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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호 기자 |
상담 꺼리는 이유 "어쨌든 결론은 공부"
격려의 말 힘 되지만 과도한 기대는 부담
"'꿈 없다' 질책만 말고 실질적 도움 주길"
"아이와 소통엔 별 문제가 없어요. 고민 있을 때마다 저한테 곧잘 상담하거든요. 주변에 공부 잘하는 자녀 둔 부모 만나면 아이 공부법이나 학원 정보 같은 것 유심히 들었다 얘기해주기도 하죠. 글쎄요, 100점 만점에 90점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고교생 자녀를 둔 부모 중 상당수는 '자녀와 잘 지내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같은 부모의 생각은 '혼자만의 착각'일 가능성이 크다. 교육 전문 기업 진학사는 지난 2월 18일부터 3주간 전국 중고생 351명과 학부모 79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했다〈아래 참조〉. 동일한 질문을 놓고 학생과 학부모의 답변을 비교한 결과, 상당 부분이 '동상이몽(同床理夢)'인 걸로 입증됐다. 똑같은 사안을 놓고도 부모와 자녀 간 의견 차가 상당하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자녀' 측 생각은 어떨까? '말 잘하기로 소문난' 서울 세종고 2학년 토론반원 6명에게서 그 힌트를 구했다.
◇‘공부’면 만사형통?… “고민 오히려 쌓여요”
자녀가 부모와의 고민 상담을 꺼리는 이유는 뭘까? 이강준군은 “대부분의 부모님이 자녀의 고민 토로에 ‘공부’로 일갈하더라”고 꼬집었다. 친구와의 다툼, 미래에 대한 불안, 학교 생활 관련 불만 등 어떤 걸 말해도 결국 돌아오는 건 ‘공부 잘하면 다 해결된다’는 답변이란 얘기다. 박나연양도 이에 동의했다. “한 번은 엄마에게 ‘초등학교 교사’가 꿈이라고 얘기했어요. 엄마가 좋아하시면서 그러시더라고요. ‘초등학교 교사 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하는 것 알지?’”(웃음) 손성은양은 “부모님과 고민 상담을 할 때 필요한 조언을 들을 수 있으리란 기대는 적은 반면, 불리한 내 패만 보여주는 느낌이 든다”며 “부모님이 자기 말 때문에 이것저것 신경 쓰실까 봐 속 깊은 얘긴 좀처럼 안 꺼내는 애들이 많다”고 말했다.
◇꿈이 없다?… “꿈 찾을 기회 먼저 줘보세요”
박준영군은 “우린 꿈이 없는 게 아니라 ‘꿈 찾을 기회’가 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희망 없는 10대’ 같은 제목의 기사를 볼 때마다 한숨이 나와요. 수학 문제를 많이 풀면, 영어 독해를 잘하면 꿈이 보일까요? 세상엔 무수한 직업이 있다지만 우리 같은 고교생이 아는 직업이라곤 의사·변호사를 비롯한 몇몇 전문직이 전부예요. 선택의 폭 자체가 한정돼 있는데 무슨 꿈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죠?”
정지선양은 “학교에서 진로진학 수업이 개설되긴 하지만 대다수의 친구가 그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거나 부족한 잠을 보충한다”고 말했다. “설사 관심 있는 분야가 생긴다 해도 알아볼 시간이 없어요. 사정이 이러니 꿈을 향한 구체적 계획 같은 걸 세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죠. 덮어놓고 ‘꿈 없다’며 질책하기보다 자녀의 관심사를 물어본 후 그에 관한 실질적 도움을 주시는 부모님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따뜻한 관심 원해… 단 ‘간섭’ 말고 ‘격려’
“부모님은 자식 공부도 몸소 관리해야 잘될 거라고 믿으시는 것 같아요. 한창 공부하고 있는데 불쑥 ‘졸았던 것 아니냐’고 물어보시면 공부하고 싶은 기분이 싹 달아나곤 합니다.”(김도경)
인터뷰에 응한 여섯 학생은 “누구보다 공부에 신경 쓰는 건 우리 자신”이라고 입을 모았다. 박준영군은 “집에서 공부하면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난 나대로 스트레스가 쌓여 교내 자율학습실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성은양은 “매일 아침 7시면 나가 밤 10시쯤에야 귀가하는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막상 집에 왔을 땐 다그치는 말(‘공부 열심히 했어?’)보다 격려하는 말(‘힘들었지?’)이 훨씬 듣고 싶더라”고 말했다. 이강준군 역시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에 왔을 때 부모님이 ‘수고했다’며 안아주시면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부모와 자녀 둘 다 ‘따뜻한 관심’을 원하지만 양자의 온도엔 상당한 격차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송성은양은 “지금 부모님 입장에선 학창시절이 장밋빛으로 기억될 수 있겠지만 당장 닥친 현실을 힘겨워하는 우리 입장을 조금만 더 고려해 기대치를 좀 낮춰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조찬호 맛있는공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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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유경희씨·채은혜양·채휘웅씨. 채형철씨는 교토대 연구소 인턴십 참가를 위해 학기 시작보다 한 달 먼저 일본으로 떠나 촬영에 함께하지 못했다. /안양=백이현 인턴기자 |
유경희(49)·채휘웅(51)씨 부부(경기 안양 동안구 관양동)는 남매를 각각 이공계열과 인문계열 인재로 길러냈다. 아들 채형철(일본 교토대 응용생명과학전공 3년)씨는 경기과학고를 졸업하고 한·일공동이공계학부 유학생으로 선발돼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 다닌다. 한·일공동이공계학부 유학생은 한·일 양국 정부가 친목을 도모하고 첨단 과학기술 인재를 공동으로 양성하기 위해 운영 중인 장학 제도. 전국단위 선발시험 통과자(연간 100명 내외)는 항공료·등록금·생활비 등 유학비 일체를 지원받으며 일본 국립대에서 수학할 수 있다. 형철씨는 지난해 국제합성생물학대학생경연대회(iGEM) 아시아 지역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딸 채은혜(용인외국어고 3년)양은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영어영문학과 진학을 꿈꾸고 있다.
rule1_ 아이가 사교육에 지쳤다면 '휴지기' 줘야
스스로 "완벽주의 기질이 있다"고 인정하는 유씨는 형철씨가 중 3 때까지 전 과목을 직접 가르쳤다. 형철씨는 엄마의 노력, 그리고 평촌 지역 유명 학원의 선행 학습에 힘입어 경기과학고 입시엔 성공했지만 입학 직후부터 방황하기 시작됐다. "학교 공부가 어려워 진도 따라가기도 버겁다고 하더군요. 자긴 과학고 진학이 목표였는데 이제 더 이상 뭘 목표로 삼아야 할지 모르겠다고…."(채휘웅)
부부는 아들이 걱정됐지만 일단 믿고 지켜보기로 했다. 경기과학고는 학년별 정원 100명 중 90명 안팎이 2학년 때 조기 졸업, 대학에 진학한다. 하지만 형철씨는 '3학년 잔류파' 중 한 명이 됐다. 채씨는 "학교 동기보다 1년 늦게 대학 간다고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다"며 상심한 아들을 격려했다. 아버지 말에 평정심을 찾은 형철씨는 차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년 후 한·일공동이공계학부 유학생 선발시험에서 수학 만점 등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당초 목표로 했던 교토대 진학에 성공했다.
형철씨는 방학을 맞아 국내에 머물다 지난달 교내 연구소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은 새 학기가 우리나라보다 한 달 늦은 4월에 시작한다). 출국 직전 그는 유씨에게 신신당부했다. "엄마, 은혜는 학원에 보내지 마세요. 이제 정리할 시간이에요." 유씨는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부모 마음 한편엔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학원에 보내놓으면 '뭐라도 배우고 있겠지' 안심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불안감을 다스리는 건 온전히 부모 자신의 몫이에요. 부모 불안을 핑계로 아이를 밖으로 돌리는 건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rule2_ 부모는 자녀에게 '독서 재미' 일깨우는 사람
부모의 관심이 온통 오빠에게 가 있는 동안 은혜양은 책에 파묻혀 유년기를 보냈다. "은혜가 초등 2학년 때였을 거예요. 하루는 아이가 '책을 읽으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라고 말하더라고요. 신선한 충격이었죠."(유경희) 은혜양은 책을 읽을 때마다 자신만의 메모법을 활용한다. "책 속 궁금증을 해당 페이지 한 귀퉁이에 작게 적어둬요. 나중에 보면 좀 창피하기도 하지만 이것만큼 기억에 잘 남는 정리법이 없더라고요."
딸 못지않은 독서광인 유씨는 "책은 사는 것보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게 효과적이더라"고 귀띔했다. 반납 기한 내에 빌린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경기도교육청 학부모강사요원으로도 활동 중인 그는 강연 도중 만나는 학부모들에게 "집에 좀 붙어 계시라"고 당부한다. "애가 없을 땐 밖에서 놀다가 애가 집에 오면 덩달아 귀가해 설거지·빨래·청소로 시간 보내는 엄마가 많아요. 그런 상황에서 애가 무슨 책을 얼마나 읽을 수 있겠어요." 실제로 유씨는 아이들이 학교 간 사이 낮잠으로 피로를 푼 후 하교할 즈음엔 어김없이 책을 펴들었다. 은혜양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엄마를 보며 '책은 누구나 읽어야 하는 것'이란 생각을 어릴 때부터 하게 됐다"고 말했다.
유경희씨와 채휘웅씨는 남매가 공부하느라 밤늦게까지 못 자면 자신들도 깨어 있으려 노력했다. 유씨가 잠을 쫓기 위해 배운 건 '퀼트'. 작품이 완성되면 아이들 학교 교사에게 선물로 건넬 수도 있어 안성맞춤인 취미였다. 채씨는 고된 업무로 파김치가 돼 퇴근해서도 틈날 때마다 '축구 마니아' 형철씨와 공을 차며 아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줬다. 각각 '완벽주의형'과 '자유방임형'으로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남매를 키워낸 부부는 입을 모아 말했다. "지나친 교육열 탓에 형철이를 지치게 하며 시행착오를 겪고 난 후 은혜를 길러보니 독서만큼 중요한 게 없더라고요. 아이가 하나 더 있었다면 더 잘 키울 자신이 있는데 아쉬워요."(웃음)
[안양=이해나 맛있는공부 기자 ]