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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래는?/직업관련

男女최고령 증권인 김광호·홍옥순 씨

男女최고령 증권인 김광호·홍옥순 씨

"새벽 4시부터 場 준비…100세 현역도 거뜬합니다"

증권사 1호 女과장 홍옥순 상무
남자보다 3배 일할 각오
50년간 현장 지켜와 예순에 3억 연봉 '뿌듯'

증권史 닮은 인생 김광호 상무
구조조정 쓴맛도 봤지만
지금도 내 힘으로 먹고사니 자부심 느껴
1960년대부터 증권맨 생활을 시작한 김광호 상무(78·오른쪽)와 홍옥순 상무(68)가 서울 충정로 골든브릿지투자증권 본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 상무는 “성공한 인생도 아닌데 쑥스럽다”며 옆모습만 찍어달라고 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1960년대부터 증권맨 생활을 시작한 김광호 상무(78·오른쪽)와 홍옥순 상무(68)가 서울 충정로 골든브릿지투자증권 본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 상무는 “성공한 인생도 아닌데 쑥스럽다”며 옆모습만 찍어달라고 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며칠 전에 택시를 타고 출근시간에 늦지 않게 서둘러 달라고 말하니까 운전기사가 깜짝 놀라더군요. 도대체 연세가 어떻게 되는데 직장에 다니느냐고 묻더라고요.”(홍옥순 상무·68). “지난 50여년간 매일 새벽 4~5시에 일어나 그날의 거래를 준비해 왔어요. 장성한 자녀가 네 명이나 되지만 이 나이까지 내 힘으로 먹고사니 얼마나 떳떳한지 몰라요.”(김광호 상무·78)

김광호 상무와 홍옥순 상무는 증권업계 최고령 직원이다. 김 상무는 1936년생, 홍 상무는 1946년생이다. 팔순과 칠순을 바라보지만 매일 출퇴근하며 현장을 지키고 있다. 이들은 골든브릿지투자증권의 계약직 임원으로 수십명의 VIP 고객을 상대한다. 50년째 증권업 외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을 9일 서울 충정로 골든브릿지 본사에서 만났다. 일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어렵게 꺼냈다. “사람을 만나고 돌아다니는 게 재미있다”고 홍 상무가 답하자 옆에 있던 김 상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당당한 현역’으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바쁘게 일하느라 결혼할 생각을 못 했다”는 홍 상무는 충남 논산에서 11남매의 넷째로 태어났다. 은행원이던 아버지 덕분에 집안 형편은 넉넉했지만 중3때 아버지가 실직했다. 5·16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정년을 5~6년 앞두고 현직에서 물러났다고 했다. “공부를 제법 했던 덕분에 서울여상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상과대학을 졸업한 큰 오빠의 권유로 증권사에 입사했죠.”

홍 상무의 첫 직장은 지금은 사라진 ‘건설증권’이다. 당시만 해도 5위권에 드는 꽤 큰 증권사였다. 그는 주로 경리 일을 맡았다. 그러나 주식매매가 재미있어 보여 시키지도 않은 영업을 뛰었다. 건설증권이 주가조작 사건에 휘말려 파산하기 직전인 1970년 대유증권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여자가 영업 현장에서 일하는 게 흔치 않던 시절이었는데 실적도 괜찮으니 업계에서 튀어 보였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대유증권은 이후 대유리젠트증권→리젠트증권→브릿지증권→골든브릿지투자증권으로 수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홍 상무는 지금까지 45년간 한 번도 회사를 옮기지 않았다.

“1976년 3월1일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직무대리 바로 위 직급인 ‘과장대리’로 승진했는데 여성으로선 대한민국 최초였어요.” 1986년 4월1일 과장 승진, 1990년 1월3일 차장 승진 역시 모두 전국 최초란 타이틀이 따라붙었다. 언론에도 대서특필됐다. “그때는 길거리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꽤 있어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홍 상무는 “대유증권으로 스카우트된 뒤 남성 동료보다 세 배는 더 열심히 일하자는 생각으로 뛰고 또 뛰었다”며 “여자 영업직원으로 남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그땐 정말 신바람 나게 일했던 것 같다”고 했다. “어느 날 주가가 올라 고객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큰돈을 번 것처럼 행복했다”고도 말했다.

힘든 일도 있었다. 주식값이 떨어지면 막무가내로 손실 보전을 요구하는 투자자 때문에 애를 먹기도 했다. 아예 버스를 대절해 지방에서 회사를 찾아온 고객들이 돈을 물어내라며 행패에 가까운 시위를 벌이곤 했다. 그는 “그럴 땐 고객이라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그냥 죄인처럼 참아야 했는데 참 힘들었다”고 전했다.

홍 상무의 ‘증권맨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는 1997년 말 찾아왔다. 외환위기로 증시가 폭락했을 때다.

“명동지점장 발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나이순으로 정리하다 보니 구조조정 대상 0순위더라고요. 그동안 일하게 해준 회사가 고마웠고 그래서 두말없이 사표를 냈더니 회사에서 투자상담사로 일해달라고 해 전직했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됐다. 계약직이어서 정년에 구애받지 않는 데다 성과급이 쏠쏠했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알고 지내던 고객들의 도움이 컸다. 고정 약정액이 300억원을 넘기도 했다. “60이 넘은 나이에 3억원이 넘는 연봉을 받아보니 제 스스로 대견하고 자랑스러워지더군요.”

김광호 상무의 삶도 굴곡이 많았던 우리나라 증권사(史)를 닮았다. 그의 고향은 북한 개성이다. 7남매 중 셋째다. 중학생이던 1951년 1·4후퇴 때 가족과 함께 인천을 거쳐 부산으로 내려왔다. 야밤을 틈타 고향을 떠날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부산에선 김 상무보다 7살 많은 형님이 직물 관련 무역업을 하면서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김 상무는 동아고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1962년 국일증권(현 현대증권)에 입사했다.

“1960년대만 해도 하루에 네 번씩 매수·매도 주문을 모아 단일가로 거래(격탁 매매)했죠. 수산시장에서 생선 경매를 하는 방식과 비슷했습니다. 모든 매매는 손으로 기록했고요. 처음엔 증권 거래 내역을 기재하는 시장 보조원을 했는데, 1970년인가 시장 대리인으로 승진했어요. 각 증권사를 대표하기 때문에 증권시장의 꽃으로 비유되곤 했지요.”

김 상무는 국일증권이 현대그룹에 인수된 1977년 시장부장으로 승진했다. 직장인의 ‘별’인 임원이 돼 현장 영업을 지휘하기도 했다. 잘 나가던 그였지만 1980년대 초 ‘변화’를 원하던 회사의 뜻에 따라 사표를 냈다. 이후 눈을 돌린 곳은 명동 사채시장이었다. 주로 채권 매매업을 했다. 그는 “1982년 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이 터지자 채권시장이 붕괴되다시피 했다”며 “몇 년 동안 일하다 쉬다 하면서 참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고 전했다.

김 상무는 1992년 다시 증권사로 출근할 기회를 얻었다. 제일증권(현 한화투자증권) 임원으로 지내던 친구가 투자상담사 일을 알선한 것이다. 지금은 없어진 조흥증권과 현대증권, 나중에 골든브릿지증권과 합병한 일은증권 등 여러 번 회사를 옮겼지만 업무는 같았다.

50년 안팎 증시를 주시해 온 두 사람은 어떤 투자 철학을 갖고 있을까. 한결같이 “빚내서 투자하지 말고, 우량주만 보라”고 강조했다. 홍 상무는 “그동안 작전 세력들이 주식 갖고 장난치는 걸 많이 봤는데, 끝까지 성공해서 돈을 번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며 “교과서대로 우량주 위주로 투자하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고 말했다. 김 상무는 “1960년대 후반 중동 건설붐이 일었을 때 단기간에 수백%씩 급등한 종목이 속출했지만 결국 제 자리를 찾아가곤 했다”며 “절대 무리한 매매를 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작년 말까지 계속됐던 골든브릿지증권의 ‘589일 파업’에 대해서도 “결코 반복돼선 안 되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회사 노조는 구조조정에 반대한다며 2012년 4월부터 금융권 최장기 파업을 벌였다. 노사는 결국 월 200만원의 기본급에다 개인별 영업수익의 50%를 성과급으로 나눠주는 식으로 임금구조를 바꾸는 데 합의했다.

홍 상무는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큰손 고객들이 많이 떠났고 회사 이미지도 실추됐다”며 “고객 자산을 관리하는 금융회사에서 2년 가까이 파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김 상무는 “금융회사 파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가슴에 새기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에게 언제까지 일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단 한 명이라도 나를 찾는 고객이 있고 건강이 허락된다면 이 일을 끝까지 놓고 싶지 않다.”

건강 비결? '집밥 도시락'에 주말마다 등산

국내 최고령 ‘증권맨’인 김광호 상무와 홍옥순 상무는 실제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다 자신감 있는 말투때문에 더 그랬다. 평소 건강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궁금했다.

홍 상무는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집밥을 즐겨먹고 항상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게 비결”이라고 했다. 김 상무도 “무리하지 않고 평소 정해진 일과에 맞춰 생활해서 그런지 건강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홍 상무는 요즘도 새벽 5시30분이면 눈을 뜬다. 그러고선 어김없이 경제전문 케이블채널인 한국경제TV를 시청한다. 간밤의 국제뉴스 등 당일 증시에 영향을 미칠 요인을 점검하기 위해서다. 출근할 때 항상 챙기는 것은 도시락이다. 간편하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다. 퇴근시간은 일반 직장인보다 빠른 편이다. 증시가 마감하면 1시간 정도 정리를 하고 오후 4시쯤 집으로 향한다.

김 상무의 기상 시간은 더 빠르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눈을 떠 신문부터 챙긴다. 경기 김포에서 서울 본사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2시간가량 걸린다고 한다. 퇴근시간은 홍 상무처럼 오후 4시께다. 그는 “몇 년 전까지는 퇴근 뒤 친구들과 더러 어울렸는데 요즘엔 곧장 집으로 간다”고 전했다.

주말마다 산을 찾는 것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김 상무는 북한산과 도봉산 등을 즐겨 오른다.그는 “험한 산을 장시간 오르는 건 아니지만 땀을 뻘뻘 흘리고 나면 만족감이 높다”고 했다. 홍 상무는 집 근처 남산 주변을 한 번에 2~3시간씩 산책한다.

■ 홍옥순 골든브릿지 상무

1946 충남 논산 출생
1965 서울여상 졸업 후 건설증권 입사
1970 대유증권으로 전직
1976 국내 최초 ‘여성 과장대리’
1990 국내 최초 ‘여성 차장’으로 승진
1998 외환위기 때 투자상담사로 전환

■ 김광호 골든브릿지 상무

1936 북한 개성 출생
1951 1·4후퇴 때 부산 정착
1962 동아고 졸업 후 국일증권 입사
1970 시장대리인 승진
1980 명동서 사채 중개
1992 제일증권 상담사로 전환· 조흥증권 등 거쳐 골든브릿지로 전직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