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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

고아한 정취와 편리함 잡은 한옥호텔

고아한 정취와 편리함 잡은 한옥호텔


 

안동시 고택 리조트 ‘구름에’의 칠곡고택 사랑채 마루 모습.

[한겨레]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한옥 리조트·호텔

일본의 최고급 숙소의 상당수는 전통 료칸이다. 요 깔고 자는 다다미방에 고급호텔의 쾌적함을 접목했다.

한옥숙소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200~400년 된 고택을 변신시킨 리조트와 한옥의 장점을 극대화해 설계한 호텔을 체험했다.

고색창연한 고택들이 모여 있는 ‘구름에’ 전경.

안동시 성곡동 산자락

고가옥 7채 활용한 ‘구름에’ 리조트

방 안에 방 넣고

벽 안에 벽 넣는 식으로

칠곡고택 사랑채 침실.

원래 집 훼손 최소화

오동도 바다 전망 여수 ‘오동재’

트여있는 누마루가 인상적


선조들의 지혜와 정신이 깃든 전통 한옥. 푸근하면서도 서늘한 고택에서의 하룻밤 휴식은, 사철 여행객들 마음을 잡아끄는 매력적인 여행 방식이다. 하지만 전통 방식의 한옥이 여행자를 위해 그리 편안한 숙소는 아니다. 옛 선비들 체취가 밴 고즈넉한 고택에서 머무는 일은 매력적인 전통 생활문화 체험 방식이지만, 아파트 등에 길든 이들에겐 불편한 숙소임이 틀림없다. 씻고 자고 먹고 볼일 보는 장소가 제각각이고 공동시설이라는 점, 비좁은 공간과 엄숙한 분위기, 방음이 안돼 보장받기 어려운 사생활 등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구름에’ 서운정의 욕실겸 화장실.

이런 사정을 반영해, 최근 전통 한옥의 멋과 호텔식 편의성·쾌적성을 접목시킨, 이른바 고급 한옥 호텔·리조트들이 잇따라 선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지난 2007년 최초의 고품격 한옥호텔을 기치로 내건 경주의 ‘라궁’이 문을 연 이래, 지금까지 한옥호텔로 명명된 숙소는 소규모까지 포함해 5~6곳에 이른다. 한옥의 정취를 느끼도록 하면서 불편은 최소화해, 품위 있고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고급 숙박시설이다. 지난달 문을 연 경북 안동의 한옥 리조트 ‘구름에’와 전남 여수의 한옥호텔 ‘오동재’ 등은 요즘 뜨고 있는 대표적인 한옥호텔들이다.

낡은 고택이 품은 최신식 객실 안동 ‘구름에’

경북 안동시 안동댐 밑 성곡동 산자락 야외민속촌에 지난 7월 문을 연 ‘구름에’는, 격조 높은 서비스와 첨단 편의시설을 내건 ‘고택 리조트’다. 고택의 몸체에 호텔 시설을 삽입한 형식이다. 본디 안동댐 건설에 따라 여기저기 옮겨놓았던 고택들을 몇년 전 한자리에 모으며 이뤄진 고택마을이었다. 문화재 지정이 안 돼 방치돼 있던 고가옥 7채를 비롯한 8채의 고택이 호텔식 숙소로 거듭난 것이다.

겉보기엔 여느 고택들과 매한가지이지만, 고택들의 내부엔 짜임새 있게 찔러넣어진 고급 객실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특이한 시설을 즐기려면, 먼저 프런트 데스크가 있는 까치구멍집(초가집)으로 가야 한다. 자세 낮춘 선비 같기도 하고, 친절한 마당쇠 같기도 한 지배인(또는 그 부인)이 안내와 관리를 맡고 있다. 객실 이용법과 주의사항, 공연 안내 등이 적힌 ‘환영 안내장’과 함께 원격 무선 작동의 첨단 스마트키를 받아 들어야, 200~400년 된 고택의 객실로 들어갈 수 있다.

여수시 한옥호텔 ‘오동재’ 독채 객실의 대청마루 모습. 통유리 밖으로 누마루가 보인다.

그윽한 분위기의 고색창연한 고택들은, ‘삐이꺽’ 대문을 열고 들어가 안마당 지나 댓돌에 신발 벗고 대청마루에 올라서서, 은은한 창호지의 격자무늬 여닫이문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순간,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바뀐다. 스마트키로 열리는 우윳빛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방이든 사랑방이든 행랑채 방이든, 흰색 톤의 환한 호텔 객실이 펼쳐진다. 물론 좁다. 하지만 벽 너머에서 비춰지는 간접조명이 자아내는 차분하고 화사한 분위기로, 좁다는 느낌도 수백년 묵은 고택의 방이란 느낌도 들지 않는다. 이 좁은 공간에 이불장도 있고, 옷장도 있고, 에어컨도 냉장고(일부는 마루에)도, 수납공간도 들어 있다.

내부 유리문을 열면 또다른 세계다. 대형 거울과 고급 세면용품을 갖춘 세면대, 유리 칸막이로 분리된 화장실과 샤워실, 짜임새 있게 배치된 수납공간이 펼쳐진다. 일부 객실의 화장실엔 대형 월풀욕조까지 들였다. 훤히 드러난 천장의 서까래들과 전통 방식으로 도배한 방바닥 장판, 그리고 격자무늬 문살이 옛 한옥의 정취 한자락을 전해준다. 이 좁은 한옥 객실에 들어찬 이 많은 편의시설들로 고택이 훼손되지는 않았을까.

“방 안에 방이 있고, 문 안에 문이, 벽 안에 벽이 있는 구조의 객실입니다.” 구름에를 운영하는 행복전통마을 이헌구 사무국장은 “고택의 전체 틀은 손대지 않고 방 내부에 새로운 벽과 문을 설치했다”며 “고스란히 들어내면 내부 원상복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짐을 풀고 이웃집 구경(투숙객이 없을 경우)에 나서볼 만하다. 10채 중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200년 전 이퇴계의 8대손 이귀용이 지은 계남고택(경북도 민속자료 제8호), 퇴계 9대손 이언손이 지은 정자 서운정, 10대손인 이휘면의 고택인 칠곡고택, 그리고 고성 이씨 문중의 재실과 정자들인 팔회당재사·감동재사·박산정·청옹정 등 모두 옛 멋이 살아 있는 건축물들이다.

‘오동재’에선 오동도 앞바다가 내려다보인다.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없는 고택 리조트에 해가 저물면, 투숙객들은 어디선가 한줄기 빛처럼 흘러나오는, 대금이나 단소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소리는 바람 속에서도 이어지고 빗속에서도 계속된다. 음악교사 출신 박준해(61)씨가 연못가 정자에 서서 매일 밤 대금이나 단소를 1시간쯤 연주(화·수요일 제외)한다. 피리 소리 여운은 잠자리 머리맡까지 따라온다. 광목(면) 이부자리의 투박하면서도 부드러운 질감이 온몸을 감싸올 무렵, 깊고도 질 좋은 잠이 찾아온다. 잠을 깨우는 건 들창문을 파고드는 새소리나 안마당에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 따위다.

고택 리조트 ‘구름에’는 안동시·경북도·문화체육관광부와 에스케이그룹의 행복나눔재단이 사회적 기업 행복전통마을을 설립해 선보인 숙박시설이다. 국내 대표적 건축가 중 한명인 김찬중씨가 설계를 맡았다.

오동도 바다 전망의 한옥호텔 여수 ‘오동재’

안동 구름에가 옛것·새것이 짜임새 있게 어우러진 신개념 숙소라면, 여수 ‘오동재’는 널찍한 누마루와 대청 등 한옥의 장점을 극대화시켜 새로 건축한 한옥호텔이다. 독채도 있고 연립식도 있다. 2012년 여수엑스포 개최에 즈음해 문 연 오동재는, 그 전해에 문을 연 영암의 영산재와 함께 전남개발공사가 운영하는 고급 한옥식 숙소다.

한옥호텔 오동재의 현관. 8 오동재 누마루형 객실의 거실.

오동도 앞바다와 여수세계박람회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경사면에, 사랑채 구실을 하는 본관 건물과, 5가지 형태의 객실 19개가 배치된 여섯 채의 한옥이 들어서 있다. 본관에 들러 입실 수속을 한 뒤 객실 열쇠를 받아 자신의 차량으로 객실 문앞까지 이동할 수 있다. 오래된 한옥에 비해 운치는 덜해도, 실용적인 공간 배치와 규모가 돋보이는 숙소다. 특히 시원한 대청마루(거실)와, 오동도 앞바다가 바라다보이는 대청 통유리 밖의 널찍한 누마루(일부 객실은 툇마루)가 인상적이다.

오동재의 유광현 총지배인은 “앞서 문 연 한옥호텔들의 단점을 보완해 새로 선보인 호텔”이라며 “전통 한옥의 멋은 살리면서 편의성과 프라이버시 보장을 강조한 점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바닷가에 자리한 숙소인 점을 고려해, 건물 바깥쪽엔 비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유리문을 달고 내부 공간엔 창호문을 달았다. 세면대 공간과 샤워실, 화장실 공간을 분리해 설치한 것이나, 서까래들이 보이도록 천장을 터서 내부 공간을 넓게 한 점도 좋았다. 해가 진 뒤 누마루에 나가 앉아 여수 밤바다를 바라보거나, 새벽녘 바다 쪽에서 떠오르는 해돋이도 감상해볼 만하다.

객실 형태가 다양하지 않고 내부 구조가 다소 획일적이라는 점, 누마루를 제외하고는 대청마루와 방바닥은 무늬만 살린 장판이라는 점 등은 아쉽다.

구름에와 오동재, 두 최신 한옥 호텔에서 잇따라 숙박체험을 해보는 호사를 누리면서 떠오른 궁금증 하나. 이것은 한옥의 진화일까 퇴화일까. 불편함이 특징이기도 한 전통 한옥이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변화한다는 건 진화라기보다 퇴화에 가까워 보였다. 이헌구 사무국장은 이에 대해 “전통 한옥의 미래를 향한 새로운 실험”이라고 정리했다. 지속가능한 전통 한옥(고택)을 위한 변화 모색 과정이라는 얘기다.

국내의 대표적 한옥 호텔이자 원조는 경주 신라밀레니엄파크의 라궁이다. 한옥의 멋과 편의성을 최대한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 궁궐식 한옥 호텔이다. 객실마다 노천탕을 들이는 등 형식과 내용, 가격 면에서 최고급 한옥 호텔로 꼽힌다. 전남 영암의 영산재도 인기를 끄는 한옥 호텔이다.

안동 여수/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