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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묻고 답하는 인문학적 사유…마음이 훌쩍 컸어요

묻고 답하는 인문학적 사유…마음이 훌쩍 컸어요
[함께하는 교육] 대학교수들의 중학생 철학수업

청소년들의 폭력, 집단 따돌림 문제가 사회적 논란거리가 된 지 오래다. 이런 환경에서 철학자들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경희대 비폭력연구소 철학전공 교수 6명이 연구활동을 넘어 직접 중·고교 현장으로 찾아가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는 법’ 등을 가르치고 있다.
한겨레
경희대 비폭력연구소 철학전공 교수 등 철학자들이 경희대 교정에서 철학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다 포즈를 취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함께하는 교육] 대학교수들의 중학생 철학수업

청소년들의 폭력, 집단 따돌림 문제가 사회적 논란거리가 된 지 오래다. 이런 환경에서 철학자들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경희대 비폭력연구소 철학전공 교수 6명이 연구활동을 넘어 직접 중·고교 현장으로 찾아가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는 법’ 등을 가르치고 있다.

‘람보르기니 자동차, 연예인 수지, 눈물 흘리는 사람의 눈, 인체해부도…’

한 남자 강사가 파워포인트에 이렇게 각기 다른 20여장의 이미지를 띄웠다. 학생 30여명이 집중했다.

“자, 이번에는 이 이미지들을 보면서 돈으로 살 수 있지만 사서는 안 되는 것은 뭐고, 그 이유는 뭔지 이야기해볼까?”

그가 ‘눈물 흘리는 사람의 눈’ 이미지를 가리키며 “이건 뭐지?”라고 묻자 여기저기서 대답이 나왔다.

“아이라이너!” “쌍꺼풀.” “감정?”

“그래. ‘감정’을 표현한 거야. 여러분 ‘감정노동자’라고 알아요? 그분들에게 돈을 주는 사장님이 판매원의 감정을 살 수 있을까? 자, 돈으로 사선 안 되는 게 뭐가 있을까?”

“무기!” “폭탄이오.” “인체!”

“인체? 좋아! 장기기증을 할 때 ‘기증’을 하지 돈을 받진 않잖아요. 왜 그렇게 소중한 걸 내줬는데 돈을 안 줄까?”

강사의 질문에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음…그러니까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팔면 사람도 물건처럼 되니까요.”

“그렇지. 박수 한 번 쳐주자.”

4일 오후 1시15분. 서울 성동구 경수중 2학년 6반 교실. 5교시 ‘치유와 성숙을 위한 중학생 대상 철학수업’(이하 ‘철학수업’)이 한창이었다. 가르치는 사람은 말하고, 학생은 받아 적기만 하는 식의 일반적 수업은 아니었다. 5개 모둠으로 나뉘어 앉은 학생들 사이에 서서 수업을 진행한 사람은 수업 내내 학생들에게 생각을 묻기 바빴다. “10억이 생긴다면 뭘 하고 싶어?” “도박? 왜 그렇지?”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대답을 이어갔다. ‘10억이 생긴다면…’이란 상상 속 질문으로 시작한 수업은 ‘돈으로 해서는 안 될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철학자 칸트의 정언명령(‘인간은 자신의 목적으로서 존재하며 임의로 사용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을 단순한 수단으로만 다루지 마라. 인간을 동시에 언제나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을 만나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일상의 소재가 사회적 맥락과 만나고, 그 맥락은 철학적 개념이 됐다.

 

 

지난 4일 이진오 교수가 서울 성동구 경수중 2학년 6반 학생들과 철학수업을 하고 있다. 김청연 기자

4년전 학교폭력 자살사건 계기
철학 통한 상담치료 실천 나서
“10억 있다면” “친구는 왜 필요할까”
일상 질문으로 수업 주제 정하고
시 써보기 등 흥미유발 방법 개발

발표력 늘고 생활태도 좋아져
학생들 변화에 교수들도 뿌듯

교육부 시민인문강좌 지원사업 일환

이 특별한 수업 진행자는 경수중에서 약 30분 거리에 위치한 경희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이진오 교수(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중핵교과)였다. 한데 이 학교에서 중2 학생들의 철학수업을 진행하는 사람은 이 교수만이 아니다. 이 교수 등 경희대 비폭력연구소(이하 ‘연구소’·소장 허우성 경희대 철학과 교수) 철학전공 교수 6명은 지난해 2학기부터 현재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한 시간씩 철학수업을 진행한다. 교육부 시민인문강좌 지원사업의 하나다. 2012년 당시 1학년 학생들부터 가르쳤으니 올해로 3년차다.

‘중2병’, ‘중2 아이들이 무서워 북한군이 남침을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악명 높은 중2 아이들을 교수들이 일부러 만나려고 한 이유는 뭘까. 4년 전 대구에서 중학생이 학교폭력으로 자살한 사건을 계기로 연구소 허우성 소장은 대학이 학교폭력 문제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연구소에서는 사회과학과 심리 상담 등을 전공하는 학자, 연구소 쪽 철학자 등과 함께 언어폭력, 집단따돌림, 학교폭력 실태조사 및 해결책 등을 담은 연구를 추진했다. 여기에 이진오 교수가 “직접 중·고교 현장으로 찾아가 폭력과 경쟁에 찌든 학생들에게 인문학적으로 사유하는 법을 알리는 게 학생들을 실질적으로 돕는 길”이라고 제안했고, 허 소장을 비롯해 연구소의 여러 교수들이 중·고교를 직접 찾아가는 데 뜻을 모았다.

철학수업 프로젝트 팀장을 맡은 이 교수는 “나를 포함해 비폭력연구소에도 속해 있는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 소속 학자들이 10여년 전부터 해왔던 연구와 경험 등이 이 철학수업의 사전준비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설명했다. 학회에서는 철학교육과 상담 등을 결합한 연구를 하고, 실제 지역아동센터, 중·고교 등을 찾아가 학생들에게 삶 속의 철학을 찾게 하는 활동을 해왔다. 이런 실천 사례는 철학수업 교수법, 교구 등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됐다. 이 교수는 “연구소가 철학 실천 운동을 하게 된 데는 4년 전부터 대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인문교양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자는 뜻으로 후마니타스칼리지를 운영하면서 ‘봉사’, ‘사회적 책임’ 등을 실천하기 위해 시민교육 교과목 등도 개설해온 경희대의 학내 분위기도 영향을 줬다”고 덧붙였다.

‘치유와 성숙을 위한 중학생 대상 철학수업’의 네 가지 원칙

1 철학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한다.

2 흥미롭게 수업한다. 흥미는 생각하는 일에 활력을 주며 낯선 문제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논리게임, 인터뷰 등 다양한 교수법과 교구 등을 활용한다.

3 어른들이 가르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관심을 갖는 관심사를 다룬다. 아이들이 경험했을 법한 예화를 시작으로 친구, 꿈, 외모, 사랑 등과 같은 주제를 다뤄본다.

4 사전 지식 없이도 누구나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다룬다. 평소 공부에 관심이 없었던 학생들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한다.

첫 철학수업은 2011년 서울전자고등학교에서 시작했다. 그 이듬해부터는 연구소 쪽에서 경수중에 제안해 수업을 하게 됐다. 2012년 철학수업 첫해 당시 정덕자 교장의 철학교육에 대한 남다른 뜻도 큰 구실을 했다. 정 교장은 “대다수 아이들이 왜 사는지, 스스로 이루고 싶은 게 뭔지 모른 채 학교에 온다. 학교폭력과 자살 등이 여기서 시작되는데 그런 아이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선 철학교육이 절실하다”며 연구소의 철학수업 취지에 공감했다. 2013년에 취임한 임희숙 교장 역시 이 뜻에 공감해 철학수업을 계속하는 중이다.

초기엔 어려움도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중학생들이었다. 이 교수는 “중학교 수업을 하고 경희대로 돌아와 대학생 수업을 하는 날은 마치 돈을 받고 천국을 여행하러 온 기분이었다”며 웃었다. 박은미 교수는 “중학생 대상 45분의 수업이 대학생 대상 4시간 수업보다 힘들었다”고 덧붙였다.

교수들은 “대책회의를 거듭했다”고 입을 모았다. 여러 번의 회의를 거쳐 아이들이 수업에 참여하게 할 만한 다양한 교수법, 교구 등에 대한 회의를 했다. 다양한 제안이 나왔고, 노하우도 쌓이기 시작했다.

서동은 교수는 “사탕을 갖고 들어가서 수업에 열심히 참여한 친구들에게 주는 작전도 짜보고, 아이들이 흥미를 갖는 난센스 퀴즈 등을 준비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최복희 교수는 수업 전, 중2 큰아들, 중1 딸에게 수업 때 해볼 질문을 미리 던져보기도 한다. 덕분에 자녀들과 대화 나눌 기회도 생겼고, 이 또래 아이들의 표현이나 행동을 이해하는 눈도 조금씩 생기고 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친구는 왜 필요한가?” 등 철학수업 주제는 누구나 관심을 기울일 만한 일상의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철학적 지식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돕자’는 원칙 아래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이 원칙을 포함해 철학수업에는 공통된 원칙이 네 가지 있다. 교수들은 ‘흥미롭게 수업한다’는 원칙에 따라 시 써보기, 인터뷰하기 등 학생들이 호기심을 기울일 만한 다양한 활동을 접목시켰다. 흥미로움이 생기면 생각하는 활동에 활력이 생기고, 낯선 문제에도 호기심을 품게 된다는 뜻에서다.

‘어른들이 가르치고 싶은 게 아니라 아이들이 관심을 갖고 싶어하는 관심사를 다룬다’는 원칙도 있다. 보통의 수업들이 아이들 일상과는 먼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기 쉽지만 철학수업은 돈, 친구, 꿈, 사랑, 외모, 폭력, 따돌림 등 학생들이 일상에서 경험했을 법한, 관심을 기울일 법한 사례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교수는 “이 점이 기존 윤리교육과 이 철학수업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설명하면서 “아이들이 경험했을 법한 일화들을 넣어 사회적 맥락을 더하고, 이 사회적 맥락을 이념이나 철학적 방향성과 연결짓는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원칙은 ‘사전 지식 없이도 누구나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위에 얘기한 세 가지 원칙을 실행하기 위해 마련한 원칙입니다. 보통 우리 교실에서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 위주로 자기표현을 하죠. 근데 철학수업에서는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실제로 수업에서는 이 교수만큼 학생들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김청수 교감은 “철학수업 덕분에 평소 조용했었던 몇몇 교실에는 활기가 보인다. 아이들 발표 실력도 부쩍 늘었고, 생활 태도도 좋아졌다”며 고마워했다. 학생들은 “교수님 수업을 들으면 생각을 깊게 해보게 된다”(윤도원군), “평소 생각 없이 넘겼던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생각하게 된다”(김지수양), “질문하고 대답하는 게 많아 좋다”(강우석군) 등의 소감을 털어놨다. 정성관 교수는 “수업을 해보니까 현재 중2 아이들에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 사람이 없다”며 “그런 상황에서 철학수업에서는 자꾸 말을 해보라고 하고,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다 들어주니까 아이들이 편하게 생각한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난 지금 자유” 일곱명이나 손들어

학생들의 변화에 교수들도 놀라는 때가 많다. 서동은 교수는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자기주장을 논리정연하게 펼치는 아이들이 반에 두 명 정도 나타나는데 나도 놀라고, 친구들도 ‘와!’ 소리를 한다”고 했다. 이진오 교수는 “흔히 우리나라 교실 안에서는 학습능력에 따라 일종의 경계가 생기는데 흔히 말하는 처진 아이들, 경계성 아이들도 수업시간에 자기 생각을 많이 말하며 자신감을 보여준다”며 “학습능력이 있는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을 동료로 인정하고, 존중하고 감싸주는 모습을 볼 때 고맙고 뿌듯하다”고 했다.

박은미 교수는 “오늘 명언 한마디를 써서 내는 활동을 했는데 한 여학생이 놀라운 글을 써서 냈다”고 설명했다. “‘내가 보는 너는 또다른 나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제가 전에 ‘입장의 상대화’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네가 봤을 때 상대가 틀린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아이 눈에 너 역시 틀린 걸로 보인다’는 내용이었죠. 명언 적은 걸 보니 제가 알려준 걸 넘어선 것 같습니다. 기특해서 칭찬을 해줬습니다.” 이준 교수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 눈을 감고 지금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보라’고 하니까 일곱 명이나 손을 들었다”며 “사실 아무도 손을 안 들 줄 알았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희망이 있구나 싶다”고도 이야기했다.

이런 변화는 우리나라 교실에서 학생 참여형 수업이 왜 필요한지를 말해주기도 한다. 이진오 교수는 “우리가 개척한 길이 더 견고해져서 더 많은 중·고교에서 교사들이 직접 아이들의 행복·성장을 위한 철학수업으로 해보게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비폭력연구소 허우성 소장은 “교수들이 연구에 더해 자신들이 연구한 것들을 사회에 적용하고 실천을 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며 “이 사례를 통해 다른 연구자들도 사회적 실천을 해보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좋겠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김청연 기자 carax3@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