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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래는?

20대는 인생의 아침, 하루 다간듯 좌절하지 마라


20대는 인생의 아침, 하루 다간듯 좌절하지 마라

[머니투데이 이현수,최우영 기자][대한민국 대표선배가 ’88만원 세대’에게 <4> 김난도 서울대 교수]

김난도 교수가 인터뷰 내내 청년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조급해 하지 말 것, 많은 경험을 쌓을 것이었다. 그는 “일찍 꽃을 피웠다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초봄에 꽃을 못 피웠다고 청년들이 안달할 필요가 없다. 당장은 힘들어도 얼마든지 화려한 주연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이기범 기자 leekb@
대담=유병률 기획취재부장

지난 7일 기자가 찾은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48) 연구실 책상 위에는 1백통은 되는 듯한 편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은 독자들로부터 온 편지이다. 이메일을 일일이 출력해놓은 종이도 그 옆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이메일은 대학생과 학부모들로부터, 편지는 군대와 교도소에서 주로 온 것이었다.

김 교수는 교도소에서 온 편지를 하나 집어 들어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편지를 쓴 재소자는 “20대에 큰 죄를 지어 10여년째 수감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가면(출소하면) 나이가 마흔인데 인생 끝났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김 교수의) 책을 읽고, 나가도 낮 12시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아직도 내 인생이 반이나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준비할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교도소에서)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김 교수는 책에서 인생 80년을 24시간에 비유하면서 서른 살은 오전 9시, 마흔 살은 낮 12시, 쉰 살은 오후 3시에 불과하다고 적었다. 이 재소자가 출소할 마흔은 아직 점심식사도 하지 않은 시간인 셈이다.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남은 거죠. 인생에 ‘너무 늦은 시간’이라고는 없어요.” 하물며 마흔 살이 다 되가는 재소자도 새로 시작한다는데, 이제 갓 아침시간에 불과한 20대들이 하루가 다 간 것처럼 절망하고 있지 마라는 얘기였다.

“유럽여행보다 커피믹스에서 진짜 경험이 나온다”

김 교수도 젊은 시절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대학(서울대 법대) 동기들은 한번 만에 붙는 행정고시를 3번씩이나 낙방했을 때이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고시에 붙고 싶었죠. 그러나 계속 떨어지고 좌절하면서 다음해에는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그렇다고 포기하겠다는 용기도 갖지 못한 채 어둡고 긴 시간을 그냥 보냈다”고 말했다.

그때 즈음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1년 사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내 인생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고, 죽을까도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고개 들어 주위를 보니 또 다른 인생이 있는 거에요.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조급해 하면 안됩니다. 살기 힘들수록 집에서 뒹굴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지는 작은 기회마다 경험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구청 청년인턴으로 들어간 대학생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무 일도 안하고 게임만 했다는 거에요. 물론 학생들 뽑아서 복사나 시키는 제도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 학생도 문제라고 봐요. 아무것도 안 시킨다고 게임만 하고 오는 게 문제라는 거죠. 가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결제는 누가 하는지, 어떤 서류가 구청에서 승낙이 나는지 열심히 쫓아다녀야 합니다. 아침마다 커피믹스 타서 과장님 갖다 드리면서 ‘좋은 하루 보내세요’하고 친해지면, 적어도 구청이 어떤 조직인지는 알 것 아닙니까. 나중에 시험 봐서 공무원이 돼야겠다든지, 음식점 하는 부모 대신 구청에 위생신고를 할 때 어떻게 하면 될지 뭔가 깨달음이 있을 것 아닙니까. 경험을 많이 쌓으라는 것은 돈 많은 집 자식들처럼 해외여행 가고, 돈 싸 들고 어학연수 가라는 게 아닙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작은 기회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 교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울대에서 학생들의 아픔을 가장 잘 들어주고 어루만져 준다는 ‘란도샘’도 이 대목에서는 다소 흥분하며 20대를 타일렀다. “스피치 강사로 유명한 김미경씨가 한번은 자기가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면 이렇게 성공하진 못했을 거라고, 자기는 지지리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게 너무 고맙다고 하시는 거에요. 힘들수록 더더욱 내 인생의 주연이 돼야 하는데, 원망만 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의 말처럼 지금 청춘들은 곧잘 잊어버리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지금 이 시간의 경험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새끼 독수리는 오리가 되려고 하지 마라”

하지만 등록금 대기도 힘든데, 스펙 쌓기도 바쁜데. 취업 걱정 때문에 잠도 못 이루는데 ‘조급해 하지 마라’고, ‘많은 경험을 쌓아라’고 하는 것은 너무 한가한 얘기가 아닐까. 그러자 김 교수는 오리가 되고 싶은 새끼 독수리 비유를 들었다.

“오리는 물에서 헤엄칠 수도 있고, 땅에서 달릴 수도 있고, 하늘을 날 수도 있죠. 헤엄치고, 달리고, 거기에다 날기까지 합니다. 최고의 스펙입니다. 하지만 오리는 돌고래처럼 헤엄칠 수가 없고, 독수리처럼 날 수도, 말처럼 달릴 수도 없지요. 많은 청년들이 두루뭉술하게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인간이 되려고 합니다. 나중에 독수리가 될지도 모를 청년들이 오리가 되려는 연습만 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헤엄치고, 적당히 달리고, 적당히 날아다니는 연습 말입니다. 사회도 그걸 요구하고 있죠. 기업들이 서류 스펙만 보고 있으니까 다들 오리가 되는 연습만 하고 있는 거에요.”

김 교수의 말처럼 사회가 그렇게 요구하고 있으니 사회가 바뀌어야지, 청년들이 바꿀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아니죠. 청년들 역시 ‘나는 오리가 아니라 새끼 독수리이다’는 확고한 자기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청년들이 조급하니깐, 빨리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한쪽으로 몰려다니는 겁니다. 잘 날지 못하는 새끼독수리는 지금 당장은 오리보다 못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오리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비상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주위와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비하하고, 훨씬 크게 될 수 있는 사람이 초조해 하면서 쉽게 좌절하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김 교수는 서울대 법대에서도 잘 나간다는 82학번이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원희룡 나경원 조해진 한나라당 의원, 한승 대법원 선임재판연구관, 김상헌 NHN 대표 등이 동기이다. 많은 동기들이 사시에 합격해 판검사하고, 유학을 가는 동안 그는 행시에 3번이나 떨어졌다. 그가 만일 오리처럼 살고자 했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소비 트렌드 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 대한민국 청년들을 위로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과연 쓸 수나 있었을까.

“수술도 중요하지만 당장의 위로가 되는 진통제도 필요하다”

김 교수에게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봤다. ‘아프니까 청춘’인데 청춘이 왜 아픈지, 청춘들이 안고 있는 상처의 실체는 무엇인지. 김 교수는 격화된 경쟁과 세대 갈등을 꼽았다.

“우리 세대만 해도 군사독재에 맞서면서 만들어진 동료애가 있었습니다.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를 불러도 옛날에는 무대 마지막에는 다 모여서 같이 불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조건 한 명을 떨어뜨려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살아 남아야 합니다. 생존경쟁, 이것이 바로 청년들이 아픈 이유입니다. 또 하나는 사회적 분배가 기성세대 위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기성세대는 2008년 금융위기 때 신입 임금 깎아서 구조조정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태아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건 사회적인 낙태 행위입니다. 이 두 가지의 본질은 결국 하나입니다. 사회가 기성세대 위주로 재편돼 있는 상황에서, 거기에서라도 살아 남으려고 청년들끼리 발버둥을 쳐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상처는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청년들에겐 방법이 없습니다. 청년들에게 ‘짱돌’을 들라는 건 올바른 해법이 아닙니다. 좌절만 줄 뿐이죠. 기득권의 철옹성을 쌓고 있는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답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전 빌 게이츠 같은 사람 참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를 독점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회사의 특허를 침해하고 사들이는 등의 반경쟁적인 정책을 폈지 않습니까. 오히려 돈을 많이 못 벌어서 기부를 많이 못하더라도, 좋은 소프트웨어 만드는 회사들과 공생 발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청년들이 창업해서 될만하면 싹을 잘라버리고, 한번 실패하면 재기의 기회도 주지않는 구조를 바꾸어야 합니다. 청년들에게 소프트웨어 하나로 큰 기업을 만들 수가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합니다.”

하지만 김 교수는 기성세대가 답안을 만들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고 강조했다. 바로 그들의 아픔을 들어주는 것. “청년문제는 결국 수술을 해야 고칠 수 있는 병입니다. 하지만 완치까지 오래 걸릴 수 있고, 어쩌면 완치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진통제가 필요합니다. 기성세대가 ‘많이 아프지’라면서 따뜻하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얼마 전 김 교수의 친한 친구이기도 한 조국 교수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기술대학원장 열풍을 설명하면서 “(안 교수 열풍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김난도 교수의 책이 성공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가르치려는 태도가 아닌 들어주려는 태도로 청년들에게 다가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 교수의 이런 어법은 이날 인터뷰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청년들에게 어려운 말로 해법을 제시하는 대신 그는 다정한 선배가 바로 옆에 앉아 얘기하듯 조언했다. “너희들은 새끼독수리야. 오리가 되려고 조급해하지마. 이제 아침시간에 불과한데 뭐 어때.”



남들처럼…상식·영어만 매달렸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 카피 나왔을까…

[머니투데이 대담=유병률 기획취재부장 정리=이현수·최우영 기자][대한민국 대표선배가 ’88만원 세대’에게 <3> 광고인 박웅현]

우리나라 최고의 크리에이티브 킬러로 불리는 박웅현 ECD는 “창의성은 들여다보는 힘”이라고 말했다. “창의성은 한마디로 볼 ‘견(見)’ 입니다. 시청(視聽)이 아니라 견문(見聞)입니다. 일반인은 담쟁이를 시청하지만 도종환은 견문해서 시를 씁니다. 그리고 이 見을 예민하게 만들어주는 촉수가 바로 인문학이자 휴머니즘인 것이죠.” /사진= 이동훈 기자 photoguy@

<박웅현의 대표 카피> :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1993)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1995) '잘 자! 내 꿈 꿔'(1999)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2001) '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엔 도전한다'(2001)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2002) '커피 앤 도넛(2002) '생활의 중심 - 현대생활백서'(2005) '생각이 에너지다-지구 반대편을 찼다'(2007) 'SEE THE UNSEEN'(2008) '진심이 짓는다'(2009)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현역 광고인으로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친다는 박웅현(50) TBWA ECD의 4평 남짓 사무실에 붙어있는 시 구절이다. 그의 사무실은 기대와 달리 아주 평범했다. ECD(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면 크리에이티브가 생명인 광고회사에서도 광고제작 실무를 총 책임지는 임원급인데, 특별히 크리에이티브하다거나 튀는 인테리어도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여느 사무실과 다른 게 있었다. 벽마다 닥지닥지 붙어있는 A4, B4, A3 종이들. 붙일 수 있는 데는 다 붙여놓았다. 처음엔 명카피들을 적어놓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장 그르니에의 <섬>에 나오는 구절들, ‘靑山不墨千秋畵(청산불목천추화(청산은 먹이 없어도 천추에 남는 한촉의 그림)로 시작되는 한시…

박웅현의 사무실 벽은 인문학 교수의 칠판 같았다. 그는 벽을 가리키며 “다들 ‘어디다 써먹을 거냐?’라고 묻는데, 이게 바로 내 청춘을 지탱했고 지금도 나를 받쳐주는 힘이자 본질”이라고 말했다. 그는 ‘본질’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힘주어 말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사람을 향합니다’ ‘진심이 짓습니다’ 등 그의 카피가 유달리 휴머니즘적인 것도 이런 ‘본질’때문인 듯했다.

벽만 그런 게 아니었다. 책상 위에 공책은 왜 그렇게 또 많은지. 기자는 그 중에 표지에 ‘젊음’이라고 쓰여진 공책을 볼 수 있냐고 부탁했다. 그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젊은 친구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틈틈이 적어놓은 것”이라며 펼쳐보였다. 첫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1.本質(본질)을 봐라 2. 클래식(고전)을 궁금해 하라 3. 强者(강자)에게 강하고 弱者(약자)에게 약해라 4. 동의된 권위에 굴복하고 강요된 권위에 저항하라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6. 答(답)은 ‘여기’ 있다. 아니면 어디에도 없다 7. 주변의 고수를 활용하라 8. 외로워하지 마라. 다 똑같다.

벽에 닥지닥지 붙은 ‘본질’의 내공이 느껴지는 메시지였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박경철 안동신세계병원장이 대한민국 청춘들을 위해 콘서트를 열면서 왜 박웅현을 게스트로 초대했는지 알만 했다.

박웅현 ECD가 젊은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적어가고 있다는 공책의 첫페이지이다.

◇왕따의 경험, 어느 순간 별이 돼 있었다

기자는 8번을 먼저 골랐다. 아무래도 지금 청춘들에게 위로가 될 것 같아서 였다. ‘외로워 하지 마라’고, ‘다 똑같다’고 했으니 말이다. 박웅현도 젊은 시절 똑같았다. 무섭도록 외롭고 힘든 시절을 보냈다. 대학(고려대 신방과)을 졸업하고 제일기획에 입사했을 때 그는 ‘왕따’였다. ‘회의에 방해만 된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회의참석도 못하고 혼자 사무실을 지켰다. 그것도 3년을 그랬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 시절 그는 광고계 ‘지진아’였다.

“어머니가 표주박을 사주셨죠. 종이컵 쓰지 말라고요. 하루종일 벽보고 있는데 뭐 할 게 있나요. 동양철학서 서양미술사 보면서 박으로 머리나 때렸죠. 깨지면 서랍에서 또 꺼내서 때리고. 한 10개는 깨먹었을 겁니다. 박이 원래 잘 안 깨지는데 제 머리도 단단하거든요.”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을지 그림이 그려졌다.

인간이 겪는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이 외로움이라는데, 그는 어떻게 버텼을까. “너무 외롭다고, 왕따라고 ‘어떡하지!’ ‘뭘 해야 잘 보일 수 있지!’ 이렇게 흔들리기 시작하면 중심을 잃어버립니다. 중심을 잃으면 다 무너지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중심을 놓치면 안 됩니다.” 당시 박웅현에게 ‘박’과 ‘책’은 외로움에 저항하며 자기중심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광고 하기에는 너무 사변적’이라는 말을 들었던 그는 3년 뒤 우연히 새팀에 합류하면서 순식간에 위치가 달라졌다. 한 의류업체 광고가 자신의 카피로 채택된 것.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제일모직의 '빈폴' 광고였다. 동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하루아침이었다. “그때 드디어 ‘광고를 만드는 사람의 본질은 통찰력과 인문학이다’는 확신을 얻었죠. 내가 그렇게 믿고 살았던 게 확신이 된 거죠. 그래서 젊은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니가 그린대로 인생은 되지 않는다’고 말이죠. ‘왜 그래?’라고 물으면 ‘인생은 원래 다 그래. 답이 어디서 나올지 몰라’라고 말해주고 싶은 거죠.”

박웅현은 나무 전문가가 된 사학자 강판권 계명대 교수, 국내 지리정보시스템(GIS) 최고전문가가 된 운동권 출신의 송규봉씨 사례를 들면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살면서 수많은 점(點)들을 뿌리게 되는데, 이런 점들이 싹 깔렸다가 필요한 순간 점 다섯 개가 연결되면서 별이 됩니다. 이 분들이 나무학자가 되고, GIS 전문가가 되기까지 그 그림을 미리 머리에 그려놓고 달리진 않았을 겁니다. 매 순간 자기중심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별을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박웅현에게 젊은 시절 왕따의 경험과 수없이 읽었던 고전의 점들이 어느 순간 연결되면서 별이 된 것처럼 말이다.

◇나의 수험서는 상식책, 토플책이 아니라 안나카레리나

흩어진 점들은 언젠간 연결돼 별이 될 수 있겠지만, 그전에 분명히 해야 할 게 있다. 한 점 한 점 찍으며 산다는 것은 청춘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살아야 별을 그릴 확률이 높은 걸까.

“입사 초기에 이런 얘기 많이 들었죠. ‘요새 홍대 뜨는 음악 뭔지 아냐? 그런 것도 모르고 어떻게 광고하냐?’ ‘그런 책이나 읽고 있으면 광고 못해’ 등등 말이죠. 그런데 요즘도 그렇지만 마케팅 서적, 자기계발서 같은 책엔 관심이 안 가요.(기자의 상식으로는 광고가 곧 마케팅인데도 그의 책꽂이에는 마케팅 책이 거의 없었다) 대학 때도 정말 신문사 기자를 하고 싶었는데, 상식책 달달 외우는 게 너무 싫었죠. 스물 일곱 지식인으로서 내 자존이 허락하질 않았어요. 그래서 <안나카레리나>를 집어 들고 줄기차게 읽었죠. 같이 신문사 준비하던 친구들이 뭐라고 얘기하면 ‘(상식책) 그게 상식이냐? (안나카레리나) 이게 상식이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때 내 고집은 당시로서는 의미 없는 하나의 점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의미가 있는 거죠.”

언젠가 별이 될지도 모를 점을 찍으며 산다는 것, 박웅현에게 그건 바로 자존(自尊)이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죠. 사람은 다 다릅니다. 자기만의 살아가는 과정이 있죠. 그래서 그 사람만의 정답이 있는 겁니다. 그걸 믿어야 합니다. 자기만의 정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자기 존중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젊은 친구들이 추상적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진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박웅현은 허전하고 불안하고, 뒤 처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읽었고, 지금도 읽는다. “그렇게 읽었던 게 내 자양분이 됐던 것 같아요. 자양분을 계속 채워넣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힘이 약해지는 것 같죠.” 그가 자기만의 정답을 찾을 수 있었던 자존유지의 방법 역시 바로 책이었던 것이다.

◇ 창의력은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차고 넘쳐서 나오는 것

박웅현은 신입사원을 뽑을 때도 주로 클래식으로 뽑는다. 그는 자신이 지난해 TBWA 신입사원 선발 때 출제한 문제지를 보여주었다.

‘제시된 것들에 대해 아는 바를 한 줄로 정리하고 그것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세줄 이내로 정리하시오.’ 1) 아서 밀러 2) 마이클 샌델 3) 황지우 4) 병산서원 5)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6) 마뉴엘 푸익 7)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8) 브론테 자매 9)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0) G.I.F.T 11) 엘라 핏제랄드

“바탕에 충실한 친구를 뽑으려 해요. 바탕이란 건 바로 생각이죠. 토플 점수 몇 점 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싶다는 겁니다. 스펙은 포장에 불과합니다. 영화도 ‘해리포터 죽여요!’가 아니라 히치콕이 뭔지, 라쇼몽이 뭔지 알고 있나 그런 걸 보고 싶은 거죠. 생각의 기초체력이 있으면 나머지는 따라옵니다. 카피 어떻게 쓸지는 훈련하면 됩니다. 마케팅 이론도 1년이면 다 가르칩니다.”

박웅현은 면접도 한 사람 당 1시간씩 카페에 앉아서 한다고 했다. 이력서 보고 질문 하는 식이 아니라 커피 한잔 앞에 놓고 서로 물어보는 식이라고 했다. ‘사회가 만든 취업 매뉴얼대로 준비한 청년들에게 오히려 가혹한 게 아니냐’고 했더니 그는 “TBWA같은 회사가 생기고, 또 생기면 기성세대가 잘못 만든 시스템도 바뀌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웅현이 설명하는 창의력도 이런 맥락과 다르지 않았다. “창의력은 스필오버(spillover, 차고 넘치는 것)가 돼야 나오는 것이지 스퀴즈아웃(squeeze out, 쥐어 짜는 것)한다고 나오는 게 아닙니다. 넣어야 합니다. 스폰지처럼 모든 색깔 잉크를 다 빨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스필오버돼서 나오는 겁니다. 청년들이 취업하려면 뭔가 보여줘야 하니깐 포장하고 계속 짜내는데 그건 아닙니다. 30살까지 살겠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넣어야 합니다. 나중에 짤 기회가 와요. 스필오버하는 사람은 그 기회를 잡는 것이고 짜대기만 한 사람은 못 잡는 겁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며 등록금 벌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스펙도 채워야 하는 20대들은 박웅현에게 이렇게 하소연할지 모르겠다. “선배는 이미 성공의 최정상에 섰으니깐 덕담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루하루 불안에 쫓기는데 느긋하게 클래식 읽을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초조하고 불안할수록 그 시기를 얼마나 묵직하게 자존을 지키며 보낼 수 있냐가 성공의 관건임을 이미 성공한 박웅현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이현수 기자 hyde@ 최우영 기자 young@



3할 타자와 2할5푼 타자의 차이점을 아시나요?

[머니투데이 이현수,최우영 기자][대한민국 대표선배가 ‘88만원 세대’에게 <2> 양준혁 야구해설가]

양준혁은 88만원 세대와 88억원 세대의 차이는 ‘한 끗’이라고 말했다. “하나마나한 짓이라 지레 포기하지 않고 1%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끝까지 달리는 것, 그런 자세의 차이가 88억원 세대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양준혁 역시 땅볼 치고 1루까지 가장 열심히 달린 선수였다. / 사진=홍봉진 기자 hongga@
"제 20대요? 어려움과 괴로움의 연속이었죠."

양신(梁神) 양준혁(42)도 처음부터 신은 아니었다. 고등학교(대구상고)를 졸업하고 삼성에 입단하려 했으나 "대학 가서 더 배우고 오라"는 핀잔만 들었다. 대학(영남대)을 졸업하고 다시 삼성을 찾았지만 "자리가 없다"고 해서 상무로 발길을 돌렸다. "야구만 생각하며 눈물 젖은 빵을 먹어온 지 그때가 딱 15년째였는데, 이대로 무너지는가 했죠. 단무지 팔고 파출부 나가던 엄마 얼굴이 어른거리더라구요." 양준혁의 20대는 지금 20대와 많이 닮은 듯했다. 수십 수백 번 원서를 써도 취업하기 힘들어 수없이 '이대로 무너지는가'를 되뇌어야 하는 지금 20대와 말이다.

양준혁은 이로부터 2년 뒤 꿈에 그리던 삼성에 입단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신의 경지에 오르기 시작했다. "난 야구만 했다. 지식은 없다. 하지만 야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웠다"는 양준혁을 지난달 초 서울 서초구 양재동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야구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가 야구를 통해 배웠다는 인생타법이 눈물 젖은 원서를 쓰고 있는 88만원 세대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였다.

"내야안타 아니었으면 나도 2할9푼대 타자"

인터뷰 취지를 설명하자 양준혁은 대뜸 "(88만원 세대와 88억원 세대는) 한 끗 차이"라고 말했다. 한 끗 차이라니? 지금 청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1%의 가능성을 믿고 죽기 살기로 뛰다 보면 기회가 생긴다는 얘기입니다." 그러고 보니 양준혁은 야구 기자들 사이에서 땅볼치고 1루까지 가장 열심히 뛰는 선수로 유명했다.

"제 통산타율이 3할1푼6리인데 내야안타가 159개입니다. 아웃 될 것 같아도 1루까지 죽고 살기로 뛰는 거죠. 열심히 뛰면 상대 내야수도 다급해지기 때문에 에러가 나옵니다. 포수가 송구실책을 하면서 결승타가 되기도 합니다. 그게 없었으면 저도 2할9푼 타자에 불과했을 겁니다. 자세는 한 끗 차이지만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셈이죠. 단 1%의 가능성이라도 믿고 달려야 합니다."

99%의 불가능만 보는 사람과 1%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사람의 차이는 그 결과가 엄청나다는 설명이다. 그는 "결과가 어차피 별거 아닐 거라 생각하고 대충 넘어가면 기회를 만들 수 없다"며 "하나마나 한 짓이라 치부하는 것이 가장 나쁜 자세"라고 힘주어 말했다. 자세의 차이가 삶의 차이를 만든다는 그의 메시지는 기자에게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우보천리의 진리는 야구나 인생이나 매 한가지"

한 끗 차이, 말이 쉽지 그 한 끗을 만들려면 엄청난 고통이 따를 것 같은데 양준혁 역시 그랬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 있잖아요.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일부러 불편한 자리에 누워 쓸개를 맛본다는 고사성어 말입니다. 삼성 입단을 거부당하고 상무에 갔을 때 제 심정이 그랬습니다. 그 때 결심한 게 몸부터 불리자는 것이었죠. 당시 상당히 마른 편이었는데, 야구선수로서 평생 핸디캡이 될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웨이트 트레이닝이란 거, 이게 장난이 아닙니다. 근육이 바로 붙는 게 아니거든요. 처음에는 파열이 되고 찢어집니다. 그래도 계속해야 근육이 박힙니다. 중단하면 원점이죠. 뭔가 얻으려면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받아들이면서 뚜벅뚜벅 나아가야 합니다."

손목 힘을 기르기 위해 20대 내내 손목 스냅을 이용해 파리를 잡던 양준혁이었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소처럼 우직하게 걷다 보면 천리를 간다는 우보천리(牛步千里)의 진리는 야구나 인생이나 매 한가지인 듯 했다.

"기뻐하는 건 딱 30분이면 족합니다"

하지만 양준혁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천리를 다 왔다고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친구들일수록 보상심리가 있어서 목표를 달성하면 딱 멈춰버립니다. 그것보다 더 큰 산이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멈추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승엽이처럼 계속 더 높은 목표를 세워가면서 해나가야 되는데 말이죠. 저도 사람인데 왜 안 그랬겠습니까. 그래도 멈추고 싶을 때마다 마음으로 트레이닝 했습니다. '이러다간 곧 떨어진다'고 말이죠."

양준혁은 2000안타가 최고 목표였는데 그걸 치고 나서 '딱 한잔'만 먹고 다음날 안타 하나 더 때리고 싶어서 연습을 했다고 한다. 2002년 첫 우승을 했을 때도 하루 딱 놀고 다시 운동에 들어갔다고 했다. "기뻐하는 건 딱 30분, 1시간이면 떡을 칩니다. 더 넘어가면 안됩니다. 거기서 끝내야 합니다. 젖어버리면 끝입니다. 환희는 빨리 잊고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거죠." 참 야박한 얘기이지만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그래서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는 2할5푼대 타자"

하지만 신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2002년 팀은 우승했지만 자신은 9년간 지켜오던 3할 타율이 무너졌다. 양준혁은 자신의 인생타법에서 1%가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기장면을 비디오와 사진으로 계속 돌려봤죠. 어느날 답이 나오더군요. 신인시절 한창 잘 나갈 때 타격하고 나서 만세를 하는 듯한 사진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바로 이거다' 싶었죠. 한 팔을 투수쪽으로 던지며 체중을 실어 치는 거죠. 왜 검도에서도 끊어 친 뒤 재빨리 빠지지 않습니까." 바로 만세타법이었다.

그러나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서른 넷. 야구선수치고는 전성기가 지난 나이였다. 섣불리 변화했다간 오히려 실패만 재촉할 수 있는 나이였다. 하지만 겨울 내내 이를 악물고 갈고 닦은 만세타법은 다시 그의 타율을 끌어올렸다. '똥폼'이라는 핀잔도 많았지만, 그가 불혹의 나이까지 현역으로 뛸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 됐다.

청년들에게 그의 만세타법은 어떤 의미일까. "대학교 강연을 다니며 청년들을 만나보면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남과 다르게 새로운 시도를 했다가는 본전도 못 건질 수 있다는 심리 말입니다. 현재를 지키는 건 실은 본전이 아니고 퇴보인데도 말이죠. 청년들이 다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색깔이 없는 거에요. 뭔가 색깔이 있어야 수많은 무리에서도 쓰임새가 있는 겁니다. 교수들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야구로 치면 잘해야 2할5푼 타자밖에 안 되잖아요."

2할5푼대 청년이 3할대가 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자기만의 색깔'이라는 조언이다. 똑같은 스펙으로 똑같이 취업에 목매다는 것이 정답이 될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자기만의 색깔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양준혁은 "스스로 의사가 돼서 처방전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의 장점은 왼손타자에다 장타력이 있다는 것이죠. 이를 바탕으로 나름의 타법을 개발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보다 내 자신을 연구한 것이죠. 누군가에게 기대서는 안됩니다. '내 자신이 스승이다'고 생각하고 나에게 묻고 해답을 내려야 합니다. 나 스스로가 병원 의사가 돼서 처방전을 내려야 합니다." 스스로 환자가 되고, 의사도 될 수 있어야 자기만의 색깔도 처방해낼 수 있다는, 바로 자기 객관화 훈련을 그는 역설했다.

"가장 자랑스러운 기록은 최다사사구 1280개"

그래도 이승엽에 가려서 만연 2인자로 지내야 했던 게 기분 좋지는 않았을 터. '질투심 같은 건 없었냐'고 묻자 "밥상도 네 다리가 있어야 선다"는 답이 돌아왔다. "야구가 왜 좋은 운동인지 아십니까. 팀워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번트치고 희생도 해야 합니다. 팀플레이가 안되면 아무리 능력 뛰어나도 소용없습니다. 야구가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는 "요즘 청년들이 자기밖에 너무 모른다"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청년들의 공동체의식 결핍을 자신과 이승엽과의 관계에 빗대어 지적했다.

"승엽이가 크기 전엔 제가 최고연봉인 1억5천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승엽이가 아시아 기록을 깨면서 3억원을 받았죠. 그러니깐 저도 2억5천만원으로 오르더군요. 승엽이가 더 받을수록 저도 더 받게 되는 겁니다. 그게 팀플레이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기록이 뭔지 아냐'고 기자에게 반문했다. 그에게 '최다'자가 붙은 기록만 최다경기(2135경기), 최다홈련(351개), 최다안타(2318개), 최다타점(1389개), 최다득점(1299개), 최다타수(7332타수), 최다루타(3879루타), 최다사사구(1280개) 등 8개. 그는 이런 최고 프로필중에서도 가장 나중에 언급되는 최다 사사구(四死球)가 가장 자랑스럽다고 했다. 볼 넷으로 나가고, 또 투수가 던진 볼에 맞아서 나간 횟수가 가장 많았던 것. "뒤의 타자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야구를 했습니다. 특히 승엽이에게 말이죠. 그래서 만연 2인자라는 소리를 들어왔는지 모르죠. 그런데 막상 은퇴경기를 하고 나서보니 제가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 돼있더라고요."

"꼭 취업만이 길은 아니지 않습니까"

야구재단 이사장에, 경기 해설자, 방송출연, 프랜차이즈 음식점 창업 등으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대학교 강연을 나가고 있는 양준혁에게 청년들에 위한 한마디를 부탁했다. "제가 은퇴하고 방송출연을 하니깐, '강호동 따라 하는 거냐''는 핀잔도 많았죠. 뭐라도 해도 상관없습니다. 야구할 때 그랬던 것처럼 늘 새롭게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그래야 더 길게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청년들은 다들 비슷비슷한 스펙입니다. 그런데 꼭 취업만이 길은 아니지 않습니까. 새로운 길을 개척해서 깊이 파고 들어가서 새로운 아이디어 내고 새롭게 창업하는 것도 길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리고 1%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믿고 한번 해보세요."

양준혁은 확실히 신의 경지였다. 잘 나가고 잘 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객관화하며 그 한 끗의 차이를 지금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왜 88만원 세대와 88억원 세대가 한 끗 차이에 불과할 뿐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시골의사 박경철 "청년들, 등록금처럼 스스로 목소리 내야 바뀐다"

[머니투데이 대담=유병률 기획취재부장, 정리=최우영 기자 ][편집자주] 머니투데이는 '시골의사' 박경철 안동신세계병원장을 시작으로 앞으로 매주 한차례씩 대한민국 청년들의 멘토가 되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선배들의 인터뷰를 게재한다. 이를 통해 88만원 세대의 고통과 좌절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이들이 88억원 세대로 거듭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대한민국 대표선배가 '88만원 세대'에게 <1>시골의사 박경철]

길들여진 청년들에 '실패할 자유'줘야

박 원장은 "대한민국 청년들에게서 '스톡홀름 증후군'이 엿보인다"며 안타까워했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인질범들에게 동화돼 오히려 호감을 나타내는 심리현상. 그는 "성공한 사람의 뒤통수만 쳐다보며 달리게 만드는 기성세대의 질서에 동화돼 많은 젊은이들이 그 줄에 서지 못하면 도태될까 두려워하고 있다"며 "청년들이 창조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청년들 스스로 질서를 바꾸기 위해 요구하고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이명근기자 qwe123@

'시골의사' 박경철 안동신세계병원장이 사무실로 사용하는 서울 종로구 충정로의 한 오피스텔 거실에는 대형그림 하나가 걸려있다. 언뜻 봐서는 서양명화 같다. 그런데 기자가 걸어 들어가는 사이, 허리를 숙이고 있던 그림 속 여자 모델이 스르르 옷을 벗는 것이 아닌가. 명화가 아니라 누드화였다.

"이거요? 배준성 교수가 하는 작업 중 하나인데, 관람객들에게 일종의 '야지(조롱하다는 뜻의 비속어)'를 놓는 거죠. 이쪽에서 보면 옷을 입고 있는데 저쪽에서 보면 벗고 있잖아요." 박 원장은 배 교수의 이런 '야지' 컨셉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대한민국 청년들이 왜 이토록 불행한지에 대해 풀어놓은 그의 이야기도 야지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그 언저리였다. 대상은 바로 기성세대였다. "청년들이 우울하고 불행한 건 기성세대가 자신의 성공경험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성세대가 기득권을 놓기가 싫기 때문이죠."

박 원장은 대신 청년세대에 대해서는 행동을 촉구했다. "침묵만 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이용해야 합니다. 엠티 가는 대신 전부 손잡고 투표하러 가야 합니다. 그래야 바뀝니다." 머니투데이가 박 원장을 인터뷰한 것은 지난달 초순 무렵. 하지만 그의 얘기는 마치 최근 서울시장 출마를 고려중인 안철수 서울대융합기술대학원장의 출사표를 미리 밝힌 듯하다. 박 원장은 안 원장과 청춘콘서트 전국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기성세대에 대한 박 원장의 '야지'는 모질고 혹독했다. "기성세대의 성공방식은 '잘 살아보세'라는 목표를 정해놓고 오와 열을 맞춰 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달려간 흔적을 따라 최대한 빨리 따라가는 것, 바로 이겁니다. 고민도 필요 없고, 가다가 걸려 넘어지면 밟고 넘어가고, 신호 걸리면 통과해버리고, 호루라기 불면 봉투 꺼내서 '우리가 남이가?' 하며 찔러주면서 모든 과정을 돌파하는 것이죠. 기성세대가 이런 질서를 강요하니깐 젊은이들이 불행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전후좌우 살펴볼 여유도 없이 오로지 잘 뛰는 사람 뒤통수만 보고 달려야 하는 사회를 만들어 놓았으니 청년들은 눈 앞이 막막하다는 것.(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사이의 중간세대라고 규정했다)

기성세대 줄세우기에 대부분 루저되는 세상

경쟁,성공 우선주의..공공의식 소멸시켜

"어떤 문제가 생겼냐 하면 한창 성장할 때는 뒷줄에 선 사람들도 통과했지만 점점 커트라인이 짧아지게 됐다는 겁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패자가 되고있는 거죠. 지금은 공부 잘하는 재능 하나만 쳐주고 있습니다. 공부 잘하는 줄에 노래 잘하는 재능, 그림 잘 그리는 재능도 다 세우고 있잖아요. 이렇게 되면 대부분 루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박 원장은 특히 "지금은 창의의 시대이기 때문에 더더욱 과거 성공경험의 폐해가 깊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경기장 레인이 아니라 광야에서 뛰는 시대입니다. 만들고 개척하는 창의의 시대이죠. 그런데 창의라는 게 두들겨 팬다고 나옵니까. 줄 서서 따라 한다고 됩니까. 창의는 머리를 맞대야 나옵니다. 그런데 줄을 세워서 달리게만 하고 있으니 이마를 맞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마트폰 밀리고, 정보기술(IT) 밀리고, 청년들에겐 기회가 없어집니다. 지금은 줄을 세울 게 아니라 줄을 없애고 열어줘야 합니다." 그는 '전복'이라는 표현도 썼다. "청년들을 보면 펄펄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기성세대가 이들을 다 눌러놓고 있습니다. 기성세대가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사회가 전복된다'는 문제의식도 못 느끼고 있는 것이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면서 박 원장은 줄 세우기에 가장 '열심인' 집단으로 대기업을 지목했다. "정주영 회장 같은 창업 1세대의 공(功)은 당연히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기업가정신으로 지금의 한국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 톤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지금 대기업은 물려받은 돈으로 명품전쟁, 빵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욕 먹는 겁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론 청년들을 줄 세웁니다. 똑똑하면서 말 잘 듣는 기계를 뽑아 양성하는 거죠.

이렇게 사람들을 뽑고 기르니까 창의적인 사업의 길은 안 보이고, 위험부담 안고서 새 사업을 펼칠 수가 없는 것이죠. 사실 청년들이 느끼는 두려움이나 재벌 3세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비슷합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청년들은 공무원 시험으로 몰리고 재벌은 빵 장사까지 하는 것입니다. 대기업이 청년들에게 도전하라고 하는 건 굉장히 비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년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을까. 뒤통수만 보고 달리게 하는 사회논리에 스스로 종속돼 내면화 해버린 책임은 없는 것일까. 박 원장은 "청년들도 길들여졌다. 나만의 문제에만 매몰되고 있다. 줄을 서지 않으면 도태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젊은이들에게 화살을 돌릴 수는 없다"며 "청년들이 이렇게 된 건 기성세대 때문이다"고 역설했다.

지금은 경기장 레인 아닌 광야서 뛰는 창의의 시대

청년들 선택할수 있는 힘 가지고 시위해야

"초등학교 6년 내내 양동이 들고 구더기 득실대는 변소를 청소했습니다. 어머니가 집안일 하고, 아버지가 가계를 책임지는 대신 자식들도 일정부분 책임을 맡았던 거죠. 그런데 지금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길거리에 떨어진 휴지를 치우면 손 더러워진다고 혼냅니다. '쓰레기 치울 사람은 따로 있다' '넌 종자가 다르다'는 식의 교육 아니겠습니까. 이건 대단히 무서운 얘기입니다. 공공의식이 소멸되고 있는 것입니다." 기성세대가 경쟁, 성공만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청년들도 이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청년들이 도전을 주저하고, 공적인 의식이 부족한 이유가 과거 성공경험 때문이라면 문제해결의 출발은 결국 기성세대의 성공방식을 뒤집는 것일 터. 박 원장은 "기성세대는 청년들의 숨통을 틔워주면서 도전하라고 해야 한다"며 "그 숨통은 바로 과거의 성공경험에는 없었던 저스티스(정의)와 페어(공정)"라고 말했다.

"제비가 집 짓는 걸 한번 보세요. 지푸라기가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단단해지면 그 다음에 새끼를 낳습니다. 새끼가 날개에 힘이 생길 때까지 엄마 제비는 새끼를 지켜주고 나는 법을 가르칩니다. 미천한 제비도 새끼들에게 최소한의 주거와 교육 등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다 갖춰주고 혼자 날아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주거와 먹는 것, 교육은 알아서 질주해야 합니다. 최소한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 먹고 사는 문제는 국가가 보장해야 합니다. 사회가 청년들을 위해 안전판이 돼줘야 합니다. 그래야 청년들이 도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청년들에게 실패를 해도 괜찮다는 신뢰를 주고, 어깨도 두드려줘야 청년들이 도전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20대가 나서서 외치면 사회 바꿀수 있어

내 발등 불 아닌 남들 불도 함께 꺼주자

박 원장은 대한민국의 88만원 세대 청년들에게 "미래는 더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고 주문했다. "한 10년만 있으면 기성세대는 다 퇴장합니다. 청년들의 세상이 됩니다. 많은 청년들이 눈앞의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고 있지만 앞으로는 패러다임 자체가 바뀝니다. 청년들은 현상을 헤치고 본질을 봐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줄 세우기는 무의미해지는 시대가 머지않아 오게 될 것이고, 이런 믿음이 세상을 더 빨리 바꾸게 됩니다. 내 테두리 안의 문제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담을 뛰어넘는 초월성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죠. 내가 가진 재능을 갈고 닦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지금 청년들에게 필요합니다."

박 원장은 이어 "청년들이 창조적 긴장을 유지해가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청년들이 재미있는 것을 하고 싶다고 하는데 사실 애 안 쓰고 할 수 있는 재미있는 거라곤 술 담배 도박 마약뿐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일이든 다 힘들죠. 자전거, 등산, 스케이트도 처음에는 꼬리뼈 아프고 발목, 허리 다 아프죠. 이겨내고 잘할 수 있게 돼야 기쁨이 생깁니다. 청년들이 익숙하지 않은 것, 당연하지 않은 것, 습관적이지 않은 환경을 계속 만나나가야 합니다. 쳇바퀴처럼 산다면 오퍼레이션 시스템 없는 하드디스크에 불과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익숙해지고자 하는 끊임없는 창조적 긴장이 필요합니다."

박 원장에게 청년들에게 보다 손에 잡히는 메시지를 부탁해 보았다. 돌아온 답변은 "요구해서 고쳐야 한다. 투표해서 바꿔야 한다"는 것. "대학 등록금도 침묵했으면 쭉 갔을 것 아닙니까. 청계천에서 소리라도 지르니깐 달라지는 겁니다. 청년들은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시위를 해야 합니다. 투표 날 엠티 가는 대신 손잡고 나와야 합니다. 외치면 수요가 되고, 결국 공급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회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청년들이 내 발등의 불뿐 아니라 남들 불까지 꺼줄 수 있는 공적인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 발등만 불을 끄면 머리에 불 날라오고 다 타죽습니다. 남들 불붙은 것도 함께 꺼줘야 합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불씨의 원인을 찾아 같이 양동이 들고 가서 꺼야 합니다."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던지는 박 원장의 메시지는 두 가지였다. 88만원 세대를 88억원 세대로 키우려면 이들이 한번 꿈틀해볼 수 있도록 페어한 질서를 우리 사회가 만들어 주는 것, 그리고 청년들 스스로 직접 그 질서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이었다.

정리=최우영기자 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