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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

한 해의 끝, 땅의 끝 … 거기 새로운 시작이 있다

한 해의 끝, 땅의 끝 … 거기 새로운 시작이 있다


 


그 길 속 그 이야기 <33> 전남 해남 땅끝길

앞은 물살이 거센 바다가 가로 막고, 뒤로는 크고 작은 산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대한민국 땅끝은 고독한 분위기다. '끝'은 마무리·종착점·소멸을 뜻하면서 새로운 시작·재탄생을 연상시키는 미묘한 단어다.

숙연한 마음으로 땅끝을 찾았던 사람도 돌아올 때는 용기와 긍정적인 에너지를 듬뿍 챙겨온다.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는 전남 해남군 땅끝마을부터 강진까지 이어지는 총 48㎞의 '땅끝길'을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했다.

1 땅끝탑에서 떨어지는 해를 바라 봤다. 사연 많은 하루,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원래는 땅끝마을부터 시작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걸었다. 땅끝이 가까워질수록 종착점을 눈앞에 둔 순례자가 된 것처럼 홀가분해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분이 수시로 바뀌었다. 배시시 헛웃음이 새어 나오다가도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져 발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던 지난 여름밤이 생각나고, 올 한 해 신세 졌던 사람들의 얼굴도 차례로 떠올랐다. 아예 처음부터 의도하고 땅끝길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민을 버리고 깨끗해진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겠노라고 야무진 다짐을 하고 땅끝으로 향했다.


글=홍지연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땅끝마을로 가는 길

2 멀리서 바라본 땅끝마을.

땅끝마을로 이어지는 걷는 길은 세 개다. '땅끝길', 해남군이 관리·운영하는 '땅끝 천년 숲길', 옛 사람들이 땅끝마을부터 한양 가던 길을 재현해낸 '삼남길'이 그것이다. 땅끝길과 삼남길은 강진만과 가까이 있고, 땅끝 천년 숲길은 달마산·두륜산 등산코스와 어우러진 길이다.

 week&은 땅끝을 중심으로 길을 짜깁기해 걸었다. 해남군 송지면 통호리 사구미 해변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걸었다. 땅끝마을~땅끝전망대~땅끝탑까지 이어지는 땅끝길 구간(8㎞)과 땅끝탑~땅끝송호해변에 이르는 땅끝 천년 숲길 구간(4㎞)을 합친 코스다.

 사구미 해변부터 땅끝마을까지는 77번 국도를 따라 걷는다. 인도가 따로 없어 조심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그나마 길 중간마다 쉬어갈 수 있는 벤치와 갓길이 있어 다행이다. 한 해 동안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던 바다 위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촘촘히 자리하고 있었다. 바다에는 전복·다시마·미역 양식이 한창이었다. 열을 맞춰 떠있는 주황색·녹색 부표가 양식장임을 말해준다.

 넙골 버스정류장과 땅끝소초를 지나자 저멀리 땅끝마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뾰족하게 솟은 갈두산 사자봉과 그 위에 늠름하게 서있는 땅끝 전망대가 보였다. 땅끝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것은 김장 풍경이었다. 주차장 한쪽에서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소금에 절여져 숨이 죽은 배추 500포기가 쌓여 있었다. 배추를 씻고 절이는 것부터 속을 무쳐내는 것까지 총 4일이 걸린다고 한다. 땅끝마을의 김장풍경은 12월 내내 펼쳐진다.

 매콤한 고춧가루와 찝찔한 젓갈냄새가 진동하는 천막 앞에서 저절로 발걸음이 멈췄다. “해풍을 맞은 해남 배추는 달고 맛나요. 유명하잖아요. 하나 드셔봐.” 한 아주머니가 맛나게 버무린 배추 어린잎을 쭉쭉 찢어 구경꾼에게 건넸다. 막걸리 한 사발에 돼지 수육도 한 점 집어줬다. 서울의 유명한 보쌈집 맛과 비교할 수 없는, 신선하고 아삭한 느낌이 입안을 맴돌았다. 아주머니들의 정을 한 입 머금고 땅끝마을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3 활짝 피어난 동백꽃. 땅끝마을은 겉으로 보기에는 식당과 펜션이 즐비한 관광지다. 하지만 속속들이 뜯어본 땅끝마을은 사람이 살고 정 넘치는 시골동네였다. 땅끝마을은 1986년 국민관광단지로 지정되면서 전국구 관광지가 됐다. 90년대 초반에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소개되면서 젊은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2층짜리 전망대와 땅끝탑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매년 연말이면 땅끝마을로 몰려들어 마을 대대로 내려오는 새해 사자막음굿을 구경하면서 새해 소원을 빌었다.

 땅끝마을에서 39년째 살고 있는 신혜자(59)씨는 “시집올 때만 하더라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였어. 바람도 거셌지. 딸애가 여기서 2㎞ 떨어진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바람에 날아갈까봐 양손에 돌을 꼭 쥐고 다녔지”라며 옛날을 추억했다. 땅끝마을에는 약 80가구가 산다. 신씨가 시집올 때는 32가구였는데 그때 살던 사람들이 거의 다 남아 아직까지 정을 나누며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 땅 끄트머리를 밟는 길

4 땅끝항 앞에는 마주보고 선 형제바위가 있다. 5 송호 해변에 가면 1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내며 해풍을 맞은 해송이 반겨준다. 6 드넓은 바다를 등지고 멋진 산책로가 나있다.땅끝전망대~땅끝탑~땅끝 산책로~갈산마을~송호땅끝오토캠핑장~송호해변에 이르는, 약 4㎞의 길은 호젓했다. 땅끝전망대부터 갈산마을까지는 해안 절벽을 따라 데크로드가 잘 깔려 있었다. 땅끝마을까지 걷는 길이 먼 바다를 바라본다면 땅끝전망대부터 송호 해변까지는 바다를 바로 옆에 끼고 걷는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걷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혼자 사색하며 걷기에도 훌륭하고 소중한 사람과 나란히 걸어도 좋다.

 보길도 가는 배가 뜨는 땅끝항 옆으로 땅끝 천년 숲길과 삼남길 이정표가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여기부터 송호땅끝오토캠핑장까지는 이 두 길이 겹치는 구간이다.

 땅끝전망대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걷거나 모노레일을 타면 된다. 모노레일 정류소까지 가는 길은 팽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멋진 산책로다.

 땅끝 전망대까지는 모노레일을 타고 6분, 걸어서는 40분 정도 걸린다. 모노레일 덕분에 어린이도 어르신도 모두 전망대까지 갈 수 있다. 전망대는 9층 높이 건물로 모든 층에서 바다 조망이 가능하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해남 앞바다는 마치 커다란 호수 같았다. 보길도·노화도·추자도 등 수많은 섬이 겹쳐 있어 수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모노레일 어른 4000원(왕복), 전망대 입장료는 어른 1000원.

 전망대에서 내려와 땅끝탑을 향해 걸었다. 전망대의 높이는 약 160m. 해수면과 가까운 땅끝탑까지는 계속 내리막이다. 1000개에 가까운 계단이 구불구불하게 펼쳐졌다. 계단을 한걸음 내려올 때마다 신기하게도 바다 풍경이 달라졌다. 길목마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도 달랐다. 무섭게 휘몰아치다가도 모퉁이를 돌아서면 잠잠해지곤 했다.

 뿔처럼 만들어진 땅끝탑은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있다. 탑을 쌓은 땅 앞쪽이 살짝 높다. 뱃머리처럼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는데, 여기서 보는 바다 풍경이 장관이었다. 햇빛이 부서진 수면은 보석처럼 반짝거렸고, 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크고 작은 섬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거렸다.


 탑에서부터는 데크로드와 오솔길을 번갈아 걸었다. 숲을 지나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였다. 군부대 앞에서 숲길이 끝나고 대신 황톳길이 펼쳐졌다. 황토가 깔린 구간은 짧지만 강렬했다. 부들부들한 감촉이 발바닥에 전해지는 듯했다.

 갈산 마을에 접어들자 오래된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사이로 당집 한 채가 보였다. 이 마을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신인 '갈산할매'를 모시는 곳인데, 해남 뱃사람이면 모르는 이가 없다. 무탈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배를 타기 전 여기에 들러 막걸리와 주전부리를 놓고 간다. 이날도 막걸리 2병과 소주 2병이 반들반들한 돌위에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갈산마을을 빠져나갈 때는 동백나무 군락지를 지났다. 군락지라고 해봐야 30그루가 채 되지 않지만 때이르게 피어난 동백꽃은 수줍은 미소로 발걸음을 가볍게 해줬다.

 송호 해변에서는 해송림이 반갑게 맞아줬다. 수십 년 동안 강한 바닷바람을 맞았을 텐데 여전히 늠름하게 서 있다. '그래. 올 한 해 아무리 어렵고 힘들었다 해도 저 해송만큼이었겠어.' 해송림을 바라보면서 올 한 해, 아니 땅끝길 여정을 마무리했다.

●여행정보=해남 앞바다와 땅끝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하나의 코스를 온전히 걷기보다는 일정구간을 툭 잘라서 걷는 것이 좋다. 송지면 통호리 사구미 해변에서 시작해 국토순례자들이 애용하는 77번 국도를 따라 땅끝마을에 들어간 뒤 송호해수욕장까지 걷는 길이 땅끝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코스다. 약 12㎞로 넉넉 잡아 5시간 걸린다.

 땅끝항을 중심으로 횟집이 늘어서 있다. '파도횟집' 등에선 땅끝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낙지·새우·홍합·전복·키조개·게·꼬막 등을 넣어 끓인 해물탕(사진)을 맛볼 수 있다. 해물탕 중(3~4인) 4만원 정도다.

 땅끝마을에서는 오는 31일 오후 3시부터 다음날인 새해 1월 1일까지 '땅끝해넘이해맞이축제'가 열린다. 해넘이 제례, 씻김굿, 불꽃놀이 등 알찬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새해 아침에는 선상해맞이, 해맞이 징치기 등이 진행된다. 해남군청 문화관광과(tour.haenam.go.kr) 061-530-5114.

홍지연.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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