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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체험학습

상상을 작품으로…조립 블록으로 꿈을 쌓았어요

상상을 작품으로…조립 블록으로 꿈을 쌓았어요
[함께하는 교육] ‘레고 덕후’들의 성공스토리

공부에 몰입하는 아이에게 잔소리하는 부모는 없다. 하지만 몰입 대상이 장난감일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집안의 레고 블록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엄마도 있다. 한데 “레고에 몰입한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말하는 학생들도 있다.
한겨레
 

 

‘레고 좋아하는 청소년’에서 ‘레고로봇을 연구하는 대학생’으로 성장한 윤민혁씨(사진 왼쪽 둘째)가 학교 친구들과 장난감을 들고 미소를 짓고 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함께하는 교육] ‘레고 덕후’들의 성공스토리

공부에 몰입하는 아이에게 잔소리하는 부모는 없다. 하지만 몰입 대상이 장난감일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집안의 레고 블록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엄마도 있다. 한데 “레고에 몰입한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말하는 학생들도 있다.

“‘레고 덕후’(마니아를 일컫는 일본말 ‘오타쿠’를 한국어로 빗댄 말) 맞죠?”

지난 3일 기자와 만난 윤민혁씨가 환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대 컴퓨터공학부 3학년. 지금 다니는 대학에 입학하기까진 레고 도움이 컸다. 입학사정관제인 다빈치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한 민혁씨의 포트폴리오는 레고 이야기로 채웠다.

“초중고 시절 레고를 갖고 놀면서 푹 빠져 지내다가 결국엔 레고로봇까지 만들었다. 이런 활동들을 그동안 만든 레고 작품 사진과 함께 풀어썼다. 대학 합격에 큰 도움이 됐다.”

대학 진학시켜준 레고 포트폴리오
단순 장난감 아닌 창의적 학습도구
문제해결·공간지각 능력 길러줘
몰입 활동 격려해준 부모도 한몫
아이와 함께 놀다 아빠도 ‘덕후’로

‘장난감 마니아’에서 공대생으로 성장해

민혁씨와 레고와의 인연은 6살 크리스마스에 외할아버지가 비행기 레고 세트를 사주면서부터 시작됐다. 민혁씨는 중학교 졸업이 가까워져 오자 경기 안산 동산고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고 이 학교에 ‘상상’이라는 레고로봇 동아리가 있다는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다.

민혁씨는 이른바 모범생은 아니었다. 고교 1, 2학년 때 내신 성적은 평균 5등급을 맴돌았다. 학기 중, 방학을 가리지 않고 늘 레고 블록을 손에 달고 살았다. 윤씨는 “수업시간엔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레고를 만질 때는 내가 생각한 것을 구현할 수 있어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여섯 살 여자 아이. 대부분의 여자애들은 마론 인형을 갖고 놀지만 누구나 그런 건 아니다. 한양대학교 기계공학부 3학년 이수현씨가 그런 경우다. 이씨는 어릴 때 경주차, 트럭, 오토바이 등을 갖고 놀았다. 수현씨는 “장난감을 조립하는 취미,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레고로봇 동아리 활동 경험 등이 쌓여 지금 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었다”고 했다.

레고를 좋아하면 누구나 두 대학생처럼 될 수 있을까? 그런 건 아니다. 두 학생은 레고를 단순 장난감이 아닌 ‘창의적 학습도구’로 활용했다. 민혁씨와 수현씨는 레고 설명서대로 작품을 완성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블록을 조립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창작을 했다. 민혁씨의 아버지 윤상호(52)씨는 “아들이 레고를 갖고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응용 창작품을 완성했다”고 회상했다.

“처음엔 설명서대로 각각 다른 3단 비행기를 만들었다. 한데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세 개의 비행기를 합체해서 특이한 비행체를 완성했다. 설명서에 있는 건 시간과 공을 들이면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응용까지 하는 건 쉽지 않다. 깜짝 놀랐다.”

부모 지지 아래 창의 학습도구로 활용

두 학생 곁에는 레고를 단순한 놀이로 치부하지 않고 아이들의 활동을 지지해준 부모가 있었다. 민혁씨의 아버지 윤상호씨는 아들이 공부 이외의 것에 몰입하는 걸 나쁘게 보지 않았다. 공부하라는 잔소리보다는 “네가 정말 좋아하고 관심이 있다면 노는 걸 넘어서 꿈으로 펼쳐보라”고 격려했다.

윤상호씨는 “내 세대 때만 해도 부모님이 원하는 분야로 진출하는 게 미덕이었다. 한데 내 아이들만큼은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건강을 해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활동이 아니면 뭔가에 몰입한다는 건 긍정적인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수현씨의 어머니 문아무개(50)씨 역시 “여자가 장난감, 그것도 남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트럭, 로봇 등에 관심을 두면 어떡하냐”고 우려하지 않았다. 딸이 장난감에 집중하는 걸 보고 오히려 장난감의 특성을 유심히 살폈다.

“잘 들여다봤더니 수학 과목 중 도형 부분과 밀접한 면이 있었다. 딸이 레고를 갖고 놀 때 그 놀이에 충분히 집중하는 게 보여 좋았다. 완성한 각각의 레고 작품에는 아이만의 스토리가 들어 있었다.”

문씨는 다른 부모처럼 레고 박스를 뒤엎는 대신 “아빠가 퇴근하면 네 작품을 보여주고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권했다. 딸에게 공부 부담은 주지 않았다. 딸이 뭔가 좋아하는 게 있다면, 그만큼 학교 공부에도 집중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른바 ‘학원 뺑뺑이’를 돌리지 않고, 딸이 좋아하는 분야에 집중하게 도와주고 시종일관 관심을 기울였다. 덕분에 수현씨는 “대학 진학 뒤 수업을 들을 때 다른 친구들이 보통 어려워하는 도형 관련 문제 등을 쉽게 해결한다”고 소개했다.

어머니 문씨는 “아이가 교과공부만 잘해 대학에 진학하는 것만 강조하기보다는, 자기에게 맞는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자라길 바랐다”며 “장난감 덕에 그렇게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 좋다”고 했다.

“딸이 타의가 아닌 자의로 성취하는 경험을 했을 때 결과의 완성도가 더 높다는 것을 보면서,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지지해주기로 했다. 딸이 레고 본사가 있는 덴마크에 가서 일해도 좋겠다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경남 함양고 2년 이창준군은 최근 들어 영어 공부에 부쩍 재미를 느낀다. 창준군이 영어에 집중하게 된 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도, 부모님의 압박 때문도 아니다. 레고 때문이다.

창준군의 장래희망은 ‘레고 디자이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적성은 고려하지 않고 성적에 맞춰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지만 창준군은 조금 다르다. 레고 디자이너라는 꿈을 달성하기 위해 레고 본사가 있는 덴마크로 바로 가서 공부할 구상도 한다. 거기로 유학을 가려면 영어가 필수. 그래서 영어를 공부한다. 창준군은 “목표가 생기니 중1 때까지만 해도 별 관심 없었던 영어공부에 재미가 붙었다”며 “지금은 외국어 영역에서 1, 2등급을 받는다”고 말했다.

윤민혁씨가 자신의 방에서 레고로봇을 만들다 포즈를 취했다. 윤민혁씨 제공

문제해결력·공간지각력 길러주는 활동이기도

창준군과 조립식 장난감의 인연은 4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은 조립식 장난감을 만든 게 시작이었다. 그 뒤로 스스로 뭔가를 만드는 것에 흥미가 있다는 걸 알았다. 프라모델 등 다양한 장난감을 만들다가 레고를 만났다. 대다수 레고 마니아들이 그렇듯 숙제는 뒤로 미루고 레고 조립을 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방학 때 만들고 싶은 창작품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2시까지 레고만 붙잡고 있기도 했다.

“레고는 조금만 집중하고, 흥미를 기울이면 설명서에 없는 창작품을 만들 수 있다. 또 창의성, 문제해결력, 공간지각력 등도 길러준다. 교과와도 연관이 있다. 기술·가정 시간에 기계 운동 방식인 ‘링크 장치’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친구들은 어려워했지만 나는 이런 기계 장치를 자주 접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었다.”

전문가들도 레고, 큐브 등의 장난감에는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창의공학교육 솔루션 기업 퓨너스(funers.com)의 남이준 대표는 “레고는 학생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현실로 구체화하는데 유용한 교육도구”라고 설명했다. 안산 동산고 과학교사였던 그는 레고, 레고로봇 등을 통해 학생들이 창의적이고 실질적인 과학 교육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퇴직하고 현재 업체를 꾸렸다.

“종류가 3000개가 되는 레고 블록으로 만들 수 없는 물건은 없다. (구글링 해보면 레고로 만든 제트엔진, 밀링머신, 시속 30㎞로 달리는 자동차도 있다) 특히 레고 블록은 조립과 분해가 쉽다. 흐릿한 단계의 구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해보고 다시 수정하기 좋다. 스토리텔링 능력도 키워준다. 레고사는 스토리가 없는 제품은 만들지 않는다. 아이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거기에 맞춰 작품을 만들어 내기 좋은 도구다.”

부모들이 레고에 대해 갖는 가장 큰 불만은 가격이 비싸다는 점이다. 남 대표는 “초기 비용이 좀 들지만 레고 블록은 호환이 가능하다. 이미 갖고 있는 레고로 매번 새로운 작품을 만들며 20년 이상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만족할 때까지 놀게 해줘야 자기조절력 생겨

최근에는 레고의 교육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는 젊은 아버지들도 등장했다. 경기도 성남시에 사는 신용우(39)씨는 레고 마니아들의 동호회 브릭인사이드(brickinside.com)에서 ‘오불뚝’이란 아이디로 활동 중이다. 신씨와 함께 아들 신유식(초등 3년)군도 레고 마니아다. 아들은 4살 때 주의가 산만했다. 아들 집중력을 키워주려고 레고를 사줬다. 아이에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다가 아버지도 레고의 즐거움에 푹 빠졌다.

아들은 올해 10살이 됐는데 주변에서 예상하지 못한 칭찬을 듣는다. 담임교사는 아들을 두고 “문제해결력, 공간지각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신씨는 피아노 외에 다른 사교육은 받지 않는 아들이 이런 칭찬을 듣는 건 레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레고 블록으로 상상력을 펼치던 아들은 최근 들어서는 만화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예전엔 머릿속에 떠오른 무언가를 레고로 표현하더니, 요즘은 만화를 통해서 한다.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짜임새 있게 스토리도 담아낸다. 지금까지 단편만 수십 편 그렸다. 아들이 완성한 만화의 열혈독자는 친구들이다.”

레고에 푹 빠진 아이를 걱정하는 부모들에게 신씨는 “만족할 때까지 갖고 놀지 못하게 하거나 잔소리만 했을 때, 아이들은 자기조절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실컷 집중하게 놔둬야 스스로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고 강조했다.

“뭔가 스스로 만들어보고 놀아볼 기회를 줘야 하는데 많은 부모들이 완성품 장난감만 사준다. 아들 스스로 이것저것 만들어 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니 아이의 집중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더불어 아들과 레고 조립이라는 취미를 공유해 나에게도 평생 이야깃거리가 생겨서 좋다.”

김청연 기자 carax3@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