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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저자 이근후 vs 서른 살엔 미처 몰랐던 것들 저자 김선경
78세인 이근후 전 이화여대 교수(신경정신과)가 쓴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갤리온)가 출판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입소문을 타고 판매에 가속도가 붙어 출간 한 달여 만에 종합베스트셀러 10위에 올랐다.(교보문고 4월 첫 주 기준) 5만부 정도 팔렸다. ‘치열하게 살아라’ ‘최선을 다하라’는 씩씩한 가르침 대신 ‘좋아하는 것을 야금야금 해라’ ‘최선보다 차선(次善)을 택하라’는 잔잔한 가르침은 기존의 자기계발서와는 다른 감동을 안긴다. 특히 출가한 네 자녀의 가족까지 총 다섯 가족이 한 지붕에서 11년째 살아가면서 깨우친 삶의 지혜, 일곱 가지 병마와 싸우면서도 여전히 바쁜 일상을 보내는 그의 삶 자체가 행복한 노후의 롤모델이 된다.
책의 흥행에 빠뜨릴 수 없는 성공 요인이 하나 더 있다. 2010년 발간돼 20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서른 살엔 미처 몰랐던 것들’의 저자 김선경(44)이 ‘나는 죽을 때까지…’의 엮은이로 나섰다는 것이다. 엮은이 김씨는 이근후씨의 말을 글로 옮겼다. 책의 흥행은 ‘어떻게 나이 드는 것이 궁극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삶인가’라는 출판사 측의 의미 있는 기획, 이근후 교수의 보물 같은 삶의 지혜, 독자의 감성을 꿰뚫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힘 등 3박자의 궁합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지난 4월 2일 저자 이근후씨와 엮은이 김선경씨를 이근후 교수의 연구실인 ‘가족아카데미아’에서 만났다. 서울 종로구 신영동에 있는 가족아카데미아는 이근후씨와 아내 이동원(75·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씨의 놀이터다. 부부는 매일 아침 15분 거리의 구기동 집에서 걸어서 이곳에 출근해 나란히 붙어 있는 각자의 방에서 책을 읽고 원고를 쓰고 사람을 만난다. 가족아카데미아는 인왕산 자락에 있는 건물 꼭대기에 있었고, 이근후씨 방에서는 인왕산의 둥글넓적한 바위가 손에 잡힐 듯 접해 있었다. 바위의 형세가 이근후씨의 옆모습을 꼭 닮았다.
“책이 안 팔릴까봐 굉장히 걱정했어. 나 때문에 출판사가 손해 보면 안 되잖아. 내 일상의 이야기가 사람들한테 무슨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싶었지.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 가는 게 신기해요. 내가 김 선생(김선경 작가)을 잘 만났지. 허허허.”
이근후씨의 삶은 조명을 받을 만한 요소가 많다. 우선 그는 한국 정신의학계에서 큰 획을 그었다. 정신과 폐쇄 병동을 개방 병동으로 바꾸고, 사이코드라마 치료법을 도입하고, 정신과 병동에 환자를 위한 체력단련실을 만들었다. 나눔의 삶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30여년 전부터 매년 네팔로 의료봉사를 다니고, 40여년 전부터 해온 보육원 봉사도 거르지 않는다. 퇴직 직후에는 다섯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사는 실험적인 삶으로 화제가 됐고, 76세이던 2011년에는 고려대학교 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졸업하면서 최고령 졸업생이자 문화학과 수석 졸업생으로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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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은 회고록이나 자서전으로 기획됐다. 그러나 자료가 미비해 시작이 쉽지 않았고, 이근후씨의 문체가 일반인에게 먹힐지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방향을 기획으로 틀었고, 실력 있는 대필작가를 섭외했다. 대필작가로 낙점된 김선경씨는 2011년 겨우내 주말마다 아카데미아에 와서 이근후씨의 삶 이야기를 듣고 갔다. 3개월 넘도록 하루 4~5시간 동안 녹음기를 틀어놓고 노학자의 삶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김선경 작가는 “요즘 같은 핵가족화, 1인 가족 시대에 3대 다섯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게 신기해서 선생님의 삶이 궁금했다”며 “접근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보물 같은 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계셨다”고 말했다.
애초 출판사 측은 김선경씨에게 그저 대필작가 역할을 주문했다. 국내에서 출간되는 유명인의 저서 대부분이 그렇듯 저자 뒤에 숨어 책을 쓰고, 판권에도 이름을 올릴 수 없는 ‘고스트 라이터(ghost writer)’로 말이다. 그러나 출간 직전 이근후씨의 전격적인 제안으로 김 작가가 엮은이로 전면에 등장했다. “내가 말한 내용이지만 내가 직접 쓴 게 아니라 저자가 엄연히 따로 있는데, 어떻게 단독 저자로 이름을 올릴 수 있겠어요. 김 선생이 요즘 사람들한테 어필할 수 있는 명쾌한 문체를 써서 그게 큰 도움이 됐어요.”(이근후씨) “이근후 교수님의 제안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내 이름이 전면에 등장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요. 주말마다 선생님 이야기 듣는 시간이 즐거워 이 책을 쓰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습니다.”(김선경 작가) 김 작가가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는데 선생님 덕분에 치료가 됐다”고 하자 이근후씨는 “그럼 치료비 내야겠네?” 하며 또 “허허허” 웃었다.
이근후씨와 김선경 작가는 ‘나이듦에 대하여’를 화두로 고민을 많이 했다. 이근후씨는 나이듦을 인식하면서부터 하루하루가 신기하고 벅찼다고 한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아, 오늘 또 하루를 벌었구나’ 하는 기쁨을 매일 느껴요. 젊었을 때에는 몰랐던 기쁨이에요. 생물학적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식하면서부터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사치인 것 같아요. 젊어서의 재미만 생각하면 노년은 불행해요. 나이 들어 느끼는 재미는 젊은 시절과는 달라요. 등산을 예로 들어 보죠. 젊어서는 산 정상에 오르는 일이 재미있었다면 지금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어요.”
김선경 작가는 마흔 살이 되면서 ‘서른 살엔 미처 몰랐던 것들’을 썼다. 그는 월간 ‘좋은 생각’ ‘행복한 동행’ ‘문학사상’에서 특유의 따뜻하고 깊은 시선을 살려 실력있는 편집자로 인정받았다. 출판사를 차려 잡지를 창간하는 등 과감히 도전을 했으나 적자를 내고 문을 닫았다. 그는 “‘서른 살엔…’이 마흔 살이 되어 되돌아본 이야기라면 이 책은 ‘마흔 살엔 미처 몰랐던 것들’을 쓰기 위한 선행학습”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흔이 “나이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했다.
“‘마흔 살엔 미처 몰랐던 것들’을 언제 쓸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죠. 그런데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삶이 만만해졌어요. ‘아, 너무 겁먹을 필요 없구나. 이런 마음 가짐으로 살아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이라고 할까요?”
두 사람에게 “나이듦의 즐거움이 무엇인가?”라는 공통의 질문을 던졌다. 둘은 모두 “나이듦의 즐거움은 근본적으로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근후씨는 “나이 들면 시간이 많아지고 남 눈치 볼 일이 적어지는 좋은 점도 있지만 생물학적으로 죽음에 가까워지는 게 뭐가 즐겁겠어요?”라며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예요. 환자들을 보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대단해요. 죽음의 불안과 슬픔에 억눌려 있는데 인생의 틈새에 숨어있는 재미가 보이겠어요? 잘 찾아보면 주어진 여건에서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구석은 얼마든지 있어요.”
이근후씨는 왼쪽 눈이 실명됐고 당뇨, 고혈압, 관상동맥협착, 담석, 통풍, 허리디스크 등 일곱 가지 병이 있다. 그러나 “나이 들어 아프고 병을 앓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면서 “삶이 다하는 날까지 즐겁게 살고 싶다”고 했다. 김선경 작가 역시 “40대가 되니 몸의 변화도 확 느껴지고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이 더 많다”고 말을 뗐다. “하지만 선생님의 삶을 통해서 나이듦의 즐거움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애쓰고 노력해야 즐거움이 보인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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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후씨는 결혼과 가족에 대한 독특한 철학이 있다. 최근 캠페인으로 자리 잡은 ‘작은 결혼식’을 그는 일찌감치 실천했다. 2남2녀를 둔 그는 네 자녀에게 결혼 비용으로 한 자녀당 공평하게 500만원씩만 지원했다. 살림살이가 불어나는 재미가 결혼생활의 큰 즐거움 중 하나라는 이유에서다. 또 하나, 결혼하면 무조건 6개월간 시부모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다행히도 반대나 갈등 상황이 없이 다 따라주었다. 일방적 선언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설득과 동의를 거친 결과다. 그는 “가족간의 철학을 공유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나는 아이들이 돌 때부터 세뇌시켰다”고 농을 했다.
2002년부터는 한 지붕에서 다섯 가족이 산다. 부지만 부모가 제공하고 다가구주택 집 건설 비용은 네 자녀가 각자의 형편대로 내게 했다. 1층은 이근후 교수 부부가, 2층은 맏딸과 막내 아들이, 3층은 둘째 딸, 4층에는 큰 아들 가족이 산다. 한 집에 모여살자는 제안은 이 교수의 정년 퇴임 무렵 첫째 며느리가 먼저 해 왔다.
다섯 가족 14명이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억지 정성과 사랑 없는 행위가 서로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는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더불어 살 수 있는 대원칙을 세웠다. 바로 상호 불간섭주의와 독립성 보장이다. 한 지붕이지만 각 가정마다 별도의 출입문을 만들어 독립성이 보장되도록 했고, 서로의 집에 가기 전 전화로 사전에 허락을 구했다. 또 가정의 일과 개인의 일을 가족 전체보다 우선시하도록 했다.
그는 자녀와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싶으면 엄한 아버지, 엄한 할아버지가 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며느리와 사위 앞에서 권위를 버렸다. 불편한 손님 같은 가족이 되지 않기 위해 그 스스로 며느리 앞에서 러닝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다니고, 벌러덩 누워서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며느리들에게는 ‘솔직하게 거절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또 자식들에게 애교를 떨 필요가 있다며 “자녀들과 행복하게 지내기 위한 건데 그 정도 치사함은 견딜 만하지 않아요?”라며 되묻는다. 그는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말도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부모세대가 자식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요즘에는 거꾸로예요. 젊은 세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를 흡수하면서 살죠. 두 세대의 청춘 시절은 달라요. 국민소득 200달러 시대에 성장한 사람들이 2만달러 세대의 청춘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섣부른 충고는 안 하니만 못하죠.”
가족의 독특한 삶은 화제가 돼 각종 매체로부터 숱한 취재 요청을 받는다. 부인 이동원씨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네 자녀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네 자녀는 각각 언론사 편집위원, 의사, 상담전문가, 영화 연출가의 길을 걷고 있다. 자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자 이근후씨는 “사생활을 보장해주기로 아이들과 약속했다”며 입을 닫았다.
이근후씨는 이 책에서 너무 치열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한다. 목표를 정하고 앞만 보면서 달려가는 삶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야금야금하면서 걸어가는 삶을 추구하라고 한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진정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최선을 다하며, 악바리처럼 채찍질하며 살아서 끝에 뭘 하려 하는가”라고 되묻는다.
인터뷰가 끝난 후 이근후·이동원 교수 부부, 김선경 작가와 다 함께 식사를 했다. 이동원씨는 책에 드러나지 않은 남편의 실상(?)을 하나둘 들려줬다. 부인은 물욕이 없는 남편 때문에 겪은 고충을 털어놓았다. “빨랫비누 열 장을 싸게 사기 위해 먼 시장까지 걸어서 낑낑대고 다녀왔지요. 그런데 시어머니가 여덟 장을 남한테 줘 버렸어요. 이 양반 퍼주는 건 유전이에요. 네팔 봉사 가면서도 죄다 자비로 가고. 내가 속 끓인 건 말도 마세요. 그런데 이 나이 돼서 보니 남편이 맞아요. 베풀면서 살아왔더니 어딜 가나 당당해요.” 아내가 웃었다. 남편도 따라 웃었다.
/ 김민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