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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아이들 놀이터인데 왜 어른 시각으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아이들 놀이터인데 왜 어른 시각으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ㆍ독일 놀이터 디자이너 벨치크·놀이운동가 편해문씨 대담

일흔이 넘은 세계적인 놀이터 디자이너는 운동장과 놀이터를 보자마자 성큼성큼 뛰어다녔다. 슬리퍼와 청바지 차림은 가벼워 보였고, 10살 된 개구쟁이같이 장난스러운 표정도 곧잘 지었다.

지난 19일 전남 장성의 진원동초등학교 교정에서 독일 출신의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크(73)를 만났다.

광주교육청 초청으로 방한한 그는 광주에서 열린 ‘2014 세계인권도시포럼’에서 ‘어린이·청소년이 놀 공간과 도시’에 대해 강연한 뒤 진원동초를 찾아 학부모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제품 디자인을 공부하고 냉장고 디자인을 하던 벨치크는 1960년대 말 놀이터 디자인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 후로 40여년, 그는 세계의 크고 작은 도시를 다니며 수천개의 놀이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특정한 곳에서 특정한 놀이만 하라는 놀이터는 없어져야 한다”는 말을 설파하며 새로운 놀이터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왔다.

인터뷰는 한국의 공공놀이터 혁신가인 편해문씨와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벨치크는 “놀이터는 아이들이 어른들로부터 벗어나 즐겁고 자유롭게 놀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며 “놀이터를 제약하면 아이들은 위험이 뭔지도 모르게 커서 결과적으론 아이들을 위험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전남 장성의 진원동초등학교 교정에서 독일의 놀이터 디자이너인 귄터 벨치크(오른쪽)와 한국의 놀이운동가 편해문씨가 아이들의 놀이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 자기 안전 스스로 배우고, 놀이터서 위험 느끼는 경험 필요
빌딩 옥상에 놀이터 만들어 노인·아이 없는 사람들도 오게


편해문 = 한국의 아이들과 놀이터를 보고 어떤 인상을 받았나.

벨치크 = 놀이터를 보면 ‘놀고 싶다’ ‘이끌리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그런 느낌이 안 든다. 주말이고 평일이고 아이들이 없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도 관찰하면서 궁금한 게 하나 생겼다. 놀이터에서 재미있게 놀다 자연스레 다른 놀이로 옮겨가지 않고, 왜 (놀이기구 앞에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지 묻고 싶어졌다.

편해문 = 한국 부모들은 놀이터에는 꼭 놀이기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놀이터들이 너무 획일적이고 어른의 시각으로 만들어져 있다.

벨치크 = 놀이터에서 놀이기구는 중요하지 않다. 독일에서도 부모들의 의견을 들어 할 수 없이 그네, 미끄럼틀을 만들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니 그네 타는 시간 1분, 미끄럼틀 2분이고 나머지 시간은 자기가 만들어둔 자기만의 공간에서 놀았다. 어른들이 장소만 덩그러니 만들어 놓고 정작 아이들이 뭘 하면서 즐거워하는지 관찰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디자인한 놀이터가 큰 호응을 받는 것은 아이들이 뭘 좋아하는지 끊임없이 관찰한 결과다. 수십년간 아이들의 얘기를 듣고 그들의 놀이를 관찰하다 좋은 놀이터를 만드는 6가지의 황금률을 정하고 이 기준으로 작업하고 있다. 먼저 놀이터는 뭔가를 훈련하거나 어른들의 취향을 반영한 곳이 아니라 놀고 싶은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놀이터, 통제가 가능하고 조정할 수 있는 위험을 허용하는 놀이터, ‘8세에서 12세 이하의 아이만 이용 가능’ 등의 규제가 없는 놀이터, 아이들이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놀 수 있는 놀이터가 나머지 요소들이다.

편해문 =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한국 사회가 안전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놀이터에서의 위험과 안전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벨치크 = 아이들은 자기의 안전을 스스로 배워야 하고, 또 사실 아이들은 스스로 배운다. 이를 위해 스스로 놀이터에서 위험하다고 느낄 정도의 경험을 해봐야 한다. 모든 것을 다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만, 틀 속에서만 놀라고 하면 오히려 아이들은 위험해진다. 아이들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봐야 어느 정도에서 떨어지면 아프고, 어느 정도면 안 아픈지 스스로 알고 자기 수준에서 놀게 된다. 아이들이 좀 더 자유롭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편해문 = 공감한다. 나는 늘 작게 자주 다쳐야 크게 안 다친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늘 몇 명이서 손을 잡고 다니고 줄을 서는 문화인 것 같다고 지적했는데, 일제 식민지나 군사문화의 잔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독일도 비슷한 면이 있을 것 같다.

벨치크 = 1960년대 말 유럽 대학에선 무조건 복종하는 문화, 군대식 문화에 반대하는 운동이 있었다. 독일에서도 히틀러 시대와 같은 세상을 다시는 만들지 말자는 부모들의 각성이 사회 분위기를 바꿨다.

편해문 = 도시 한복판에 자연을 담은 놀이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또 공동체 회복 공간으로 놀이터를 활용하자는 움직임에 대해선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나.

벨치크 = 고층빌딩 옥상에 동산이나 놀이터 공간을 주거나 계단 등을 활용해 아이들의 놀이터를 만들 수도 있다고 본다. 놀이터는 노인들이나 아이가 없는 사람들도 찾을 수 있도록 디자인해야 한다. 협동매점 등을 함께 운영하는 식으로 서로 공유하는 곳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편해문 =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하다.

벨치크 = 제2차 세계대전 때 태어나 5~6살 때 폐허가 된 건물더미, 벽돌더미에서 장난감 없이 놀았다. 그래도 아주 행복했다. 왼손잡이에다 과잉행동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학교가 멀어 왕복 8㎞를 날마다 걸어다니다 보니 쓸데없이 에너지를 쓰지는 않았고 수업시간에도 집중을 잘한 편이다. 아이들은 계속 자라기 때문에 성장통이 있고 가만히 자리에만 앉아 있기 힘들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의 운동량이 너무 부족하다. 밖에서 많이 놀게 하고 공부는 잠깐만 집중적으로 시키면 오히려 사회가 바라는 아이들로 자라고 공부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편해문 = 한국에서도 놀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별히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나.

벨치크 = 미래를 보며 희망과 용기를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이들은 할 수 없지만 부모들은 정치를 바꿀 수 있다. 사회적인 각성이 일어나야 한다. 또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의 문화적 바탕 위에서 창의적인 놀이터와 놀이문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마친 뒤 벨치크는 교장을 만나 “아이들이 논 흔적이 많은 작은 흙언덕과 모래놀이터, 텃밭 등은 아주 훌륭하지만, 철사로 묶어놓은 원두막 밑과 나무그네는 튼튼하지 않고, 미끄럼틀도 너무 뜨거우니 여름이 오기 전에 덮개를 만들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벨치크는 23~24일 서울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와 한국조경사회의 초청으로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 ‘나의 놀이터 디자인’ 등을 주제로 강연을 할 예정이다.

<송현숙 기자 son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