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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

싱숭생숭 봄 마음, 바람꽃 보다 바람 들라

싱숭생숭 봄 마음, 바람꽃 보다 바람 들라


 

지난 3월13일 춘천 삼악산에서 만난 너도바람꽃.

[한겨레] [매거진 esc] 여행

잔설 속에 피어나 신비로운 자태 드러낸 너도바람꽃과 춘천 삼악산, 석파령 옛길 트레킹


봄바람이 살랑살랑 산과 들을 매만진다. 고운 손길 여린 바람결에 바람꽃도 피어난다. 여기저기 나도바람꽃 너도바람꽃, 바람기 느낀 꽃들이 고개를 든다. 바람꽃은 바람난 꽃일까, 바람 견디는 꽃일까. 이른 봄 얼어붙은 땅에서 잔설을 비집고 피어나는, 이 작고 아리따운 꽃들을 들여다보면 알 것도 같다. 얼었던 몸과 마음 풀려 싱숭생숭해진 처녀 총각들, 찬바람 견디며 피어나 살포시 웃는 꽃을 보면 너도나도 찌리릿, 바람 들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꽃일지도 모르겠다.

북한강 의암호 푸른 물빛 내려다보이는 강원도 춘천(봄내)의 삼악산과 석파령 옛길을 봄바람과 함께 걸었다. 골짜기마다 아직 잔설이 성성해도 바람결엔 봄 입김이 훈훈하다. 옛길 오가던 선인들 발자취를 따라가는 동안, 산자락 낙엽들 사이에서 얼굴을 내민 너도바람꽃 무리도 만났다.

“며칠 전까지 여긴 영하 8도까지 내려갔더랬어요. 그 와중에도 산비탈에서 너도바람꽃이 보이기 시작하데요.” 삼악산 자락에서 만난 덕두원리 주민이 말했다. 쌓여 녹지 않은 눈더미가 여기저기 보이는 산자락, 깔린 낙엽들 사이를 들여다보니 앙증맞은 자태의 흰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른 나뭇잎 더미를 비집고, 5~6㎝쯤 되는 가는 꽃대를 밀어올려 흰 꽃송이를 활짝 열었다. 다섯 장 흰 꽃잎, 흰 꽃술 끝에 작은 주황색 꽃밥들이 도드라지게 빛난다.

삼악산 상원사 쪽 등산로 암릉에서 바라본 의암호.

‘사랑의 비밀’ ‘사랑의 괴로움’

꽃말 지닌 너도바람꽃

바닥에 깔려 피어

조심스레 감상 해야


잔설 사이에 피어난 너도바람꽃 자태 아찔

봄꽃 중에서도 노란색 복수초와 함께 눈과 찬바람을 이기고 꽃을 피워 봄을 알린다는 너도바람꽃이다.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14종에 이르는 바람꽃 무리에서 너도바람꽃은 변산바람꽃과 함께 가장 먼저 피는 꽃이다. 우리나라 중부 이북이나 남부 고산지대에서 자란다. 꽃말이 ‘사랑의 비밀’ ‘사랑의 괴로움’이니, 추위 속에 남몰래 피어나는 이 꽃의 이름은 비밀스럽고도 괴로운 사랑인 ‘바람’에 걸맞아 보인다. 바람꽃(학명 Anemone narcissiflora) 이름은 그리스어 ‘아네모스’(바람)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삼악산 등선폭포 등산로 협곡.

꽃을 감상하려면 극도의 주의가 필요하다. 낙엽 더미나 이끼 낀 고목 둥치, 발 내딛는 곳마다 여리고 흰 꽃들이 깔려 있다. 발길, 손길, 카메라가 다 조심스럽다. 한 사진가가 주위를 살피며 우물쭈물하더니 한쪽에 쌓인 눈을 평평하게 다듬어두고 마냥 서 있다. 어서 산에서 내려가주기를 바라는 눈치다. 내려오며 생각이 났다. 이자가 혹시 극적인 개화 장면을 찍기 위해 꽃을 파내 눈 위에 심고 사진 찍는다는 그 부류일까. 아니었기를.

삼악산(654m)은 높지는 않아도 가파르고 험한 바위산이다. 돌계단·철계단 디뎌 올라 밧줄에 몸을 의지해 땀을 빼야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쏟은 힘과 땀은 산행길 중턱이나 정상 주변에서 만나는 빼어난 전망 감상에서 되찾을 수 있다. 의암댐이 건설된 비좁은 북한강 물길 서쪽에 솟은 세 봉우리(용화봉·청운봉·등선봉)가 삼악산이다.

삼악산 산행길 대표 볼거리는 삼악산매표소 등산로 초입의 등선폭포 협곡 풍경과 의암호·춘천시내 일대 전망이다. 탁 트인 전망을 보려면 상원사 쪽 코스를 타야 한다. 상원사 쪽 등산로에서 강쪽을 내려다보면 붕어섬(그 아름답던 붕어섬은 태양열 전지판으로 뒤덮여 인공섬처럼 보인다)과 하중도·상중도 등 의암호에 뜬 섬들과 춘천시내, 그리고 하류 쪽 의암댐까지 한눈에 잡힌다.

삼악산 등선폭포 협곡, 의암호 조망 볼만

등선폭포 협곡은 5억7000만~25억년 전에 퇴적된 모래암석들이 굳어져 형성된 규암층이 오랜 세월 동안 갈라지고 무너져내려 형성됐다는 자못 웅장한 바위골짜기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등선폭포·승학폭포·백련폭포·옥녀담·비룡폭포 등 꽤 볼만한 폭포와 소들이 협곡을 타고 이어져 산행객의 발길을 잡는다.

등선폭포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건 100년 전이다. 일제강점기 북한강변을 따라 경춘차도를 개설(1911~1915년)하며 알려져, 당시 이곳을 탐방했던 강원도지사 등 인사들이 등선폭포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 이전엔 경천폭포·삼학폭포라고도 불렸다.(문소총서5 <삼악산-바람의 세월 그 길섶에서> 참조) 각 폭포 주변 바위에는 폭포와 소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최근 등산로를 다듬고 철계단을 놓으며 일부 글씨들이 가려지거나 훼손됐다. 등선폭포가 알려지고 이름 붙여진 내력이 협곡 초입의 절벽에 세워진 ‘등선폭 기념비’(1957년)에 한문·한글 혼용체로 적혀 있다.

삼악산 청운봉 밑 능선의 삼악산성 서문 터.

협곡을 뒤로하고 올라 물소리가 잦아든 뒤 정상·능선 갈림길에서 만나는 작은 절집이 흥국사다. 후삼국시대 궁예가 왕건과 전투를 벌일 무렵 세웠다는 절이다. 천혜의 절벽 요새인 삼악산 둘레엔 당시 쌓았다는 석성 흔적이 뚜렷하고, 기와를 구웠다는 와데기(왜데기), 궁예의 궁궐이 있던 대궐터 등 지명이 남아 있다. 흥국사 대웅전 건물은 오래된 것이 아니지만 거대한 느티나무 앞에, 깨지고 부서지고 닳아빠진 작은 석탑 하나가 서 있어 이곳이 옛 절집이었음을 알려준다. 주변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흥국사를 ‘큰 절’이라 부른다.

삼악산엔 궁예·왕건 전투와 함께 더 오래전인 부족국가 시대 맥국과 개국의 전투 이야기가 겹쳐 있다. 맥국의 태기왕이 이곳에 산성을 쌓고 개국 군사들과 대치하다 성이 함락되면서 패해 횡성 태기산 쪽으로 갔다고 한다. 이때 개국 군사들의 말을 모아뒀던 곳이 강 건너편의 말골, 군사들이 옷을 널어 말렸던 곳이 의암이라고 한다.

흥국사 밑 두부와 막걸리 등을 파는 간이식당 앞에서 왼쪽으로 올라 능선에 이르면 무너져내린 채 뚜렷이 남아 있는 옛 산성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등선봉 갈림길에서 오른쪽 능선을 따라 잠시 걸으면 돌무더기가 쌓인 산성의 서문 터에 이른다. 개국의 군사들이 이 서문과 북쪽 능선의 북문을 통해 산성을 공격했다고 전해온다. 춘천의 옛길 탐사 전문가인 신용자씨는 “고조선이 연나라에 패한 뒤 서해를 거쳐 춘천 일대에 들어와 진을 쳤는데 이것이 맥국”이라며 “맥국은 이 일대에서 200~300년간 버텼던 것으로 알려진다”고 말했다.

청운봉에 오르면 산성 흔적이 더 뚜렷해진다. 가파른 암릉을 활용해 산성을 쌓은 모습이다. 청운봉 돌무더기엔 누군가 ‘616m, 청운봉’이라 써놓았지만, 실제 높이는 545m다. 가파른 산길을 밧줄을 잡고 내려가 몇번 오르내리기를 30~40분쯤 반복하면 널찍한 임도가 뚫린 석파령(350m)에 이른다.

춘천부사 인수인계식 열던 옛 고개 석파령

석파령은 경춘차도가 뚫리기 전까지 한양~춘천을 잇는 중요한 통로였다. 춘천으로 부임하고 이임하던 관리들이나 상인들이 오가던 험준한 고갯길이다. 길이 하도 험해 말을 타고 가던 관리들도 두려움에 떨며 내려서 걸어갔다고 한다. 선인들은 한양에서 마석고개·가평고개를 넘어온 뒤, 북한강변 당림리를 통해 석파령을 넘고 덕두원 새수고개를 다시 넘어, 신연강(현재 의암호) 나루에서 배를 타고 춘천으로 들어갔다.

석파령(席破嶺)이란 이름에 유래가 있다. 조선시대 춘천부사가 부임하고 이임할 때 이 고개 정상에서 교구식(인수인계식)을 치렀는데, 비좁은 자리를 둘로 나눠 의식을 치렀던 데서 연유했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 이 고개를 넘어 부임하던 양구 현감이 하도 힘들어 마을 사람에게 ‘짐을 양구까지 져 날라주면 면장을 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면장 자리를 노리고 짐을 날라준 주민을 현감은 끝내 모른척했다고 한다. 덕두원리엔 지금도 ‘안될 일에 힘을 쓰는 사람’을 일컫는 ‘짐꾼 면장’이란 말이 전해온다.

춘천시는 최근, 옛사람들이 오가던 석파령 고갯길을 찾고 다듬어 18.7㎞의 석파령너미길(서면 당림리~석파령~덕두원~수레너미길~한백록 장군 묘~장절공 신숭겸 묘)을 조성해 놓았다. 한국전쟁 전까지 고개 정상에 조선시대 석파령 고갯길을 넓히고 보수했다는 내용을 적은 ‘석파령지 빗돌’이 세워져 있었는데 사라졌다고 한다.

임도와 임도 위아래로 난 옛길을 따라 20여분 걸어 내려오면 덕두원리 다릿골이다. 다릿골 실개천 너머, 민가 옆 오르막에 낡은 빗돌이 하나 서 있다. 고종 때 춘천부사를 지낸 민태호 애민선정비다. 왕가의 외척이자 수구사대파의 핵심 중 하나로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 의해 살해당한 인물이다.

춘천/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 여행정보

가는 길 서울에서 서울외곽순환도로~강일나들목~서울·춘천고속도로~강촌나들목~403번지방도~강촌리~46번국도 우회전~삼악산 등선폭포 입구.

강원도 춘천시 효자동 ‘풍물감자옹심이’

먹을 곳 강원도 춘천시 효자동 ‘풍물감자옹심이’의 옹심이메밀칼국수·메밀전병(사진), 서면 방동1리 신숭겸 묘역 입구 ‘서면손두부’의 두부전골·닭요리, 등선폭포 주차장 입구 ‘가람휴우’의 청국장·손두부.

묵을 곳 춘천시 효자동의 캣츠호텔(모텔급) 등 모텔들, 남산면 북한강변의 엘리시안강촌리조트.

삼악산·석파령 코스 북한강변 등선폭포 입구로 올라 흥국사와 삼악산의 한 봉우리인 청운봉(545m)을 거쳐, 석파령 옛길을 따라 내려가 다릿골(덕두원리)에 이르는 코스는 약 6㎞ 거리. 약 4시간 소요.

삼악산 산행 주로 두 코스가 이용된다. 상원사 쪽으로 올라 흥국사·등선폭포로 내려오거나, 그 반대 코스. 3시간 소요. 약 4㎞. 많은 등산객이 가파르지만 전망 좋은 상원사 쪽으로 올라 등선폭포 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선택한다. 가파른 암벽길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힘들고 위험하다.

주변 걸을 만한 곳 소설가 김유정 고향마을 ‘실레 이야기길’(신동면 증리 김유정문학촌 주변), ‘구곡폭포길’(남산면 강촌~구곡폭포), ‘의암호 나들길’(서면 금산리~오미나루~신매대교~의암호산책로~공지천~송암동) 등.

춘천 여행정보 실레 이야기길 등 해설사 신청 춘천시청 관광과 (033)250-3545, 봄내길 걷기 프로그램 예약 ‘금토’ (033)251-9363, 김유정역 관광안내소 (033)250-4300, 남춘천역 관광안내소 (033)250-3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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