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산책

연을 쫓는 아이



지구는 21세기를 맞이했지만, 아직도 세계의 곳곳에는(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한반도도 포함해서..) 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념, 종교, 민족과 같은 '사람이 하는 생각'을 어떤식으로든 분류하고 편을 나눈 상태에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2007년 10월을 기준으로 UN 평화유지군에 소속된 8만 2천명이 전세계 17개 분쟁 지역에서 활동 중이라고 하는데, 이 숫자는 UN 평화유지군 활동 60년 동안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을 쫓는 아이"는 소련의 침공과 내전, 분쟁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영화에 출연한 세 아이에 대한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테러를 우려해 다른 나라로 피신해야 했다거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영화의 일부 장면을 문제삼아 상영을 금지했다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죠.

그럼에도 솔직히 우리 자신이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이해하거나, 짐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뉴스를 통해서, 혹은 잡지 나 신문을 통해서 가끔 그네들의 아픈 상황을 보긴 합니다. 저도 시사 프로그램, 시사 잡지를 보면서 어렴풋이 그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먼나라에 다른 언어, 그리고 다른 종교, 문화 탓에 가슴에 와닿는다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주 멀게 느껴지는 아프가니스탄은 대한민국과 같은 '아시아권' 나라에 속합니다)
 

영화는 외부의 침략과 내전에 휩쌓이기 전의 평화롭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출발합니다. 그때부터 이미 불안한 기운은 시작되고 있었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아름다운 우정 키워가던 두 소년이 멀어지는 (빌어먹을) 사건이 생깁니다. 하지만 두 아이의 상황보다, 주변을 둘러싼 상황은 더 급박하게 흘러가게 되고... 그렇게 아프가니스탄에 살던 두 아이를 시작으로 아프가니스탄이 힘겨워 했던 지난 시간동안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고, 변해야했고, 힘겨워 해야 했는지를 관객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런 편하지만은 않은 장면들과 상황들을 따라가다보면, 관객은 호흡을 줄이고 긴장 할 수 밖에 없게 되더군요. 탈레반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뉴스에 가끔 등장하는 말일 뿐이지만, 영화에서 그 말은 섬뜩한 현실속의 조직이 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프가니스탄의 현상황은 한편으로는 우리나라가 지나온 상황과도 흡사 닮아 있습니다. 외국의 침략, 그리고 곧 이어진 자국내의 전쟁. 아마 우리도 그런 역사를 간직한 탓에 영화속에 장면이 완전 낯설지도 않나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를테면, 주인공 아이인 아미르의 아버지가 소련의 침략을 받은 아프가니스탄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용기 있는 모습은 한편으로 겁 많은 주인공 아미르에 대한 대비이기도 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시대 일본군에게 대항했던 우리의 조상의 모습이였다면 과장일까요? 물론 그의 용기 있는 모습이 계속되진 않습니다만, 하지만 그 또한 스크린 속에서 충분히 수긍이 갑니다.

어떤 현실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고, 우리는 영화에 웃기거나, 감동적이거나, 멋지거나, 무섭거나 하는 식의 평가를 합니다. 이 영화에 내려진 평가는 '감동'입니다. 보고 난 뒤에 그 점은 충분히 공감됩니다. 하지만 단순한 감동 뒤에는 지구안에 있지만, 전혀 다른 상황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됩니다.
 
이 영화는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작가이며, 현재 미국에서 의사와 작가 활동을 하고 있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책을 보진 못했으나, 책이 출판되기 전 단계에서부터 영화 촬영이 준비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만큼 원작에 충실하게 제작되었다는 평입니다.

영화의 포스터에서 자랑하는 것처럼 원작은 120주 동안 뉴욕타임즈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고 하고, 영화 역시 전미 비평가 협회 선정 ‘2007 최고의 영화 TOP10’ 에 든 것을 시작으로, 시카고 타임즈 선정 ‘2007 최고의 영화 TOP10’, 평론가 벤 라이언 선정 ‘2007 가장 눈부신 작품 TOP10’, 2007 Satellite Award ‘각본상’ 노미네이트, 2008 방송영화 비평가 협회 ‘최우수 아역 배우상’수상, 2008 BAFTA Award ‘외국 작품상’ ‘각본상’ ‘최고 음악상’노미네이트, 2008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작곡상’ 노미네이트, 2008 아카데미 ‘작곡상’ 노미네이트에 빛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우리는 '이슬람교'와 '이슬람 극단주의' '이슬람 원리주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며, 영화만으로는 외세(소련, 러시아)의 침공을 이겨내는데 앞장선 탈레반이란 조직이 왜 (어느 순간) 아프가니스탄에게 공포를 가져왔는지, 솔직히 왜 그들이 아직도 분쟁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탈레반에 관한 우리의 기억을 되돌리면 이렇습니다. 지난 2007년 7월 한국의 샘물교회에서 전도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갔던 한국인 23명을 납치하는데 앞장선 조직이 탈레반입니다. 그 사건이 던져준 여러 가지 논쟁거리를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어쨌든 우리에게 아주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건이죠...)


극장을 찾아 두 소년의 삶과 감동, 아프가니스탄의 슬픈 현실에 잠시 눈을 돌려보시길 권해봅니다.






닷새를 일하고 이틀을 쉬라 했든

엿새를 일하고 하루를 쉬라 했든

일요일이 있다는 것이,

내 마음대로 시간을 휘두를 수 있는 그런 날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다행일 수가....






'연을 쫓는 아이'의 마지막 200 여 페이지를 주절르고 앉아 읽을 수 있었다.

늘 조각난 시간, 시간을 조각내어 책을 읽는 내 습관대로 이 책의 마지막 200 여 p를 버스 안에서 읽기 시작했더라면

난 어쩌면 종점까지 갔을지도 모르지. 사람이 살다보면 결근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철통같은 정신적 무장은 애당초 내게는 없었으므로 난 때로 일탈을 꿈꾸고 결근을 꿈꾸고 멀리 달아나 꼭꼭 숨는 것을 꿈꾸고 있으므로.

좋은 이야기 하나를 부여잡고 하루를 온통 숨어 읽는다해서 징계 대상이 될 리는 만무일테니.


책장을 덮으면서 왜 나는 이런 생각부터 한 걸까?

그리고 이 책을 누구에게 주어야겠는지, 이것 좀 읽어보라고 내 손때 묻힌 채 건네주어야 할 이가 누군지를 먼저 뒤적였을까?



 



성장소설이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한 아이의 성장, 삶의 길을 그리면서 작가는 많은 것을 고한다, 독자에게.

제발 내가 이렇게 우회하여 일러바치는 조국 아프카니스탄의 비극을 알아들어주기를

그래서 그 비극의 막을 내릴 수 있는 신의 가호가 있기를

세상의 독자들에게 원하고 있다, 각자의 신에게 기도해주기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사로 성공한 한 남자가 이런 장대한 소설을 집필하기까지 그의 내면에서 한 시도 떠날 수 없었던

암울한 조국, 아프카니스탄에 관한 그의 절망이 소설 곳곳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영어로 집필한 아프카니스탄 최최의 소설'로서의 감탄이 아니라

이런 방대한 양의 소설을 첫 작품으로 내놓은 것은 할레드 호세이니라는 작가의 재능이 아니라 작가의 절박함이었을 거라고.





마루에 시트로 급조한 기도용 깔개를 깐 다음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댔다.  눈물이 시트에 스며들었다. 서쪽을 향해 절을 하다가, 내가 15년 넘게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문은 오래 전에 잊어버렸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아직 생각나는 몇 마디 기도문을 계속 외웠다.

 "알라신만이 존재하며 무하마드는 신의 사자이다."

 나는 바바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신은 존재하고 항상 존재했었다. 이곳 복도에 있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눈에서 나는 신을 보았다. 밝은 다이아몬드 빛과 높이 솟은 광탑이 있는 하얀 사원이 아닌, 바로 이곳이 진정한 신의 집이며 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신을 찾게 되는 곳이었다. 신은 존재하며 신은 존재해야한다 . 그동안 신을 홀대한 것에 대해 신에게 용서를 빌었다. 벌을 받지 않은 채 배신하고 거짓말하고 죄를 지었다가 내가 필요하자 이제 와서 신을 찾는 것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코란에서 말한 대로 신이 자비롭고 인자하며 은혜가 넘쳐흐르길 빌었다. 서쪽을 향해 절을 하고 바닥에 입을 맞추면서 헌금과 기도를 하겠다고, 라마단 기간 동안 단식을 하고 라마단이 끝나도 단식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신의 성서에 들어있는 마지막 구절까지 다 외울 것이며 사막에 있는 그 무더운 도시로 순례를 떠나 카바 앞에 절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신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 나는 이 모든 것을 실천할 것이며 오늘부터 매일 신을 생각하겠다고 약속했다.





참 여러 번 안경을 벗곤 했다.

556 쪽의 묵직한 무게를 감당하기엔 내 눈은 늙었지만 내 가슴은 아직 살아 있었다.

도무지 어디까지 나를 끌고 가서 내동댕이 칠 것인지

그것이 궁금하여 절대 안 하는 짓, 마지막 부분을 먼저 읽는 짓을 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다시 안경을 찾아 쓰고

그리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읽었다.


더 이상의 절망은 없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야.

작가가 그렇게 잔인하진 않을 거야.




인터넷을 접속하니 서울대생인, 공부보다는 돈을 택한 세기적 미녀의 얼굴이 뜬다.

오늘에야 내가 왜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곤 하지 않았는지, 그녀에게 보내는 수많은 찬사에 동감하지 않았는지 알았다.

팔랑대는 그녀의 웃음, 옷자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얄팍한 욕망이 메스꺼워온다. 늘 그런 인간들에게 소름이 돋았듯.


묵직한 추 하나를 매달고

가슴 언저리 어느 한 곳에 그 추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그런 사람들을 나는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다.


책꽂이 한 켠에 꽂아둘 거다. 아무도 안 빌려줄 거다. 읽으라고 권해주지도 않을 거다.

가벼운 손놀림으로 책장을 넘기고, 그보다 더 가벼운 입놀림으로 작품을 이야기하면 뺨이라도 갈겨버릴 것 같아서 말이지.


그의 두 번째 작품이라던가?

천 개의 찬란한 태양

그 책이 내 책꽂이 한 쪽에 꽂혀있어 좋다.


숨을 좀 고르고

다시 뛰어들 수 있는

깊은 심연의 이야기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은 늘 살아있어 행복한 이유이곤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