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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學院으로 내모는 '선행학습 금지法'

學院으로 내모는 '선행학습 금지法'


 

올해 첫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치러진 지난달 12일 서울 종로구 배화여고에서 한 학생이 시험 문제를 풀고 있다. 오는 9월부터 선행학습금지법이 시행되면 학교 중간·기말고사, 대입 논술 등에서 교육과정을 벗어난 문제를 출제하는 것이 금지된다. /김지호 객원기자

[일반高엔 '족쇄'… 교과편성 자유로운 自私高는 유리]

-교육부, 선행교육 규제法 시행령 예고

어기는 학교 정원감축·재정불이익… 심화학습 수요, 사교육으로 몰릴듯

자사고·특목고는 2학년까지 수능 주요과목 끝내는게 가능

일반고는 3학년 1학기에 고3 과정을 한꺼번에 배워야

교사 절반 "사교육 안줄어들것"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교육부는 사(私)교육을 줄이겠다며 정책을 내놓는다. 정부 공식 통계로 연 20조원에 이르는 사교육비는 학부모에게 큰 부담이다. 최근 몇 년간 △학원 수업 오후 10시 규제 △특목고 입시 개편 △대입제도 변경 등의 사교육 대책이 잇따라 나왔다. 하지만 이 정책으로 사교육 수요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사교육 대책의 하나로 '선행학습금지제도'를 들고 나왔다. 초등학생에게 중·고교 수학 과정을 가르치는 등 학원들의 선행학습이 도가 지나쳤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정부는 지난 3월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 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선행학습 금지법)을 공포하고, 9일 이 법의 시행령안을 입법예고했다. 시행령의 주요 내용은 ①중간·기말고사 등에서 교육과정을 벗어난 문제를 출제하면 학교에 지원하는 예산을 줄이고 ②대입 논술·면접에서 고교 수준을 넘어선 내용을 출제하는 대학은 정부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없고 입학 정원을 10% 줄인다는 것이다. 또 ③선행 교육을 실시하거나 선행 문제를 출제한 교사는 징계를 받는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요컨대 '학교는 해당 학기에 편성된 과목만 가르치고 이를 시험에 출제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선행학습 현상의 주범인 사교육에 대한 대책은 모두 빠졌다. 학원들이 선행학습을 시키는지 아닌지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다 보니 당초 취지와 달리 이 제도는 사교육은 놔둔 채 공(公)교육의 발목만 잡는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이 상태로 오는 9월부터 법이 시행될 경우 적잖은 부작용도 예상된다고 교육계 인사들은 우려했다.

①고3 1년 과정을 한 학기에 다 배우라는 '탁상행정'

선행학습금지법으로 가장 위축받는 곳은 수능을 코앞에 둔 고등학교다. 고교 3년 과정을 다 배워야 수능을 치를 수 있는데, 수능은 고3 2학기 중반인 11월에 치른다. 그 때문에 고교에서는 2학년 2학기나 늦어도 3학년 1학기까지 앞당겨 진도를 마치고 이후에는 수능 문제풀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시간표는 1학년 때 수학, 2학년 1학기에 수I, 2학기에 수II, 3학년 1학기에 확률과 통계, 2학기에 기하와 벡터를 배운다고 짜놓고, 실제로는 1·2학년 때 3학년 과정까지 다 가르치는 것이다.

선행학습금지법이 적용되면 이것이 모두 불법이 되기 때문에 교육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3 교육과정에 한해 자율성을 주겠다고 했다. 예를 들어 앞으로는 3학년 1학기에 '확률과 통계' '기하와 벡터'를 동시에 배우고, 2학기에는 수능에 대비한 문제풀이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계에서는 "가뜩이나 어려운 고3 1년간의 교육과정을 한 학기에 몰아서 마치라는 건 교육 현실을 전혀 모르는 전형적인 탁상공론"이라고 비판한다. 3년짜리 교과과정을 수능 일정 때문에 2년 반 만에 마쳐야 하는 구조인데, 교과과정은 전혀 손대지 않고 3학년 1학기에 학생들한테 '소화불량' 상태의 교과 편성으로 해결하라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교육부의 시행령이 발표되자 네티즌들은 "그 어려운 이과 수학을 3학년 1학기에 몰아서 배우고 수능 치라는 건 재수해서 고4년을 다니든가, 아니면 학원 가서 미리 배우라는 얘기밖에 안 된다"고 비판했다.

②일반고에만 족쇄 채우는 정책

선행학습 금지 제도로 가뜩이나 위축된 일반고가 입시에서 더 불리해졌다는 비판도 나온다. 자사고와 특목고(외고·과학고)는 국가가 정해주는 필수 이수 단위가 3년간 77단위(1단위는 한 학기당 주당 1시간 수업)로 일반고(86단위)보다 9단위나 적다. 자사고는 그만큼 원하는 과목을 학교가 자율적으로 편성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국·영·수 등 수능 주요 과목을 고교 1~2학년 때 집중적으로 편성하고 가르칠 수 있어 입시 준비에 유리하다. 자사고·특목고는 수능과 관련, 선행학습이 가능한 것이다.

반면 일반고는 지금까지 일부 방과 후 수업을 통해 이 같은 차이를 보완해 왔다. 하지만 선행학습금지법이 시행되면 방과 후 수업에서도 주어진 교과과정을 벗어나면 가르칠 수 없다. 결국 일반고에서는 고2까지 주요 과목 진도를 마치는 것이 힘들게 됐다는 의미다.


서울의 H고 수학 교사 이모씨는 "고교 교육과정을 정상화하려면 법으로 학교를 규제할 것이 아니라 고교 교육과정 자체를 줄여주든가, 아니면 학교에 자율성을 대폭 주어서 고3 때는 제대로 입시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주는 등 근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③사교육 오히려 늘어날 가능성

선행학습금지법을 도입한 취지는 사교육의 폐해를 없애고 공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학생들이 학원으로 더 몰릴 가능성도 크다는 예측이 나온다. 학교 내 방과 후 학교조차 교과 진도를 앞당겨 가르치지 못할 경우 학원으로 가는 학생이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국교총이 지난 8~9일 초·중·고교 교원 200여명에게 '선행학습금지법이 학부모들의 사교육 부담을 실질적으로 덜어줄 것으로 보느냐'고 물었더니 절반에 가까운 48%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수도권의 한 고교 교장은 "없애라는 사교육은 그대로 두고, 공교육만 심각하게 위축시키는 정책"이라고 말했다.

☞‘선행학습’이란

해당 학기에 편성된 교과목 내용이 아닌, 다른 학기·학년에 편성된 교과목을 당겨 가르치는 것. 예컨대, 고등학교 2학년 1학기에 ‘수I’, 2학기에 ‘수II’를 편성해두고, 1학기에 ‘수I’과 ‘수II’를 다 가르치는 식이다.

[안석배 기자]

[곽수근 기자]

[김연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