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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계 오스카상' 멀린상 받은 이은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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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을 한다는 건 더 많은 기회가 놓인 길목에 선다는 거죠.상 받은 걸로 끝이 아니에요. 그 다음이 중요한 거지.지금까지는 고지를 향해 등산하는 기분이었다면 이제는 그냥 이 산 저 산 여행다니는 기분입니다. "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 보이는 세계적인 마술사 이은결 씨(31 · 사진).최근 마술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멀린상'을 거머쥔 그의 수상 소감이다. 그를 처음 만나 놀란 것은 190㎝의 큰 키나 특유의 번개머리 때문이 아니었다. 얼굴보다 더 큰 손이었다. 세계를 놀라게 한 두 손을 크게 휘저으며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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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때까지 경기도 평택에서 살았어요. 염소,돼지,닭까지 거의 모든 가축을 키우며 사과 농사를 지었죠.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상상력과 감성이 동시에 자랐으니까요. "
그의 외할머니는 평택 천혜보육원 창립자다. 어머니가 그곳에서 일을 도우면 꼬마 이은결은 방과 후 보육원 아이들과 어울리며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 "미군 기지가 옆에 있었는데,누가 저를 입양하고 싶다고 한 적도 있었어요. 부모 없는 친구들한테 미안해서 엄마한테 엄마라고 부른 적이 없었으니 당연히 저를 고아라고 생각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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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때 가족과 함께 서울 잠실로 이사 온 그는 아이들의 텃세와 문화 차이로 고생했다. "싸우다 친해진 친구가 있었어요. 생일 파티에 초대를 받았죠.늘 하던 대로 요구르트병과 수수깡을 잘라 선물로 가져갔는데 웬걸 모두 학용품,만화책을 사온 거예요. 초라한 제 선물이 부끄러워 꺼내지도 못하고 돌아왔지요. "
그때부터 성격도 조용해졌다. 집에서 비디오를 보며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때마침 국내 최초의 마술학원 '에디슨 월드매직'이 문을 열었고,부모님이 그를 학원에 보내줬다. "처음엔 시시했어요. 비밀을 알고 나니 허탈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학교에서 짝에게 슬쩍 보여줬는데,5분도 안 돼 난리가 났죠.옆반에서도 뛰어오고.순식간에 스타가 됐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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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점점 마술에 빠져들었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원으로 달려갔다. 중급 과정을 마칠 즈음 아버지 사업이 기울었다. 그는 원장에게 학원비 대신 청소를 하겠다고 했고 그렇게 5년을 더 배웠다. "전 오타쿠(한 가지 일에만 병적으로 집중하는 사람)에 계획주의자예요.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질 못합니다. 계획한 대로 모든 일이 이뤄져야 하고,그게 어긋나면 참지 못해요. "
그는 대학로에서 쫓겨다니며 길거리 공연을 했고,한 동작을 연습하느라 밤을 새웠다. 유명 마술사들의 영상도 100번 이상 봤다. 입 모양이나 눈빛,손만 따로 뜯어서 보며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마술대회에서 수상하며 유명해졌지만,한순간에 마술처럼 '짠'하고 나타난 천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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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코미디 클럽'에서 하루 10분씩 공연했어요. 객석에 2~6명 정도 있었죠.최악의 관객들을 그때 다 만났습니다. 돈 좀 있는 중년 남자들이 '어디 너 웃기나 보자'며 벼르는데 뭘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그렇게 2년을 버티자 얼굴도 두꺼워지고 오기도 생겼죠."
어느 날 일본의 세계적 마술사 유지 야마모토와 유지 야스다가 클럽을 찾았다. 그들은 쇼를 보고 나서 "아시아 최대의 마술대회가 있으니,한국 대표로 와보라"고 했다. 그 대회에서 중국 일본을 제치고 1등을 차지한 그는 2003년부터 세계마술사연맹 월드챔피언십에서 2연패를 하며 스타가 됐다.
해군 마술병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지난해 제대한 그는 '이은결의 더 일루전'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개념의 마술쇼를 만들어 전국 투어 중이다. 올해는 CJ미디어와 손잡고 후배 마술사들을 위한 무대도 만든다. "이은결이 한 거니까 나도 저렇게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은 위험해요. 제가 길을 개척하면서 동시에 길을 끊은 것이랄까. 이은결처럼 하면 결코 이은결이 못 되죠.세계 1등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마술을 찾는 게 더 중요합니다. "
그의 희망처럼 지금 전 세계 마술대회를 휩쓰는 이들도 '이은결의 후예들'이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