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반만년 역사를 한 학기에 '뚝딱'…한국사 교육 실태 / 대입과 무관… 왜 공부하나” 역사 깜깜한 미래 주역들

choib 2013. 5. 19. 20:18

반만년 역사를 한 학기에 '뚝딱'…한국사 교육 실태

주당 6시간 속진… 제도 개선 등 필요
세계 각 나라는 학생들의 자국 역사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민족적 정체성과 자긍심 고취 등을 위해서다. 우리 정부가 선택과목의 하나였던 한국사를 뒤늦게 필수과목으로 지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한국사에 ‘필수’ 이름표만 달아줬을 뿐 교육의 질은 관심 밖이다. 반만년 역사를 한 학기에 ‘뚝딱’ 해치우듯 가르치고,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의 신사를 ‘젠틀맨’으로 아는 학생이 실재하는 게 우리 학교의 현실이다.

◆한국사 회피 ‘강권’하는 대입제도


“서울대를 목표로 하지 않는 수험생은 사회탐구영역에서 한국사를 택하지 않는 게 좋다.”

해마다 대입 전략을 소개하는 사설 입시기관의 이구동성이다. 서울대만 한국사를 인문계열 응시생의 수능 필수과목으로 한 데 따른 조언이다. 서울대는 윤리와 한국지리, 공통사회와 함께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 영역 필수였던 국사가 2005년 선택과목으로 변경된 뒤 한국사를 필수로 지정했다.

“국립대학으로서 우리나라 역사를 배운 학생을 뽑는 게 당연하다”(김경범 입학처장)는 이유에서다. 사탐영역의 최대 선택과목이 4개에서 3개(2012∼13학년도 수능), 2개(2014학년도 수능)로 줄어도 서울대는 ‘한국사 필수’를 고수하고 있다.

그 결과 서울대를 목표로 하지 않는 대다수 상위권 학생들은 최상위권 학생과의 경쟁을 피해 다른 과목을 택한다. 서울대 진학을 염두에 두고 한국사를 수능 사탐과목으로 선택했다는 한 고3 수험생은 “우리 반에서 역사교육학자를 꿈꾸는 친구와 나를 빼면 한국사를 공부하는 학생은 없다”고 말했다. 서울대의 한국사 중시 방침이 고교생들의 한국사 기피를 조장하는 ‘역작용’을 낳고 있는 것이다.

한 지방국립대 관계자는 “한국사를 필수로 지정하면 지원 학생이 줄어들 게 뻔한데, 국립대라지만 서울 유명 사립대와 경쟁이 안 되는 상황에서 한국사를 필수로 지정하긴 어렵다”고 전했다.

서울 종로구 A고 조모(42) 국사 교사는 “한국사가 고교 필수과목이지만 수능 필수과목이 아니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며 “수능의 사탐 선택과목이 이번 수능부터 두 개로 줄어 한국사 선택은 더욱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능 사탐과목 중 ‘국사’ 선택 비율은 2005학년도 27.7%에서 2006학년도 18.3%, 2007학년도 12.9%, 2010학년도 11.3%, 2011학년도 9.9%, 2012학년도 6.9%로 해마다 줄고 있다.

◆집중이수제에 ‘역사 감수성’ 메말라

서울 강북의 B여고는 한국사 수업을 1학년 1학기(주당 6시간)에 집중이수제로 모두 끝내버린다. 그래서 지난해 이 학교 1학년 한국사 중간고사 범위는 구석기 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한국사 내용 거의 전부였다. 학생들은 엄청난 양의 시험 범위를 준비하느라 ‘진’이 빠졌다.

2학년 김모(18)양은 “역사적 사건의 의미나 전후맥락도 모른 채 사건과 연도, 키워드만 외워 시험을 봤다”며 “국사 시간을 떠올리면 ‘힘들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의 C고도 1학년 한 학기(주당 5시간) 때 한국사를 마치도록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이런 탓에 교사나 학생이나 주요 사건과 인물을 둘러싼 시대 흐름과 배경 등을 살피며 수업할 틈이 없다. 그래도 시간이 부족해 한국사의 후반부인 근현대사는 대충 훑거나 생략한다. 이렇다보니 일제 강점기의 배경이나 전두환 정권과 5·18의 관계 등 중요한 근·현대사 내용을 잘 모르는 학생이 많다.

D고의 한 국사 교사도 “초등학교 때 배운 역사지식 수준에 머문 학생들이 적지 않다”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간단한 설명도 못하거나 심지어 ‘들어보지 못했다’는 애들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사 집중이수제 제외해야

이명박정부 당시 ‘학생 학습 부담 완화와 교과수업 효율성 제고’를 위해 도입한 집중이수제가 한국사 교육에는 독이 된 셈이다. 이 때문에 집중이수제 제외 대상에 한국사를 포함시켜 고교 과정 전체에서 균형있게 다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술과 음악, 체육은 이런 논란으로 지난해 집중이수제 대상에서 빠졌다.

그러나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현행 교육과정에서도 각 학교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며 각 학교의 교육방식을 문제 삼았다. 이성호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입시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학교 측에 말로만 ‘한국사를 균형있게 편성하라’고 하면 듣겠냐”고 비난했다.

일각에서는 한국사를 사탐영역에서 독립시키고 수능 응시자격 시험을 실시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이익주 교수는 “고교 역사교육을 강화하려면 먼저 한국사를 다른 사탐 과목에서 독립시킨 뒤 모든 계열의 수험생이 반드시 봐야 하는 수능 응시자격 시험으로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강은·윤지로 기자 kelee@segye.com

 

 

대입과 무관… 왜 공부하나” 역사 깜깜한 미래 주역들

# 서울의 한 일반계고 2학년 윤모(18·여)양은 ‘4·19(혁명)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아느냐’는 질문에 “들어 봤지만 정확히 모른다”며 “4·19는 박정희, 5·18은 전두환 때가 아니냐”고 되물었다. 4·19는 이승만 정권 때 대학생들이 주도한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이다. 윤양은 3·1절과 8·15광복절도 ‘빨간 날(휴일)’과 ‘노는 날’로만 아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 경기도 분당의 고3 수험생 정모(19·여)양은 국사책을 들춰 보지 않은 지 1년반이나 됐다. 정양은 “한국사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서울대만 필수로 지정해 이 대학을 지원하려는 일부 학생들을 제외하고 1학년 때 집중이수제로 한국사 수업을 마친 뒤로는 아예 책을 덮는다”고 말했다.

미래 대한민국 주역들에게 민족·역사의식을 고취시켜야 할 한국사가 홀대받고 있다. 19일 세계일보가 학교정보 공시사이트인 학교알리미에 올라온 서울시내 일반계고와 자율형 사립·공립고 218개교(자료가 공시되지 않은 10개교 제외)의 2013학년도 교육과정 운영실태를 전수조사한 결과 178개교(81.7%)가 두 학기에, 40개교(18.3%)는 한 학기에 한국사를 몰아서 편성했다. 특히 197개교(90.4%)는 1학년 때 한국사 수업을 모두 끝낸다. 한국사 교육 파행이 도를 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는 30개가 넘는 고교 선택과목 중 지난해 유일하게 필수과목으로 지정됐다. 일본의 역사 왜곡과 독도침탈 야욕, 중국의 동북공정 움직임 등이 노골화하는 상황에서 한국사를 선택과목으로 둔 데 대한 반발여론이 거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정부가 다른 사회탐구 과목과의 기계적 형평성이나 수업의 효율성에만 매몰돼 입시제도와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서울대를 제외한 대학들의 외면으로 한국사 교육의 파행이 심각하다. 특히 2009년 교육과정 개정에 따라 특정과목을 한 학년·학기에 몰아서 수업할 수 있도록 한 집중이수제는 한국사 교육 파행의 ‘주범’이다.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고등학생들은 서울대나 역사관련 학과 지망생을 빼면 1학년을 마친 뒤 한국사와 담을 쌓게 된다.

여기에 2014학년도 대입수학능력시험부터 사회탐구영역 선택과목 수가 2개로 줄고, 기존 국사와 한국 근·현대사가 한국사로 합쳐진 것도 학생들의 한국사 기피현상을 부채질했다. 지난해 수능에서 인문계열 수험생의 사회탐구 선택과목(11개)별 응시율(전체 사탐응시자수 기준)을 보면 근·현대사는 46.3%로 사회·문화 64.8%와 한국지리 50.4%에 이어 3위였다. 하지만 지난 3월과 4월 실시된 고3 수험생 대상 전국연합학력평가에서는 한국사 응시율이 각각 14.3%와 11.5%로 뚝 떨어졌다.

역사가 여타 사회 과목과 같은 교과군으로 묶인 중학교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역사교과서 집필기준개발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국사학)는 “학생들이 한국인으로서 정체성과 바른 역사의식 형성에 필요한 기초적인 지식을 쌓도록 쉽고 재미있는 한국사 교육과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며 “모든 수험생이 부담없이 한국사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강은·윤지로 기자 ke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