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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래는?/직업관련

권대섭, 조선 백자달항아리를 현대에 되살리다

권대섭, 조선 백자달항아리를 현대에 되살리다

복스러운 달항아리. 권대섭은“단순하고 소박하다는 얘기로는 달항아리를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권대섭은 여러 작품 만들지 않고, 완벽에 가까운 원형 항아리는 망치로 깨부숴가며 말간 백자에 신화를 담았다. 세상은 그 안에‘소우주’가 있다고 열광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전 항상 말해요, 최고 작품은 다음 가마에서 나올거라고"

"기이한 인연들이 이 달덩어리를 만들었습니다"

圓形 가까운 작품 두 점 만들었는데 며칠 고민하다 술마시고 다 깨버렸다

그냥 놔두면 다신 작업 못할거 같아서

백자달항아리를 현대인들도 사랑하는건 우리 민족의 DNA때문

흰색과 백색은 다른 색… 백자 색깔 들여다보면 그 다양함이 상상초월

도공(陶工)의 집은 동양화를 품고 있었다. 검단(黔丹) 줄기 너머 봄빛 완연한 팔당호(八堂湖)가 찰랑댔고 그 뒤로 금사리(金沙里) 분원리(分院里)가 아른댔다. 조선 백자에 나오는 '분원산수'다. 그는 그 속에서 25년을 살아왔다.

금사, 사기그릇 굽던 터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분원, 이름 모를 500여 조선 장인(匠人)의 넋이 잠자고 있다. 조금 떨어진 도마(陶馬), 사람 괴롭히는 여우의 혼(魂)을 억누르려 질(陶)로 만든 말(馬)을 고개에 세웠다 해 붙은 이름이다.

이런 풍경 속에 사는 권대섭(權大燮·58)의 한옥 속에 들어서는 순간 탄성이 나왔다. 잘생긴 맏며느리 얼굴같이 생긴 달덩이 넷이 두둥실 떠올라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예술의 정화(精華)라 불리는 백자달항아리다.

조선시대 반가(班家)에서 아꼈다는 백자달항아리는 큰 사발(大壺) 둘을 붙여 만든다. 우윳빛 유약(釉藥)이 달을 연상시킨다해 그리 불린다. 한민족 정신을 상징하지만 세상에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예인(藝人)들은 아쉬워했다.

화가 김환기(金煥基)는 그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 고유섭은 '무기교의 기교'라 했다. 최순우는 후덕(厚德)이라 했다. 영국인 버나드 리치가 "현대 도예가 나아갈 길을 가르쳐준다"며 가져간 백자달항아리는 지금 대영박물관에 있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기대는 10분도 안돼 틀어졌다. 도공이 하지 않은 말이 기자의 이마에 진땀이 돼 흘러나왔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그의 아내 김지영(55)이 나섰다. "으이구 답답해, 저 양반이 원래 저래요."

신동

권대섭은 초등학생 때 신동(神童)으로 소문났다. 전국 대회에서 상(賞)을 휩쓸었다. 국전(國展) 심사위원을 지내며 충남고 교사로 있던 이동훈이 스카우트할 정도였다. 권대섭은 모든 이들의 기대처럼 홍익대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군(軍) 복무 후 3학년에 복학할 즈음이었다. 인사동거리에서 그는 못박힌 듯 서 있었다. 무심코 바라본 백자(白瓷)에 넋을 잃은 것이다. 몇 시간을 바라보던 그는 "이걸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람 팔자(八字)가 그렇게 바뀌었다.

―아무리 백자가 좋기로서니 십년 넘게 해온 그림을 버립니까.

"미술을 할수록 입체(立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미술계에 대한 실망도 작용했어요. 제가 파벌 이런 걸 굉장히 싫어합니다. 지금도 도예가협회 같은 데 가입하지 않고 있거든요. 당시 미술계는 무슨 무슨 파벌(派閥)이다 하면서 자고 나면 싸움질만 벌였어요. 어차피 돈이 없어 학교도 못다닐 정도였어요. 대학은 4학년 때 그만뒀습니다. 그 뒤론 단 한 번도 미술을 해본 적이 없어요."

―집안이 학비도 못 도와줄 정도로 가난했습니까.

"제가 3남1녀의 둘쨉니다. 선친(권순용·2008년 작고)이 대전 삼광중학교를 세웠어요. 전 재산을 교육에 환원한 분입니다. 저희 보고는 '알아서 살라'고 하셨어요. 저희 아버님이 원래 그런 분이셨어요. 진로에 대해서도 '각자의 길을 가라'는 정도만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런 빈털터리가 도자기는 어떻게 배웠습니까.

"군 복무 중 설원기라는 친구를 사귀었어요. 지금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면서 지금 한국예술영재교육원장을 맡고 있어요. 그의 아버님이 한국일보 워싱턴특파원을 지낸 뒤 그레이하운드 사장, 대한여행사 사장을 지낸 설국환 선생님이었습니다. 제가 도예를 배우려할 그즈음, 설 선생께서 인테리어 회사를 만든 겁니다. 막다른 길 같아 보이지만 인생에는 꼭 빠져나올 길이 있어요."

―그 회사에 취직했군요.

"1년 가까이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요. 절 불러 '너, 도자기하겠다고 했다면서', 그 한마디로 다 결정이 된 겁니다. 인테리어 회사였지만 설 선생께서 도자기 사업에 관심이 많았어요. 경기도 용인에 시설을 만들었어요. '오원도자기'라고. 그런데 맨손으로 할 순 없잖아요."

―당연히 전문가가 필요하겠지요.

"일본 규슈(九州) 이만리(伊万里)에 있는 나베시마요(鍋島窯)의 오가사와라 선생을 초빙한 겁니다. 그분께 절 소개해주면서 '잘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일본에서 5~6개월 배우다 잠깐 귀국하고 다시 일본에 가서 배우는 생활이 시작된 겁니다."

―1979년부터 1984년까지 그곳에서 수학했다는데 바로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나베시마요는 도자기로 굉장히 유명한 곳입니다. 임진왜란 때 우리 도공들이 끌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도예를 가르치면서 발전했다고 들었어요. 일본 나가사키항(港)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개항을 했잖아요. 그 루트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된 도자기가 바로 우리 옛 선조들이 만든 거였어요. 제 스승인 오가사와라 선생이 7대(代)째인데 당시 40대였지만 광장히 혹독하게 가르쳤습니다."

―얼마나 엄격하기에.

"첫 1~2년은 청소만 했어요. 지도랄 것도 없고 눈치껏 보고 배워야 합니다. 재료에 대한 소중함 같은 것을 스스로 깨우치게 만드는 거지요. 제 아내가 충남고 2년 후배인데 대입(大入) 준비를 하는 학원에 다니다 교제했어요. 8년 연애 끝에 1980년 12월 22일 결혼했는데 오가사와라 선생께서 '곧 돌아오라'고 했을 정도였어요. 결혼한 다음다음 날 일본으로 되돌아갔지요(아내 김지영은 '특별히 납품할 일도 없었는데…'라고 했다)."

―일본에서의 교육을 마치자마자 독립했지요.

"전 예술로서의 도자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상업적인 일을 해야 하니…. 사실 설 회장 입장으로 보면 상업적인 성과를 내야할 시점이었지요. 고민 끝에 설 회장님을 찾아가 '나오겠다'고 했어요."

―이른바 '배신'을 때린 거군요.

"설 회장님 입장에선 그렇게 느끼셨을 수도 있어요. 제 말을 듣고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어요. '내가 자네에게 투자한 돈이 2억원이 넘네'라고 했어요. 하지만 절 비판하진 않았어요. '젊으니까 나가서 택시를 몰아도 살 수는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순순히 내보내주셨어요."

―대단한 분입니다.

"1995년 덕원미술관에서 첫 전시회를 할 때 비로소 그분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요. 알고 보니 설 회장께선 제가 도자기를 그만 둔줄 알고 계셨대요. 1997년 일본 동경에서 한국문화원 주최로 전시회를 할 때는 몸이 편찮으시면서도 찾아주셨어요. 그리고 '네가 뭔가를 해냈구나'하고 기뻐해주셨어요."

―나중에 달항아리라도 하나 드렸습니까.

"하하."

천상의 옥음

참으로 기이한 게 인간의 삶이다.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구는 또 다른 누구를 낳고는 성경(聖經)에 나오는 구절이지만 권대섭의 인생에선 인연이 인연을 낳았다. 무일푼으로 설국환 회장의 품을 벗어나 하릴없이 인사동 거리를 걷고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장한 신창호 회장이란 사람이 이 실업자의 손을 꽉 잡고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당신, 내가 가마 만드는 것을 도와주겠느냐."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처지의 권대섭에겐 천상(天上)에서 들려오는 옥음(玉音)이나 진배없었다.

―신 회장이란 분은 또 어떻게 알게 된겁니까.

"그분이 당시 타임지(誌) 국내 총판을 하고 있었어요. 저와 관계가 전혀 없었는데 한 고미술상이 그분에게 절 소개했다는 겁니다."

―단 한 번에 기회를 줬나요?

"두어 번 만났어요. 제게 그러시더군요. '너, 뭐하냐'. 그래서 '놉니다'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 바로 밑에 그분이 가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저보고 수리(修理)를 하라는 겁니다. 아주 예쁜 한옥으로 척 보기에도 별장(別莊)같아 보이는 집이었어요. 그러면서 제게 백지(白紙)수표까지 내주는 겁니다."

―'땡잡았다'는 게 바로 그런 거군요.

"그렇지요. 본인의 차(車)까지 내줬고 아예 '여기 눌러 살면 어떻겠느냐'고까지 했어요."

―지금은 나아 보이지만 당시면 외진 곳이었을 텐데.

"외졌지요. 서울 사는 젊은 여자(아내)가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트럭이 하루에 겨우 10대나 지날까, 고속도로도 생기기 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내는 당시 제 모습이 너무 피곤하고 안타까워 보였나 봐요. 한 번 와 보더니 '무조건 오겠다'고 하더군요. 신 회장님은 참 고마운 분이에요."

―또 뭘 해줬습니까?

"연탄을 1000장 들여주고 쌀 한가마니도 들여주셨어요. 그리곤 제게 묻더군요. 작업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고."

―좀 왕창 달라고 하지 그랬습니까.

"(그때 권대섭의 아내가 말했다. '저 양반이 더 넉넉하게 받았으면 했는데 한참을 계산하더니 딱 자기 작업에 쓸 비용만 받았어요.') 그래서 월 30만원쯤 필요하다고 하니 '한꺼번에 줄까, 다달이 줄까'라고 묻는 거예요. 한꺼번에 받으면 다 써버릴 것 같아서 매월 나눠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작업에 몰두할 분위기가 됐군요.

"이 주변에 조선 관요의 가마터만 200개가 넘어요. 한마디로 우리 도자 예술의 메카지요. 당시 딸이 세살배기였는데 시간만 나면 아이 손잡고 사금파리 주우러 다녔어요. 그 파편 주워다가 공부를 했지요. 부서진 조각이지만 형태가 있고 이어보면 연결되기도 하거든요. 그 형태를 그려보기도 했고요. 포클레인이 나타나면 제가 학교도 안 나갔어요. 제가 최근에도 주워온 게 있는데 보여드릴게요."

―사금파리가 지금도 나옵니까.

"예전보다는 적어졌어요. 지금은 안 그렇지만 일본인들이 한때 떼로 몰려와 마구 가져갔거든요."

―그런데 학교라뇨?

"생계는 이어야 하잖아요. 선화예고에서 강사를 했습니다. 1주일에 두번 나갔어요. 지금 영국에서 유학 중인 딸도 그 학교를 나왔어요. 딸이 졸업하면서 학교를 그만뒀고요. 딱 15년 만이지요. 라면이라도 먹어야 살 잖아요."

권대섭은 자꾸 모자를 쓰려 했다. 그 때 기자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 휑한 모습을 보고 히히 웃더니 "그래도 모자는 쓰고" 라며 가마 옆에 앉았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라면?

"그때는 정말 그랬어요. 제 아내가 가장 먹고 싶어한 게 칼국수였는데 그것도 못 사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집은 어떻게 산 건가요.

"그게 또 인연이에요. 이 집터가 원래 파평 윤씨 종중(宗中) 소유였어요. 잔금도 다 못 치렀는데 10년 동안을 기다려주셨어요. 나중에 잔금 갚고 등기할 때 여섯분의 도장이 필요했는데 그때도 아무 문제가 없었고요."

대기만성

대기만성(大器晩成)은 권대섭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5년간의 일본 수학과 남종면 이석리에서의 10년 공부 끝에도 그는 '뜨지' 못했다. 그는 돈 되는 일에 손대는 여느 도예가들과 달리 평생 백자항아리와 백자사발만 만들었다.

그에게 물었다. 왜 백자만 고집하느냐고. 그가 말했다. "백자는 굉장히 다양합니다. 엄격하고 부드럽기도 하지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그걸 보고 '슬프다'고 했지만."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까.

"사실 고미술사학자들이나 야나기 무네요시가 백자달항아리를 두고 한 말들이 있지만 전 전부 '구라'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 사람들 입장일 뿐이지요. 저도 미(美)의 기준은 전통에 두곤 있습니다. 하지만 백자달항아리를 두고 단순·소박·무작위성(無作爲性)만 말하는 건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백자를 유백·설백·회백으로 나누지만 실제 백자색깔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다양함이 상상을 훨씬 뛰어넘거든요."

―백자는 백자 아닌가요?

"흰색과 백색은 다른 겁니다. 동양화가들이 쓰는 먹색이 검은색과 다른 것과 같은 이치지요."

―그래도 특별한 게 있다면.

"모든 과정이 철저하게 수(手)작업으로 이뤄진다는 거지요. 백자 소지(흙)는 손과 호미로 분류해 모으고 도석도 쇠몽둥이로 빻아 체에 거릅니다. 그걸 햇볕에 사나흘 말리면 꾸득꾸득해지지요. 그러면 발로 밟아 끈떡끈떡하게 만든 뒤 치댑니다. 그제서야 형태를 만든 뒤 몇단계로 말리고 초벌구이와 순수낙엽재를 이용해 장작가마에서 소나무 장작으로 굽는 겁니다. 온도는 1300도 정도인데 온도계는 사용하지 않아요. 순전히 불 색깔이나 녹아 있는 유약의 상태를 보고 제가 판단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데 약 20~30일이 걸리지요."

―그럼 몇개가 살아남나요.

"전 가마에 백자달항아리의 경우 2~3개밖에 넣지 않습니다. 처음엔 다 망한 경우도 있고 지금은 절반 정도가 살아남지요."

―백자에 쓰는 흙은 어디서 나나요.

"전 고령토와 양구 백토(白土)를 혼합해 씁니다. 처음부터 최고품을 고집했어요. 백토는 제일 좋은 게 톤 당 60만원쯤 합니다. 나무는 강원도 홍천에서 조선 소나무를 구해다 쓰고요. 흔히 유약을 말하는데 그건 기본이에요. 금방 만들 수도 있고 재료에 관한 책을 보면 알 수도 있어요."

―평론가들의 말을 너무 정면으로 반박하면 신비감이 사라지지 않나요.

"전 지금까지 인터뷰를 한번도 하지 않았어요. 다른 도예가들이 기술이다, 작가의식이다, 혼이 들어갔다, 이런 소리들을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 촬영하면 도인(道人)이나 된 것 같은 행색들을 하는 것도 불만이고요."

―제가 도공 취재만 하면 고생합니다. 막사발 장인 천한봉 선생 취재 땐 신문 확장하러 온 사람 취급받았고 광호요 취재는 '간첩취재'로 변했고. 권 선생도 처음 절 봤을 땐 자료만 내주며 '여기 다 있다'고 말을 안 하려 했잖아요. 도예가들이 원래 그렇습니까?

"외골수가 돼야 하거든요. 말도 안하고. 사람도 안 만나고. 자칫하면 '또라이'가 돼요. 그러니 그럴 수밖에요. 저기 밖에 있는 저 젊은이도 제게 배우겠다고 이곳에 왔는데 사실 걱정돼요. (머리에 손가락을 대고 빙빙 돌리며) 이렇게 될까봐요."

―그래도 그렇게 되진 않았잖아요.

"제가 1984년 일본에서 돌아온 뒤 첫 개인전을 연 게 1995년입니다. 1978년부터 17년간 공부만 했어요. 오로지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참 복이 많습니다. 이 집을 살 때도 돈이 없어 2000만원을 빌렸는데 20년이나 기다려줬어요. 다른 사람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일 텐데."

―그 뒤에는 빛을 보지 않았나요.

"처음 덕원미술관 전시 때 25점을 내놨는데 팔린 건 5점뿐이었어요. 평균 200만~300만원쯤 했는데 그래도 가스비도 못 낼 지경이었습니다. 2006년부터 조금씩 주목받았는데 그때까지도 빚이 3000만원이나 됐어요."

―그런데 뜨면서 한방에 갚았다는 말이겠군요.

"전 아직도 뜨지 못했는데…, 사실 제가 백자 외에는 외도(外道)를 한번도 안 했는데 빚 때문에 딱 한번 했어요. 서미갤러리에서 식기(食器)를 한번만 만들자고 해 만들었거든요. 그 때 번 돈으로 그 자리에서 빚을 다 갚았어요."

―최근 들어 백자달항아리가 각광받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봅니까.

"우리 민족의 뭐랄까, 그래 DNA! 뭔가 유전자가 있는 것 같아요."

분원산수

권대섭은 1995년 국내, 1997년부터 해외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큰 새(大鵬)는 쉬 날지 않지만 한번 날개를 펴면 창공(蒼空)을 뒤덮는다. 현재 그의 작품은 멕시코·러시아·방글라데시 국립박물관과 우리 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의 도자기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서미갤러리와의 인연이다. 도예가와 수요자의 만남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지면서 권대섭은 작품에만 전념하게 됐다. 서미 홍송원 관장과의 만남은 2000년 한 갤러리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가 어떻게 했기에요.

"당시 사발 20~30개, 항아리 2~3개를 전시했는데 모두 사간 겁니다. 그는 시각이 조금 다른 것 같았어요."

―그 뒤부터 가격이 폭등했지요, 요즘은 2000만~3000만원까지. 일부에선 서미갤러리가 값을 올린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던데. 서미나 권 선생이야 좋겠지만 가난한 사람은 만져보기나 하겠습니까.

"하하, 할부(割賦)로 드릴 테니 하나 사세요. 제가 사실 작품을 많이 만들지 않아요. 한 해 평균 15개 이하거든요. 줄서서 기다린다고 막 드릴 수도 없고. 전 집에 재고(在庫)도 남겨놓지 않습니다. 지금 보는 저 달항아리 네 개는 제가 소장하려고 갖고 있는 거고요. 사실 비싸다곤 하지만 가격에 거품이 있거나 일부러 비싸게 받는 건 아닙니다. 연간 작업비에 준한다고 봐야지요."

―1997년과 98년에만 도쿄·요코하마·오사카에서 잇따라 전시회를 했지요.

"도쿄는 한국대사관에서 요청이 왔고, 그걸 본 일본의 갤러리 관장이 요청해 곧바로 요코하마에서 전시를 하게 됐습니다. 2007년엔 미국 뉴욕에서 했고, 작년엔 디자인 마이애미·바젤 아트페어에서 했고요. 그때 오가사와라 선생님도 오셨어요."

―그렇게 고생시켰다면서 스승이 밉지 않던가요.

"젊었을 땐 사실 이빨을 갈았지요. 어디 두고보자 하는 생각도 있었고. 그런데 그건 그때 생각이고 전 1년마다 꼭 스승님을 뵈러 일본엘 갑니다. 올해도 뵙고 왔어요. 연세가 들어서인지 요즘은 얼굴에 인생의 고뇌랄까, 노년의 단상(斷想)이랄까, 그런 것도 엿보이는 것 같고. 일본 전시회 때 오셔서는 흐뭇한 표정을 지어서 저도 감사했습니다."

―마이애미·바젤 아트페어 때 권 선생 작품이 세계적인 컬렉터들에게 팔렸지요.

"다섯점이 평균 2만달러에 나갔어요. 외국인들이 우리 백자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건 좋은 일이지요."

―여러 평론을 보니 권대섭의 백자달항아리가 옛 조선 도공들의 그것을 가장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말도 있더군요.

"항아리 형태는 기원전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제가 새삼스럽게 만드는 건 아닙니다. 18세기 조상들에 의해 이미 개성있는 모양이 만들어졌고 전 현재에 적합하게 해석할 뿐이지요. 다만 사람의 손이 아닌 불(火)이 형태를 만든다는 데 백자달항아리의 묘미가 있긴 해요.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구우면서 형태가 뒤틀리거든요. 그렇다고 도예가가 대가 없이 결과를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불의 온도와 결과를 철저하게 계산해 장작 한 개비를 더 넣을까 말까 고민하는 게 바로 도예가들이거든요."

―그럼 백자달항아리가 우연의 소산이 아니란 뜻입니까.

"그렇지요. 그렇다면 조선백자를 500명의 도공들이 500년간 만들어왔는데 그 세월 동안 손을 놓고 우연을 기다렸다는 겁니까? 우연이 아니라 필연의 결과라고 봐야지요."

―작업은 언제 합니까.

"아침 9시에 시작해 오후 4시면 손을 텁니다. 저녁엔 안 해요. 달력의 빨간 날도 안 하고요."

―지금까지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나요.

"흐~음.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어요. 정말 원형(圓形)에 가까운 작품이 그것도 두 점이나 나온 거예요. 백자달항아리는 타원형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부러 타원형을 만드는 작가는 없어요. 그런데 며칠 고민하다 술 마시고 다 깨버렸어요."

―아니, 그 아까운 걸 왜?

"그걸 놔두면 작업을 다신 못할 것 같아서요. 섭섭하긴 했지만. 제 집을 찾아오는 분들 중에 '지금까지 만든 것 중 최고를 보여달라'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전 이렇게 말해요. '제 최고 작품은 다음 가마에서 나올 것'이라고요."

―백자 외에 사발도 한다고 했는데 이도(井戶)다완 같은 걸 할 생각은 없나요.

"요즘 이도다완, 이도다완하는데 전 불만이 조금 있어요. 막사발이란 게 뭡니까. 밥 먹고 술 마시고 반찬 담고, 그렇게 막쓰는 게 막사발이잖아요. 이도다완이 유명해졌다고 그 색이나 모방하는데 조선의 백자 사발이 사실은 다 다완이에요. (백자사발을 보여주며) 이거 보세요, 얼마나 곱습니까. 아이 참, 이러다 보니 자꾸 다른 사람 욕하게 되겠네, 빨리 술이나 마십니다. 여보~."

그 소리에 도공의 아내는 푹 삶은 시골 돼지고기에 작년에 50포기 담가 땅 속 장독에 묻어놓았다는 김치를 잔뜩 들고 왔다. 인터뷰가 돌연 술판으로 바뀔 즈음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화창하던 해 대신 비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맑은 날의 '분원산수(分院山水)'가 돌연 수묵화로 변주(變奏)되기 시작했다. 권대섭 부부와 조카 부부, 거기에 제자까지 나무로 만든 나지막한 식탁에 둘러앉아 늦은 오후의 새참을 즐겼다. 처마 밑으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문갑식 기획취재부장 gsmoo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