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도 쉬어가는 억새 명소5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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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억새를 찾을 때다. 비슷한 시기 절정을 이루는 단풍이 현란한 빛깔로 장삼이사들의 가슴을 달뜨게 만든다면, 억새는 은은한 빛깔로 달뜬 가슴을 차분하게 가라 앉힌다. 억새는 보는 시간대에 따라 느낌이 사뭇 다르다. 불리는 별칭도 달라진다. 동틀 녘부터 해가 머리 위에 머무는 오후까지는 ‘은억새’라 불린다. 볕에 반사된 억새꽃이 희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다. 해질 무렵엔 황금빛으로 변한다. 이름도 ‘금억새’로 바뀐다. 이는 억새 감상에 적합한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 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힌트이기도 하다. 전국의 억새 명소를 모았다. 열흘 붉은 단풍은 드물지만, 억새는 달포 넘게 고운 자태를 이어간다.
>>‘분지 위 탁트인 전망’ 명성산
억새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세 가지 감각이 필요하다고 했다. 눈으로는 시시각각 변하는 빛깔을 보고, 귀로는 바람결에 사각대는 노랫소리를 담고, 손으로는 부드러운 억새꽃의 감촉을 느껴야 한다는 거다. 호사가들의 말이긴 하나 따라 해서 나쁠 건 없지 싶다. 수도권에서는 명성산이 첫손에 꼽힌다. 경기 포천과 강원 철원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억새밭은 정상 언저리 능선에 걸쳐 있다. 산정호수 주차장에 차를 두고 등룡폭포 쪽으로 오르는 게 일반적이다.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명성산 삼각봉에서 내려온 분지 위에 펼쳐진 억새밭이 장관이다. 면적만 20ha(약 6만 평)에 달한다. 탁 트인 전망이 장쾌하고, 능선 아래로 기암과 초원이 번갈아 펼쳐진다. 발 아래 늘어선 산정호수의 자태도 넉넉하다.
27일까지 명성산억새꽃축제가 열린다. 억새밭에 세워진 빨간 우체통이 이채롭다. 사연을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정확히 1년 뒤에 배달된다. 팔각정에선 사물놀이, 댄스스포츠 등 흥겨운 잔치판이 열리고, 산정호수에선 미2사단 군악공연 등이 이어진다. 인근 맛집으로 관인면 냉정리 샘물매운탕이 꼽힌다. 메기매운탕만 파는 집인데 재료가 떨어지면 문을 닫기 때문에 저녁에는 맛보기 힘들다. (031)533-6880.
>>‘억새 바다’ 울주군 간월재
울산 울주군의 간월재(900m)는 신불산(1159m)과 간월산(1068m)의 능선이 내려와 만난 자리다. 두 산의 능선을 타고 내려온 억새들이 간월재에서 거대한 억새의 바다를 펼쳐낸다. 바람이 산자락을 간질일 때마다 하얗게 물결치는 모습은 영락없는 파도다.
최근 ‘영남 알프스’의 1000m급 고봉들을 연결한 29.7㎞짜리 ‘하늘억새길’이 선을 보였다. 하지만 당일 여정을 선호하는 수도권 등산객들에겐 간월재에서 신불산 억새평원을 다녀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들머리는 등억리다. 오르는 길은 다소 벅찬 편. 4~5시간 정도 소요된다. 등억리에 온천단지가 조성돼 있다. 산행 피로를 풀기 좋다.
울주까지 가서 슬도(瑟島)를 안 보고 올 수는 없다. 울산시 동구 방어진항 끝에 있는 작은 섬인데, 모래가 굳은 사암으로 이뤄진 무인도다. 섬 주변 바위마다 뚫린 작은 구멍들에 파도가 칠 때마다 차르륵 차르륵 거문고 소리가 난다고 해서 이름지어 졌다. 슬도까지 연륙교가 놓여져 있어 쉬이 오갈 수 있다. 작천정 옆 작천정휴게소는 피라미매운탕이 맛있는 집. 삼남면 교동리에 있다. (052)262-1662. 언양읍 외곽엔 언양불고기집들이 몰려 있다.
>>‘꽃이 된 밭’ 정선 민둥산
강원권에서는 정선의 민둥산(1119m)이 첫손 꼽힌다. 60만㎡에 이르는 산자락이 죄다 억새밭이다.
정상 언저리엔 나무 한 그루 없다. 예전 화전민이 일구던 밭이 고스란히 억새밭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들머리는 증산초등학교다. 오르는 길은 급경사 코스(2.6㎞)와 완경사 코스(3.2㎞)로 나뉜다.
두 코스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힘든 건 매한가지다.
발구덕 마을에서 오르는 방법도 있다. 예서 정상까지는 900m 정도에 불과하다. 된비알이 계속되기는 하지만 30분 안팎에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다만 억새꽃축제가 열리는 11월 3일까지는 발구덕 마을로 향한 도로가 통제된다.
정선의 최고 인기 메뉴는 곤드레밥이다. 증산초교 정문 근처 민둥산 가든(033-592-3000), 신동읍 예미리 외곽 도로 앞에 있는 정원광장식당(378-5100), 화암약수 주차장 인근의 두메산골(563-5108) 등이 소문났다.
정선역에서 가까운 동광식당(563-3100)은 황기를 넣어 만든 왕족발과 메밀콧등치기국수를 잘 한다.
>>‘서해의 등대’ 홍성 오서산
충남에선 홍성의 오서산(791m)이 가장 앞줄에 선다. 근동에서 가장 높아 ‘서해의 등대’라는 별명도 얻었다.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이 빼어나다. 정상에 서면 멀리 원산도와 삽시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고, 천수만과 안면도도 손에 잡힐 듯하다.
억새밭은 정상에서 북쪽의 740m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곳곳에 산재한다. 민둥산 등에 견주자면 규모는 작지만 서해와 어우러진 풍광만큼은 어느 억새 명산에도 뒤지지 않는다. 특히 억새밭을 붉게 물들이는 서해 낙조가 빼어나다. 이 풍경과 마주하기 위해 오후 3∼4시에 오르는 등산객들도 많다.
광천읍에서 가까운 담산리 상담마을에서 시작해 정암사를 거쳐 오르는 게 일반적인 산행 코스다. 오서산 동남쪽의 명대계곡에서 오르는 방법도 있다. 산길이 수려하고 경사도 가파르지 않다. 두 코스 모두 4시간 정도 소요된다. 하산 뒤 보령시의 청라은행마을에 들르는 것도 좋겠다. 수령 100년이 넘는 토종 은행나무 3000여 그루가 마을 곳곳을 감싸고 있다.
26~27일 단풍축제도 열린다. 제철 먹거리를 찾는다면 천수만의 ‘천북 굴단지’가 제격이다. 굴칼국수, 굴밥 등 갖가지 굴 음식을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다.
>>‘쪽빛 바다’ 품은 장흥 천관산
전남 장흥 천관산(723m)은 팔도를 통틀어 억새 명산으로 인기가 높다. 단순히 억새밭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석같은 기암들이 널렸고, 그 뒤로 크고 작은 섬들을 끌어 안은 쪽빛 바다가 밑그림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억새밭은 동쪽 연대봉과 서쪽 환희대 사이 약 1㎞의 주능선에 펼쳐진다. 장천재∼장안사∼연대봉∼장천재의 원점회귀산행이 억새 탐승에 최적이다.
장흥에선 먹거리를 탐해도 좋다. ‘남해의 보물’ 득량만에서 다양한 갯것들을 쏟아 내기 때문이다.
워낙 먹거리가 다양해 계절을 구분 짓는 게 부질없지만 굳이 꼽자면 석화(굴)와 장흥삼합 등이 앞줄에 선다. 용산면 남포마을에 굴구이집들이 많다. 일출명소로 유명한 소등섬을 보며 굴 구워 먹는 재미가 각별하다.
한우와 키조개, 표고버섯을 함께 먹는 장흥삼합은 장흥 읍내 식당에서 맛볼 수 있다. 수문해변의 바지락회무침도 일미다. 싱싱한 바지락을 살짝 데쳐 초고추장에 썩썩 비벼 낸다. 따뜻한 밥에 올려 비벼 놓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억새밭 사이 야생화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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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황매산에 있는 억새밭에서 야생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인‘야사모’회원들이 쑥부쟁이 등 가을꽃을 보고 활짝 웃고 있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
산청·합천 황매산 야생화 여행
말간 청남색 하늘에 구름이 간간이 게으른 듯 지나갔다. 야생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야사모(www.wildplant.kr)'의 올 하반기 정기모임이 열린 19~20일 경남 산청군 황매산(黃梅山·1108m)은 억새와 구절초 등 가을꽃들로 질펀했다.
황매산 자락에 자리한 영화주제공원 옆 주차장에 모인 회원들은 자생식물 보호 주의사항을 듣고 산행에 나섰다. 이어진 임도(林道)는 등산로이자 꽃길이었다.
황매산은 봄에는 철쭉이 유명하지만, 가을에는 억새와 함께 여러 종류의 들국화를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소문나 있다. 사방으로 고속도로가 지나 교통이 편리한 데다 경치가 좋아 한 번 방문한 사람은 다음에 다시 찾는다고 한다. 탐방단원들은 임도를 중심으로 황매산 정상과 배틀봉 사이 황매평전, 황매산제단을 오가며 야생화를 찾았다. 임도 양편엔 하얀 구절초, 노란 산국, 연보라색 쑥부쟁이 등이 산등성이를 흠뻑 덮은 듯 피어 있었다. 야생화 꽃밭 뒤로 멀리 높은 구름 뒤에 숨은 지리산 천왕봉이 보였다.
능선에서 합천군 가회면 쪽 가는 길에서 용담과 쓴풀이 발견됐다. 억새밭에서 귀티 나는 용담을 발견하자 서로들 '얼짱거리'(가장 예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찾아 날렵하게 몸을 던졌다. "요것 봐, 워메 이쁜거…." 이런 탄성에 용담이 거만해진 듯했다. 집에서는 청소기 한 번 잡지 않는 사람들이 꽃잎에 묻은 지푸라기 같은 것을 떼어내느라 난리다. 사랑에 빠지면 모든 것이 예뻐 보인다던가. 이 소동이 끝날 때쯤 다른 쪽에서 '겹쓴풀'을 발견했다는 소리에 회원들은 또다시 내달린다. 평소에 보기 힘든 귀한 꽃이기 때문이다.
황매평전 주차장 부근에선 물매화도 보았다. 누군가 "여기에 물매화 모델 예쁜 거 있습니다"라고 하니 주변 회원들이 순식간에 모여 몸을 엎드렸다. 야생화를 찍기 위해서는 우선 자세를 낮추어야 한다. '낮추어야 보인다.' 별것 아닌 듯한 조용한 진리를 야생화가 가르쳐 주는 것 같다. 가을에 땅에 엎드리면 엄마 냄새처럼 약간 비리고 달콤한 듯한 냄새가 난다. 이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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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매산은 정상에서 보면 경치가 활짝 핀 매화꽃잎을 닮았다고 해서 '황매'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황매산에는 칡과 땅가시, 뱀 등 세 가지가 없다는 이야기도 내려온다. 이곳에서 수도하던 무학대사를 보살피러 온 어머니가 산기슭을 걷다가 칡넝쿨에 넘어지고, 땅가시에 긁혀 상처가 나고, 뱀에 놀란 사실을 안 무학대사가 산신령에게 백일기도를 드린 후 세 가지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능선을 샅샅이 살펴본 '꽃 사냥꾼'들이 하산을 시작했다. 지나는 곳마다 도시락을 먹던 등산객들이 웃는 얼굴로 김밥 한 줄 내어주며 '좀 들고 가시라' 권한다. 저 산밑 세상도 이렇게 정다웠으면 좋겠다. 우리는 주차장에서 둥그렇게 손을 잡고 다 같이 큰 소리로 "사람이 꽃이다"를 외쳤다. 언제 또 이 그리움과 바람이 나를 여기로 데려와 줄까.
여행수첩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와 대전~통영고속도로를 이용해 단성 나들목에서 나온다. 이어 신등면·가회면 방향으로 가면 황매산 가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 생초나들목을 이용할 수도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땐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합천 가는 버스를 탄다. 합천읍에서 가회·덕만행 버스를 타고 가다 덕만 주차장에서 내리면 바로 등산을 할 수 있다.
황매산은 크게 산청군과 합천군에서 오르는 두 가지 코스가 있다. 덕만 주차장~모산재 코스, 회양리~북동릉~정상 코스, 장박리~떡갈재~정상~모산재 코스 등이 대중적인 코스다. 산청군 차황면 장박리를 출발해 황매산 정상에 오른 다음, 모산재를 지나 합천군 가회면 영암사 주차장으로 하산하는 관통 코스는 산행거리 14㎞ 남짓, 6시간 정도 걸린다.
[전광주·야사모 회원(닉네임 우구리)]
천관산 억새 산행 vs 화왕산 억새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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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장하게 환한 가을날
억새는 볕을 보고 눕는다
억새는 지금부터 한 달 동안 가장 아름답고 환한 빛을 낸다. 햇빛을 맞아 은색 물결로 물든 전남 장흥 천관산 억새 평원.
어느새 가을이 완연하다. 바람은 선선하고 하늘은 청명하다. 곱게 멋을 낸 산은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는 듯하다. 도무지 달뜨는 마음 막을 길 없다.
가을 나들이라 하면 십중팔구 단풍놀이부터 떠올린다. 누가 뭐래도 가을 산의 주인공은 단풍일 터이다. 설악산부터 곱게 물들기 시작한 단풍은 어느새 속리산·가야산까지 내려왔다. 조만간 전국의 산과 계곡이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결칠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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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도 가을 산의 주인공이다. 단풍 산이 화려한 빛깔로 단번에 시선을 빼앗는 불꽃놀이라면, 억새 산은 밤하늘에 촘촘히 박혀 은은하게 빛을 내는 은하수다. 단풍처럼 야단법석 떨며 피지는 않지만 단풍보다 이른 9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묵묵히 산을 장식한다.
무엇보다 억새는 가을 꽃이다. 가을 햇살 아래서 반짝이는 건 억새 중에서도 꽃이다. 단풍은 빛바랜 잎사귀지만, 억새는 만발한 꽃이다. 하여 억새 산행은 가을에 떠나는 꽃놀이다.
억새는 보통 9월 말께 자주색 꽃을 피워 시간이 흐르면서 갈색으로, 다시 은색으로, 나중에는 흰색으로 변한다. 하루에도 여러 번 억새 꽃은 다른 빛깔로 반짝인다. 해가 뜨고 질 때는 황금색으로 반짝이고 한낮에는 하얀 솜털 모양 나부낀다. 하여 억새는 온종일 봐도 질리지 않는다.
억새는 꽃을 피운 지 한 달쯤 지나면 만개해 보드라운 흰머리를 휘날리며 출렁인다. 이맘때쯤인 10월 중순부터 11월 초까지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다. 이때에 맞춰 억새 축제가 열린다. 서울 상암동 하늘공원(10월 18~27일)에서도, 경기도 포천 명성산(10월 9~27일)에서도, 강원도 정선 민둥산(9월 27~11월3일)에서도 억새꽃 축제가 이어진다.
“11월 초순 찬바람이 불면 수정이 끝난 억새 씨들이 바람을 따라 날아다니기 시작해요. 마치 하얀 솜털이 날리는 것 같아 아름답기 그지없죠.” 창녕 화왕산에서 만난 오종식(53)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이다.
억새는 종종 갈대와 쌍둥이 취급을 받지만 완전히 다른 식물이다. 갈대는 물가에서만 자라지만 억새는 물기가 없는 뭍에서도, 산등성이에서도 잘 자란다. 억새를 보려면 산행을 감수해야 하는 까닭이다. 꽃 모양도 다르다. 줄기에 꽃이 수북하게 매달리는 갈대에 비하면 억새는 수술의 양이 적다. 빛과 잘 어울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수술이 적당한 억새는 빛을 받으면 그늘 대신 화려한 빛깔을 내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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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관산 정상의 억새 평원. 다도해의 그림 같은 풍광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40만 평 억새나라 전남 장흥 천관산
전남 장흥 천관산(723m)은 이맘때 가장 아름답다. 성질 급한 억새는 단풍이 찾아오기 전 벌써 하얗게 피어 출렁이고, 제 몸끼리 부대끼며 서걱서걱 소리 내어 사람들을 부르고 있었다. 다도해 일출과 겹치니 억새는 꽃이자, 황금이었다.
2 환희대와 구룡봉 사이에서 바라본 진죽봉. 천관산은 기암괴석이 많기로 유명하다. 3 아주 맑은 날에는 천관산 정상에서 다도해 너머로 제주도 한라산이 선명히 보인다. 4 천관산 연대봉에 있는 봉수대.기암괴석과 조화 … 다음달 초까지 절정
구름 위의 산책. 천관산 정상에서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산 정상 억새 능선의 광활한 자태는 멀리서 보면 평온한 바다 같고, 한복판을 누빌 때는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다. 억새밭만 무려 130만㎡(약 40만 평)에 이른다.
천관산 억새는 10월 초부터 11월 초까지 약 한 달간 절정이다. 올해는 태풍도 피해간 덕에 억새꽃이 더욱 촘촘히 보기 좋게 피었다.
지리산(1915m)·내장산(763m)·월출산(809m)·내변산(510m)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에 꼽히는 천관산은 워낙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억새도 억새지만 장대한 기암괴석들이 산 곳곳을 지키고 있어 사계절 언제 올라도 지루할 틈이 없다.
멀리로는 월출산·무등산 등 명산이 반기고, 아주 맑은 날엔 제주도 한라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본래 천관산은 조선시대 한라산의 봉화를 뭍으로 연결하던 곳이기도 하다. 최정상인 연대봉에는 봉수대가 복원돼 있다. 정상에서 보이는 다도해도 한 편의 그림. 봉수대에 오를 것도 없이 천관산 곳곳에서 다도해를 즐길 수 있다.
천관산을 오르는 방법은 10가지가 넘는다. 가장 빠른 방법은 대덕읍 방면 탑산사 주차장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탑산사~구룡봉~환희대~닭봉~연대봉(2.8㎞)에 이르는 데 1시간20분이면 충분하다. 하나 보통은 관산읍 방면에서 장천재를 기점으로 오르는 쪽을 택한다. 천관산이 자랑하는 기암괴석과 다도해를 두루 만끽하며 오를 수 있어 시간은 오래 걸려도 눈은 더 즐겁다. 장천재~체육공원~환희대(구룡봉)~닭봉~연대봉(3.6㎞) 코스로 정상까지 2시간30분 남짓 걸린다. 천관산은 산세는 험하지 않아도 크고 모난 돌들이 많아 등산화를 챙기는 게 좋다.
5 육중한 바위를 포개놓은 듯한 모습이 이색적인 천관산 아육왕탑.환희대와 연대봉 사이 능선(1㎞)은 걷는 길과 바위 빼곤 모두 억새다.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어렵다. 빛을 좋아하는 억새에 최고의 환경인 셈이다. 반면 천관산을 찾은 등산객에겐 곤욕이자, 즐거움이다. 나무가 없어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기 때문이다. 고통도 잠시, 억새밭에 시선을 두면 금세 위안이 된다. 바람에 서걱거리며 일렁이는 억새 바다의 풍경은 그 너머 다도해와 겹쳐지며 환상의 조화를 만들어낸다.
천관산은 그리 높지 않아 모두 누비는 데 5시간이면 충분하다. 다만 억새의 진정한 멋을 보려면 이른 새벽부터 산에 오르는 수고를 각오해야 한다. 다도해 너머로 해가 떠오르며 억새밭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광경은 이때만 볼 수 있다. 해가 섬과 구름 사이를 오가며 중천에 오르기까지 억새도 다도해도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하여 천관산에 오를 때는 카메라가 필수다. 한자리에서만 셔터를 눌러도 시간에 따라 다른 맛의 사진을 건질 수 있다. 가장 좋은 사진 포인트는 환희대와 닭봉이다. 억새로 물든 연대봉이 그 뒤로 펼쳐진 다도해와 만나 알아서 그림을 만들어내니, 그야말로 완벽한 피사체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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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대표 억새나라 경남 창녕 화왕산
경남 창녕 화왕산(757m)은 영남 알프스와 함께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억새 산이다. 옴팍한 분화구에 하얀 물결 넘실대는 억새밭은 단풍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안겨준다. 그리 높지도 않고, 억새평원까지 임도가 연결돼 있어 쉬이 올라갈 수 있다.
6 바람에 몸을 맡긴 화왕산 하얀 억새가 넘실넘실 춤을 추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성곽이 화왕산성이다.
장금이가 걷던 성벽에 서면 눈앞이 황홀
'이 환장하게 환한 가을날 화왕산 억새들은 / 환한 중에도 환한 소리로 서걱대고 있으리.'(황동규, '이 환장하게 환한 가을날'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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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은 모양새가 독특하다. 보통 억새산은 산 정상부가 밋밋하거나 약간 볼록하다. 그러나 화왕산은 옴팍하다. 화산 폭발로 인해 산 정상부에 분화구가 생겨서다. 덕분에 화왕산에 오르면 어느 곳에서나 24만㎡의 억새평원 전체를 볼 수 있다.
등산객은 보통 임도를 따라 오르는 옥천매표소 길을 택한다. 두 시간 남짓 걸으면 육중한 성곽이 길을 막는다. 화왕산성이다. 산성 동문을 통과하면 화왕산 억새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을 따라 등산로가 잘 다듬어져 있다. 오른쪽으로 돌아 화왕산 정상으로 가도 되고, 왼쪽으로 올라가서 배바위~서문으로 가도 된다. 산성을 한 바퀴 도는 길은 약 2.5㎞로 한 시간이면 족하다. 힘에 부치는 등산객은 동문과 서문을 곧장 잇는 야자수 매트 길만 걸어도 된다. 400m 정도 쉬엄쉬엄 걸으며 올라도 10분이면 된다.
7 화왕산성안에 있는 연못인 용지. 8 화왕산성 동문에서 바라본 억새 평원.
배바위 쪽으로 발길을 옮겨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이영애)가 민종사관(지진희)을 따라 걷던 화왕산성 성벽 위에 올랐다. 시원한 가을 바람의 운율에 맞춰 이리저리 고개를 흔드는 억새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서 드라마를 촬영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산성 성벽 주면은 화왕산에서 힘들이지 않고도 억새 전경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였다.
성벽에서 내려와 억새밭 사이로 난 길로 접어드니 곧바로 오르막이 이어졌다. 억새가 지천으로 피어 있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억새는 산억새와 물억새가 있습니다. 산억새는 마디가 길고 대가 굵어서 남성적이라면, 물억새는 짧고 가늘어 하늘하늘 흔들려 여성적이죠.” 오종식(53) 문화관광 해설사의 설명이다. 게다가 산억새는 잎의 양끝이 칼날 같아서 맨손으로 잡았다가는 베일 수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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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분 만에 배바위에 도착했다. 배바위에는 아픈 기억이 서려 있었다. 2009년 화왕산 억새를 태우다 사고가 났을 때, 관광객들이 불길을 피해 이 배바위 밑으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배바위 위에 오르니 억새평원 전체를 내려다보였다. 왜 이 바위에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서문까지는 내리막길이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고 한달음에 내려왔다. 그러나 서문에서 화왕산 정상까지 이어진 2.5㎞ 구간에 가장 힘든 오르막길이 숨어 있었다. 200m 남짓한 오르막길이었지만, 한두 번 긴 숨을 토해내야 했다. 정상에 오르니 창녕읍을 지나 저 멀리 우포늪도 한눈에 들어왔다. 북쪽으로는 대구의 비슬산이 창녕을 감싸안은 듯했고, 서쪽으로는 창녕을 휘감으며 흐르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여행정보=경남 창녕까지는 서울시청에서 자동차로 4시간 정도 걸린다. 등산은 두 방면에서 할 수 있다. 자하곡 매표소~화왕산성 서문 코스는 3㎞ 길이지만 계곡과 바위등이 있어 다소 힘들다. 산행 시간 약 한 시간 반. 옥천매표소~화왕산성 동문 코스는 임도를 따라 오르는 길이어서 그리 힘들지 않다. 5.2㎞로 두 시간 남짓 걸린다. 각각 입장료 1000원(어른), 주차비 2000원. 창녕에는 람사르협약 등록습지인 우포늪이 있다. 창녕읍에서 20분이면 닿는다. 억새 산행 뒤에는 부곡온천에서 피로를 풀라고 권한다. 화왕산에서 30분 거리다. tour.cng.go.kr, 055-530-1999(창녕관광안내소).
글=이석희·백종현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이석희.백종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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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곳에 가고싶다…치명적 억새 풍경 재약산 사자평 고원
해발 1000m가 넘는 재약산 정상 부근의 사자평을 고원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곳이 넓은 평원이기 때문이다. 지금 120만평 넓이(여의도 광장의 17배)의 사자평에 올라가면 바람부는 억새의 군무와 밤 하늘의 황홀한 별밭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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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춤사위 그 황홀한 낭만
오래 전 재약산 일대를 등산하던 사람들은 이 일대를 일컬어 ‘영남 알프스’라고 불렀다. 산 정상 부근의 모양이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의 형태와 달랐기 때문이다. 대부분 한국의 산은 비교적 날카로운 능선으로 이뤄져 있고 꼭대기는 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밀양 일대에 있는 가지산, 운문산, 재약산, 사자산, 신불산 등은 산줄기 곳곳에 넓은 평원이 있어서 달력에서 흔히 보아왔던 알프스 고원지대를 딱 닮아있있다. 때문에 ‘영남 알프스’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었다. 재약산은 영남 알프스 가운데 뛰어난 풍광을 지니고 있어서 ‘삼남금강’이라 불리우며 수많은 등산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사자평’은 바로 이 재약산의 7부 능선에 있는 면적 4.1㎢의 평지다. 이곳의 이름이 ‘사자평’이 된 것은 워낙 광활한 곳이라 마치 백수의 왕 사자의 영토를 닮았기 때문이다.
사자평 억새가 특별한 것은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120여만 평의 억새 들판이 펼쳐져 있어서다. 빛깔이 유난히 고운 것은 고원지대를 막힘없이 지나는 가을 바람과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들였기 때문. 사자평에서 만나는 억새는 부드럽고 강하다. 소소한 바람에도 낭창낭창 흔들리지만 결코 꺾이는 법이 없다. 억새꽃 새품은 햇빛을 받아 그 색깔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은빛이었나 싶으면 누런 황금빛으로 변하기도 하고 회색빛을 띠기도 하면서 잔잔하게 그저 바람에 몸을 맡긴다. 그래서 사자평 억새벌판에 들어갔다 나오면 그 여운이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 것이다.
사자평의 감동은 억새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자평 여행을 계획했다면 등산 출발 시각을 표충사 입구 기준 오후 세 시 쯤으로 잡는 게 좋다. 이유는 ‘밤하늘’ 때문이다. 사자평은 능선이 담을 쌓은 것 처럼 막아주는 구릉지대라 밤중에는 그 어떤 빛도 들어오지 않는다. 게다가 밀양시 등 인근 도시들이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라 밤중에도 불야성을 이루지 않는다. 그래서 깜깜한 밤에 이곳에 누우면 밤하늘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관찰할 수 있다. 관찰 망원경 없이 맨 눈으로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을 볼 수 있다는 건 생각만 해도 짜릿한 일. 사자평 등산을 오후 3시 쯤으로 잡으라는 이유가 그것이다. 정상까지 등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약 3시간이고 거기에 사자평에서 머무는 시간 1시간을 더하면 4시간 정도를 산에서 보내는 셈이다. 그러고 나면 대략 오후 7시 쯤이 되는데, 바로 하산하지 말고 사자평에서 어둠을 기다렸다 밤하늘의 장관을 보라는 얘기다.
따라서 사자평 밤하늘 관람 후 하산할 때는 등산로 대신 작전도로를 이용하는 게 안전하다.
밀양의 또 다른 가을여행지
표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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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31-2
문의 055-352-1150, www.pyochungsa.or.kr
만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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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만어로 776
문의 055-356-2010(만어사), 055-359-5639(문화관광과)
기회송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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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남 밀양시 산외면 남기리 문의 010-2850-0864(박수목)
영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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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남 밀양시 내일동 40
문의 055-359-5590(관리사무소), 055-359-5641(밀양시청 문화관광과)
밀양 명물 맛집
흑염소불고기 ‘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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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490-11 055-352-4982
동부식육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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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825-8 055-352-0023
호암전통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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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시 단장면 단장리 863-1 055-352-7985
추천 잠자리
별마루펜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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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시 단장면 고례리 1673 055-351-5511, www.mystarmaru.com
행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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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시 산외면 금곡리 16-12 055-355-8927
사자평 고원 찾아가는 길
기차 KTX밀양역 → 시외버스 터미널 → 표충사 직행버스 이용
버스 시외버스 터미널 → 표충사 직행버스 이용
승용차 경부고속도로 언양 나들목 → 석남사(24번 국도) → 산내면사무소 → 금곡삼거리(1077번 지방도) → 표충사 → 재약산 사자평
[글 이영근 사진 단편소설]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400호(13.10.29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