”이라고 전했다.

임 교사는 “영어 지문을 보면 환경뿐 아니라 과학, 예술 등 다양한 내용이 등장한다”며 “하나의 주제를 정해서 다른 교사와 교수학습과정을 사전에 협의한다”고 설명했다.

한국과학창의재단 박청담 연구원은 교사들이 가장 많이 요구하는 부분이 “스팀교육을 교과서, 교육과정 자체에 연계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 입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고교의 경우 따로 시간을 내서 스팀교육을 하기 어려운 현실이고, 교사들도 자체적으로 연구 개발해야 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2015 교육 개정안을 보면 통합과학과 통합사회 교과서를 발행할 예정이다. 지금의 융합과학 교과와 비슷하게 대주제로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을 하나로 묶은 형태다. 기존에는 문·이과생이 배우는 과학 과목이 달랐는데 통합과학으로 동일한 내용을 공부하게 된다.

경기도 오산중 김어진 교사는 “2011년도에 융합과학 교과가 생겼을 때 교사들이 ‘멘붕’을 했다. 자기 전공 분야는 깊이 알지만 다른 과목까지 엮어서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직 교과서가 발행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일단, 내용을 떠나 스팀교육의 형식을 확산시키면서 현장 교사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어서 통합 교육과정을 운영하면 통합교과서가 나와도 더 수월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전문성은 기본, 다양한 학문 끌어내는 능력 중요

제한적으로 스팀교육을 운영하는 학교뿐 아니라 아예 창의적 미래융합인재 양성을 목표로 한 학교도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에 위치한 세종과학예술영재학교는 내년 3월, 인천에 위치한 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는 2016년에 개교할 예정이다. 예술과 인문학은 물론 수학과 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융합인재 양성이 목적이다. 이 때문인지 얼마 전 치러진 세종과학예술영재학교 신입생 모집에서 18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이 학교 교육커리큘럼 개발을 맡은 한국교육개발원 김주아 박사는 “흔히 융합에 대한 개념을 수학과 과학이 합쳐진 하나의 새로운 학문을 배운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며 “융합은 내용 자체가 아니라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서 다양한 학문을 융합해 사고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종과학예술영재학교는 무학년졸업학점제를 운영하며 창의융합교과와 스팀액티비티를 필수 학점으로 편성할 예정이다. 구체적인 교육과정 내용은 이달 말 마무리될 예정이다. 김 박사에 따르면, 일반 교과 외에 전체 교과과정의 약 12% 선에서 융합교육을 위한 창의융합교과 9종을 개발했다. 가령, 예술기반 융합교육은 현악기에 물리학이나 수학을 적용할 수 있다. 현악기의 진동과 공진 현상을 알아보거나 소리의 속성과 삼각함수를 주제로 현악기의 종류와 연주 방법에 따른 음의 차이를 알아보고 함수로 나타내는 식이다.

김 박사는 지난 4~5월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프로그램을 시범운영했다. 그는 “아이들이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활동으로 끝나지 않고 소리가 나는 원리를 더 알려달라고 했다. 깊이 있게 배우고 싶어 하고 통합적 과정을 이해하는 데 확실히 자극이 됐다”고 말했다.

“융합의 기본은 ‘전문성’이라고 생각한다. 교육과정의 80% 이상은 기존 학문을 깊이 있게 배우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래야 다른 분야와 소통도 가능하다. 지금 시대는 ‘티(T)자형 인재’(한 가지 분야가 아니라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지식과 기술력(I), 통찰력(ㅡ)을 모두 가진 사람)를 필요로 한다. 학문끼리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는 간 학문적 역량과 창의성이 통합교육의 핵심이다.”

글·사진 최화진 기자 lotus57@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